창덕궁을 마주하고 자리한 서울 종로구의 아라리오 스페이스(옛 공간 사옥). 한국 현대건축과 문화예술의 선구자인 건축가 고(故) 김수근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다. 과거엔 도시건축 전문 공간(空間)그룹의 사옥이었고, 현재는 아라리오 뮤지엄·갤러리 등 미술품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 청담동에서 출발한 컨템퍼러리(동시대) 이노베이티브 한식 다이닝 레스토랑인 ‘묘미(myomi)’는 이처럼 역사와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 지난 2019년 둥지를 틀었다.
묘미(妙味)는 이름처럼 한식의 미묘한 맛과 색다른 재미를 끌어낸다. 한국 문화의 헤리티지가 담긴 한식에 젊음과 에너지 넘치는 열정을 가미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없던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묘미의 음식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키친은 장진모·김정묵 셰프에 이어 2023년 4월 헤드셰프의 바통을 이어받은 김효중 셰프(24)가 총괄하고 있다. 그는 “한식에서 파생된 음식이지만 경계는 크게 없다”며 “한식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시험하며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해서 창조해내고 있다”고 말했다.
묘미는 1년에 4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코스를 새롭게 개편한다. 묘미가 지난 12월 12일부터 선보인 이번 겨울 시즌 다이닝 코스는 강렬함 그 자체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린,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맛이지만 한입만 스쳐도 진한 인상을 남긴다. 김 셰프를 필두로 각 메뉴에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시도를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 분위기와 겨울의 멋을 풍기는 데코도 재미 포인트다.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비주얼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자연의 풍미를 담은 묵직한 맛은 순간순간 산과 바다, 땅을 떠올리게 한다. 김 셰프는 “연말연시를 맞아 와인을 곁들이기 좋은 진한 밸런스로 메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묘미는 런치와 디너 각각 단일 코스로 운영되고 있다. 런치코스는 한 입 거리의 아뮤즈 부쉬(Amuse bouche·전채)로 시작해 제철회, 생선요리, 닭백숙, 한우스테이크, 된장으로 만든 디저트, 커피 또는 차로 마무리된다. 디너코스는 여기에 4~5개 메뉴가 추가된다. 세계 최고 캐비어 브랜드로 꼽히는 프랑스 ‘카비아리(Kaviari)’의 캐비어 중에서도 최상급을 사용한다. 제철 회와 한우스테이크에는 캐비어를 추가할 수 있다.
이번 겨울 시즌 다이닝 코스의 아뮤즈 부쉬는 ‘길거리 음식’이다. ‘어묵’과 ‘타코야키’ ‘호빵’ 등 세 가지 한 입 거리로 구성됐다. 언뜻 파인다이닝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메뉴의 이름일 뿐 일반적인 어묵이나 타코야끼, 호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의 비주얼도 이름과는 쉽게 매칭되지 않지만, 먹어보면 누구나 그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는 맛이다. ‘어묵’을 예로 들면 어묵은 아니지만 어묵의 풍미를 차용한, 완전히 새로운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효중 셰프는 “추천하는 순서는 ‘어묵’ ‘타코야키’ ‘호빵’ 순”이라며 “따뜻한 ‘어묵’을 먼저 먹고 난 뒤의 느끼함을 ‘타코야키’의 짭짤한 맛으로 잡아주고, 마지막에 상큼함과 향긋함을 느낄 수 있는 ‘호빵’으로 감각을 깨워주면서도 깔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푸딩처럼 떠먹는 음식인 ‘어묵’은 꽃게로 우려낸 육수를 달걀과 섞어 달걀찜을 만들고 그 위에 염소치즈를 에스푸마(크림이나 퓌레, 젤라틴 등이 함유된 액체 혼합물을 휘핑 사이펀에 넣어 공기층과 함께 짜낸 거품이나 무스)처럼 짜준 뒤 위에 건새우 파우더로 얇은 층을 만들어 마무리한 메뉴다. 첫맛부터 진한 새우향이 입맛을 돋우고 폼 형태의 염소치즈와 그 아래 꽃게 달걀찜은 크림처럼 부드럽게 입안을 감싼다. 일본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인 일본식 문어풀빵 ‘타코야키’는 문어로 우려낸 육수로 머랭을 만들어 가장 아래쪽에 깔고, 가쓰오로 만든 간장젤리를 올렸다. 여기에 문어와 비슷한 식감이 날 수 있도록 초리조햄을 볶아 넣고 문어오일을 활용한 마요네즈 소스와 가쓰오부시로 마무리했다. 첫맛에 느껴지는 유자향은 은은하게 혀끝을 감돌며 비린내를 잡아주고 상큼함을 더한다.
호빵’은 중식의 꽃빵을 살짝 튀긴 뒤 염장한 숭어 회와 제철 과일인 딸기, 식초를 졸여 만든 향긋한 시럽과 라임 시럽, 캐비어를 올렸다. 손가락만 한 미니 트리처럼 빵 위에 올라간 식재료들은 각자의 존재감을 과하지 않게 드러낸다. 젤리같이 쫀득한 숭어 회가 전체적인 식감을 살려주지만 생선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최고급 캐비어는 ‘호빵’에 화룡점정이 된다.
묘미의 가장 유명한 시그니처 메뉴는 닭백숙이다. 이 메뉴 역시 닭백숙에서 영감을 얻은 요리로 누룽지 닭백숙처럼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맛이 특징이다. 수비드 조리한 닭가슴살과 들기름에 볶은 제철 곤드레나물, 톡톡 씹히는 보리밥, 누룽지 숭늉으로 만든 눅진한 리소토 위에 오골계를 끓여 만든 맑은 닭 육수를 따끈하게 부어 만들었다. 그 위에는 닭 모양으로 만든 바삭한 누룽지 칩을 올렸다. 숟가락으로 칩을 깨국물, 리소토와 함께 떠먹으면 깊은 맛이 느껴지면서도 기름지지 않고 깔끔하다.
김 셰프는 “겨울엔 곤드레나물, 가을엔 능이버섯 등 계절의 특징을 살려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육수에 배어난 곤드레나물의 향은 은은하다. 리소토는 크림 리소토처럼 부드럽지만 기름기 있는 크림은 전혀 들어가지 않아 육수 안에서도 재료가 분리되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누룽지를 끓여 숭늉처럼 만든 뒤 갈아 농도를 잡고 약간의 버터만으로 만든 것이다.
한우와 제철 회도 저마다의 특별함을 갖고 있다. 한우 스테이크는 투뿔(1++) 등급의 한우채끝스테이크로, 숯불 직화와 훈연을 통해 30분에 걸쳐 서서히 익힌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특제 소스를 발랐다. 겉보기엔 굽기가 미디엄 웰던처럼 보이지만 막상 먹어보면 미디엄에 가깝게 부드럽고 숯불향과 육즙이 풍부하다. 육즙을 가두는 시어링을 거쳤지만 1~2분 정도 짧은 시간만 직화로 굽고 나머지 시간은 훈연해 고기 겉면부터 안쪽까지 부드럽게 씹힌다. 특제 소스는 소뼈를 끓여 농축한 천연 젤라틴과 한우 채끝살 육수에 흑마늘(발효마늘)로 약간의 산미를 더했다.
또 스테이크와 함께 샐러리악(샐러리 뿌리)으로 만든 퓌레와 우엉 튀김이 간이식으로 곁들여져 땅의 맛을 극대화해준다.
제철 회는 겨울 방어를 소재로 했다. 역시 특제 소스가 포인트다. 김 셰프는 “방어 회를 먹을 때 막장과 쌈장, 간장, 고추를 같이 먹는 것에 착안해 소스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얇게 저민 방어 회로 귤을 감싸고, 그 아래에 청양고추와 간장을 베이스로 한 특제 소스를 깔아 내놓는 요리다. 안에 있는 귤이 터지면서 나오는 상큼한 맛과 일식의 와사비 같은 소스의 톡 쏘는 매운맛이 감칠맛을 더해줬다.
묘미에서는 런치에는 4잔 또는 6잔, 디너에는 6잔 또는 9잔의 추천 와인 페어링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새로운 국가와 품종의 와인이나 국내 소량만 들어와 희소성 높은 와인을 소개하고 있다.
묘미의 다이닝 공간은 통창으로 주변 풍경을 안으로 끌어온다. 특히 묘미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의 사계절 정취를 함께할 수 있다. 이 일대엔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데다 앞이 탁 트인 덕분에 묘미의 다이닝 공간에서는 창덕궁을 비롯한 주변의 고즈넉한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테이블은 2인석 4개, 4인석과 6인석 각각 1개씩 최대 18명을 수용할 수 있다. 별도의 프라이빗 룸은 없지만, 묘미가 있는 건물의 5층 공간 자체가 삼면이 통창으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줘 집중도가 높다.
고등학교 시절 중식으로 요리에 입문한 김효중 셰프는 졸업 후 중식 대가 여경래 셰프의 중식 레스토랑 홍보각을 비롯, 서울 임페리얼팰리스 호텔 등을 거쳐 지난 2020년 막내 셰프로 묘미에 합류해 이노베이티브 파인다이닝으로 전향했다. 이후 묘미에서 지난 3년간 차근차근 역할을 늘려 최근까지 메인요리 파트장을 맡다 2023년 4월 헤드셰프가 됐다. 김 셰프는 “중간에 가족들 권유로 조리공무원 준비도 잠깐 했었는데 주방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며 “그때 묘미에 지원해 왔는데 좋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묘미는 세계적인 미식 리스트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서 2023년 4년 연속 1스타를 받았다. 김 셰프는 “앞으로도 묘미가 1스타 이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이고, 개인적으로는 향후 제대로 된 중식 파인다이닝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묘미(myomi)
장르 이노베이티브 한식
위치 서울 종로구 율곡로 83 아라리오 스페이스 5층
헤드셰프 김효중 셰프
영업시간 화~토 10:00~22:00(15:00~17:00 브레이크 타임),
매주 일·월 정기휴무
가격대 런치코스 16만원, 디너코스 26만원
프라이빗 룸 없음
전화번호 02-515-8088
주차 건물 1층 야외주차장 이용
[송경은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