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토머스 해리스 `양들의 침묵` vs 조너선 드미 `양들의 침묵` | 그의 뒷덜미를 잡으려는 암흑 속의 손
김유태 기자
입력 : 2022.08.31 16:46:40
수정 : 2022.08.31 16:46:57
오늘은 고전으로 가보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스콜에 가까운 날씨가 여름 낮밤을 할퀸 이때에 영화의 오랜 팬들은 다음 대사만 들어도 피부가 오싹해지는 경험이 가능할 겁니다.
“클라리스, 양들은 울음을 그쳤나?”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2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5관왕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영화 <양들의 침묵>은 스릴러의 교과서로 기억되는 명작입니다. 조디 포스터, 앤서니 홉킨스가 주연해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 등을 받은 <양들의 침묵>은 1988년 소설가 토머스 해리스의 동명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입니다. 30년 넘게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은 이 작품은 작년 소설 리커버 개정판이 출간될 정도로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고, 작년 말엔 미국 CBS가 <클라리스>라는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하는 등 식지 않은 열기를 보여주는 중입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 드러나지 않았던 소설 <양들의 침묵> 속 비밀의 심부로 함께 들어가 봅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
▶지하감옥의 어떤 현자
줄거리 복습이 필요하겠죠. 미국 버지니아대에서 범죄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은 FBI 콴티코기지 연수원 건물에서 상관 크로포드의 호출을 받아 행동과학부 사무실로 향합니다.
크로포드의 요청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살해한 여성의 피부 가죽을 벗기는 연쇄살인범 버펄로 빌의 결정적 단서를 알고 있는 한니발 렉터 박사를 만나고 오라는 지시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렉터 박사는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식인 범죄로 환자 9명을 살해한 ‘순수한’ 사이코패스였습니다. 스탈링은 렉터 박사가 머무는 지하감옥으로 향합니다. 8년째 이곳에 수감 중이던 렉터 박사는 명석한 두뇌로 단숨에 스탈링의 출신과 배경을 간파합니다. 이어 스탈링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극복과 버펄로 빌 사건의 해결을 동일시하는 전략으로 풋내기 수사관을 돕습니다. 렉터 박사는 그 대가로 갈망하던 자유를 획득하죠.
몸집이 큰 여성을 납치해 2~3일간 굶긴 뒤, 헐거워진 살가죽을 벗겨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입는 정신이상자 버펄로 빌 사건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신 분들에게는 익숙한 결말로 여겨지실 겁니다. 본고에선 좀 더 깊게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원작 소설 <양들의 침묵>엔 스크린에서 밀려난 무수한 이야기더미가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차려져 있었습니다.
▶이성(理性)의 두 가지 방식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스탈링에게 지시를 내리는 크로포드의 캐릭터에 주목해 봅니다. 그는 주로 FBI 행동과학부에 근무하는 상관 역할로 등장합니다. 소설에는 크로포드가 스탈링에게 내심 마음을 두었다는 등의 자잘한 차이점이 섞여 있긴 합니다. 그러나 크로포드를 둘러싸고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소설 속 쟁점은 크로포드와 렉터 박사가 상호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렉터 박사는 스탈링에게 개인과 사건의 유기적 연관성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스탈링은 경찰서장이었던 아버지가 총격으로 사망한 뒤 양과 말이 있는 목장에서 자라다 탈출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습니다. 목장에선 양과 말의 도살이 빈번히 일어났고, 스탈링은 성년이 되어서도 자신이 구하지 못한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지요. 이것이 영화의 주제를 이룹니다. 그러나 크로포드는 스탈링에게 말합니다. 렉터 박사와 정반대이지요.
“범죄를 자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분리시켜 생각해야 해. 버펄로 빌에 대해 어떤 패턴이나 대칭적인 요소를 부여하려고 애쓰지 마. 열린 마음으로 조사하다 보면 언젠가는 놈이 존재를 드러낼 거야.”(41쪽)
존재를 노출하기. 원작 소설을 쓴 토마스 해리스가 크로포드의 말에 숨겨둔 이 문장은 단순한 조언만은 아닌 듯합니다. 렉터 박사가 개인과 세계와 연관성을 주장하는 반면, 크로포드는 개인과 세계의 단절성을 애써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뭘 의미할까요.
철학자 베이컨에 따르면 진리(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귀납과 연역 둘뿐입니다. 렉터 박사는 스탈링 눈앞에 놓인 사례들로부터 하나의 명제(‘버펄로 빌이 사람의 피부로 가슴 달린 조끼를 만들려고 한다’)를 발견합니다. 그는 귀납적인 인간입니다. 구체적인 살인 사건들로부터 사건의 원리(버펄로 빌의 진짜 목적)를 도출해내도록 스탈링에게 요구하니까요. 크로포드는 사례들로부터 패턴과 대칭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대신, 진실이 눈앞에 드러나는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는 방식을 취하기를 권유합니다. 이런 방식의 논리는 연역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인 원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이죠. 렉터 박사는 철학의 경험주의를, 크로포드는 합리주의를 상징합니다.
<양들의 침묵>이 30년 넘게 회자되고 기억되고 추앙받는 이유는 인간이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에 대한 알레고리적 헌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이 존재와 진리를 만나기 위해 다가가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은유를 펼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놓고 보면 <양들의 침묵>은 단순한 스릴러만은 아니게 됩니다.
▶물 양동이를 든 반인반수
영화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인상적인 그림 한 점이 소설 <양들의 침묵>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렉터 박사가 스탈링에게 말하는 그림인데, 티치아노가 1570년대에 6년간 그렸다는 <마르시아스의 가죽을 벗기는 아폴론>이란 작품입니다. 잠시 그리스 신화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숲의 정령인 마르시아스는 자신의 피리 부는 솜씨에 한껏 도취돼 신 아폴론과 연주를 겨룹니다. 도저히 승부가 나지 않아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하자는 아폴론의 제안을 받아들인 마르시아스는 결국 패배하고 산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패자는 승자의 요구를 달게 받아야 한다는 약속이 있었으니까요. 렉터 박사는 마르시아스가 거꾸로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는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버펄로 빌의 여러 단서들을 발견합니다.
“티치아노는 역시 세부 묘사가 끝내줘. 옆에서 물 양동이를 들고 일을 돕는 판(Pan)을 눈여겨봐둬.”(265쪽)
다시, 티치아노의 그림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자세히 볼까요.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는 마르시아스의 오른쪽에 서 있는 판의 얼굴이 보입니다. 판은 그리스 신화에서 여성을 탐하는 공포의 존재, 밤길과 적막 속에서 마음속에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그런 판의 손에 물 양동이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작은 강아지가 마르시아스가 흘린 피를 핥고 있습니다. 가죽이 벗겨지는 마르시아스, 물 양동이를 들고 서 있는 괴기한 표정의 남자, 그리고 그 앞의 작은 강아지.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들지 않으시나요?
티치아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 양동이를 든 판은 우물 위에서 양동이를 들고 여성의 고통을 바라보는 버펄로 빌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르시아스는 가죽이 벗겨지는 피해 여성들을 은유하고, 물 양동이와 강아지는 우물 바닥에 갇힌 캐서린의 상황을 은유하는 식이지요. 버펄로 빌이 스탈링을 살해하고자 그를 어둠으로 유인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지요. 판은 어둠 속에서 공포를 일으키니까요. 완벽한 어둠으로 유인된 버펄로 빌의 검은 손이 스탈링의 뒷덜미를 낚아채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스탈링이 느낀 공포는 결국 그리스 신화에서 보였던 여성들의 오랜 두려움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스탈링은 결국 그 공포를 이겨내고 공포의 원천을 살해한 최초의 여성이 됩니다. 버펄로 빌이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피해자의 머리 가죽을 가발처럼 정수리에 얹고 나체로 춤을 추는 장면은 소설에는 원래 없는 장면입니다. 조너선 드미 감독은 원작 소설에 나오는 <마르시아스의 가죽을 벗기는 아폴론> 그림을 이 장면에서 현대적으로 재현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합니다. 버펄로 빌의 연인이었다가 유리병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된 라스페일이 플루트 연주자였다는 점도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스 신화 속 마르시아스 역시 자신의 악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 악기는 다름 아닌 피리였습니다.
▶광기와 현실의 뒤안길에서
영화에서는 삭제됐지만 소설에서 의미 있게 기억되는 지점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버펄로 빌은 스탈링의 총격 이후 한마디를 남깁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606쪽)
버펄로 빌은 미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연쇄살인과 피부 벗기기, 그리고 사람의 가죽을 이용한 옷 만들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스탈링의 아름다운 외모를 탐합니다. 저 대사가 영화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조디 포스터의 미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까요.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폭력은 강한 힘을 가지고 그 뒤안길에 약자는 존재합니다. 단지 볼거리로서의 영화가 아닌 현실을 반영했다는 점이 <양들의 침묵>이 건네는 공포에 우리가 매료됐던 이유가 아니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