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영국 카디프에서 만난 인상주의 화가 시슬레
입력 : 2022.06.13 11:06:01
수정 : 2022.06.13 11:06:16
영국 속에서 또 다른 영국을 느낄 수 있는 웨일스의 수도 카디프. 이곳은 우리에게 아주 낯선 도시지만, 인상주의 화가 중 알프레드 시슬레와 클로드 모네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의미 있는 여행지이다. 특히 영국 국적을 갖고 프랑스에서 인상주의 화가로 활동한 시슬레에게 카디프는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 결혼식을 올리게 된 추억의 도시이기도 하다.
모네와 비슷한 화풍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슬레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영국 이민자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세 때 런던에서 4년간 비즈니스를 공부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파리로 귀국하자마자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스위스 출신의 샤를 글레르 화실에 들어가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등과 동문수학을 했고, 1874년 4월 15일,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20여 점의 풍경화를 출품할 정도로 인상주의 화가가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인상주의 화가로 활동했던 시슬레는 아내와 함께 죽기 2년 전인 1897년 7월부터 9월까지 카디프를 여행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암 투병 중이었지만 시슬레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카디프의 거친 파도를 보며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예술적 영혼을 마른 수건을 짜듯 짜내어 하얀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시슬레가 모든 힘을 쏟았던 웨일스는 과연 어떤 곳이기에 인상주의 화가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을까?
<레이디스 코브 해변의 스토 록, 저녁>
우선 카디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북해에서 내려온 켈트족이다. 그 후 앵글로색슨족이 들어와 원주민인 켈트족과 갈등 관계를 지속하다가, 1284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의 전쟁에서 패해 영국 연합국에 편입되었다.
영어와 웨일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카디프는 영국에서 아홉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19세기부터 석탄 수출항과 기계 공업이 발달한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의 지명인 카디프는 ‘타프의 성(城)’이라는 뜻이다. 현재 카디프는 도심과 카디프 해변, 이렇게 두 곳을 주요 관광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20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카디프 시내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카디프 성이 눈에 들어온다. AD 55년, 로마군이 현지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지은 것이 성의 시초이고, 11세기와 12세기 영국으로 들어온 노르만족이 그들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성의 외벽을 쌓고 정원을 꾸미는 등 로마의 요새를 성벽과 성채를 갖춘 성으로 개축했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성을 거쳐 간 많은 성주가 카디프 성의 모습을 개조했는데, 19세기 영국 최고의 건축가 윌리엄 버지스와 이 성을 상속받은 뷰트 후작에 의해 지금의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바뀌었다.
뷰트 후작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카디프를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남부 웨일스의 석탄을 전 세계로 수출하는 항구 도시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카디프 성을 윌리엄 버지스를 통해 중세풍의 아름다운 성으로 개축한 것이다. 성 안에는 웨일스 연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스라한 뷰트 후작 가문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카디프 성을 등지고, 인상주의 화가 시슬레, 모네, 르누아르, 마네, 피사로,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카디프 국립미술관이 여행자들의 눈과 마음을 매혹한다. 입장료도 없는 카디프 미술관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미술관이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화들이 많은 곳이다. 이 중에서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모네의 <황혼에 물든 베네치아의 산 죠르조 마조레 성당> <루앙 대성당> <수련> 등 17점을 볼 수 있고, 르누아르의 <파리지앵>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 7월 죽기 3일 전에 완성한 <비 내리는 오베르> 등도 볼 수 있다. 또한 프랑스 최고의 조각가인 로댕의 <키스>와 <영원한 봄>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얼굴> 등도 소장하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였지만 평생 무명으로 살다가 말년이 돼서야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슬레는 자신을 후원하던 한 사업가의 주선으로 영국 웨일스와 카디프 해안으로 여행을 올 수 있었다. 이 여행에는 시슬레와 오랫동안 아내로 살아온 다섯 살 연하의 외제니 르수제크도 함께 했다. 1867년 이들 부부는 한 편의 영화처럼 화가와 모델로 만나 금세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난 후 시슬레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가난한 화가로 전락했다. 아들과 딸을 두었지만, 결혼식조차 올리지 못한 시슬레 부부는 모처럼 카디프 해안에서 여유 있는 삶을 누렸다.
바람을 가득 품은 파도는 해변으로 거칠게 달려들어 바위를 거세게 때린 후 거품처럼 사라지자 새로운 파도가 또 달려들었다. 변화무쌍한 영국 날씨지만 생경한 바다 풍경은 시슬레의 영혼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파리의 센강을 주로 그렸던 시슬레는 처음으로 바다와 절벽을 주제로 유화 17점을 화폭에 담았다.
르누아르 <시슬레 부부 초상> (1868)
바다에서 영감을 받은 시슬레의 붓질은 파도만큼 빨라졌는데, 동시에 암과 투병 중이던 아내의 몸도 더욱 악화했다. 1897년 8월 5일, 시슬레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했는지 곧바로 카디프 시청으로 달려가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도 마쳤다. 안타깝게도 1897년 9월 25일 파리로 돌아온 아내는 그해 세상을 떠났고, 1899년 1월 시슬레도 절친이었던 모네에게 모든 것을 부탁하고, 만 60세 일기로 아내 곁으로 간다.
유화 900여 점과 파스텔화 100여 점을 그린 시슬레는 카디프의 해안을 사랑했고, 아내와 함께 즐겁게 지냈지만, 이들에게 카디프 해안은 마지막 여행지였다. 하지만 시슬레의 붓을 통해 <레이디스 코브 해변의 스토 록, 저녁> <절벽 위에서> 등 카디프의 해변에서 그린 그림과 부부의 마지막 여행이 카디프에 영원한 추억으로 남았다.
[이태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