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시벨리우스의 두 번째 교향곡이 말하는 것… 애국심의 발로 혹은 영혼의 고백
입력 : 2022.06.08 16:10:34
수정 : 2022.06.08 16:10:56
지난 5월의 어느 수요일 밤, 부산문화회관에서 독특한 공연이 열렸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이 해설을 곁들인 기획음악회 ‘심포니야(Symphony 夜)’를 선보인 것. 이 공연이 독특했던 이유는 통상적인 콘서트와는 달리 서곡이나 협주곡 없이 교향곡 한 곡만 연주하고 앙코르도 없이 마치는 이례적인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기획한 악단의 예술감독 최수열 지휘자의 의도는 보다 진지했다. 걸작 교향곡 한 편의 매력과 가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다는 것. 교향악 애호가라면 십분 공감하고 환영할 만한 아이디어였다.
이날 공연에서 내 역할은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와 감상을 돕기 위한 사전 해설(약 20분)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작품은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2번 D장조>.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로 추앙되는 시벨리우스의 대표작인 이 곡은 핀란드인들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이 투영된 작품으로 해석되곤 한다. 시벨리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던 무렵에 핀란드는 러시아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기에, 핀란드가 러시아에 맞서 나토(NATO) 가입을 선언한 현 시점에 이 교향곡을 접하는 것은 사뭇 의미심장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1890~1900년경 시벨리우스.
▶해방과 독립을 암시한 교향곡
1902년 3월 8일,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 자신의 지휘로 거행된 이 교향곡의 초연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 중 하나였다. 해당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었음은 물론이고 그 직후 앙코르 공연이 세 차례나 열렸으며 전부 매진되었던 것이다. 당시 핀란드 국민들이 그처럼 열렬한 관심과 지지를 보낸 이유는 이 작품이 다름 아닌 ‘핀란디아’의 작곡가가 발표한 최신작으로서, 그들의 가슴에 커다란 감동과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킨 데 있었다.
핀란드는 오랜 세월 이웃 국가에 예속된 그늘진 역사를 이어온 나라였다. 12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스웨덴 왕국의 일부였고 1809년부터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19세기 동안 핀란드는 자치대공국(Grand Duchy)의 지위를 인정받아 독자적인 대의기구와 행정기구를 운영했다. 1860년대에는 독자적인 화폐가 발행되는가 하면 핀란드어가 스웨덴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인정받았으며, 자치의회 개최가 정례화된 데 이어 독자적인 군대도 보유하게 되는 등 차츰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가 1899년 핀란드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2월 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핀란드인들은 거세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시벨리우스가 애국적 교향시 <핀란디아>를 발표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러시아의 압제에 저항하는 핀란드인의 정신과 희망을 노래한 <핀란디아>는 핀란드 각지에서 공연되어 핀란드인들의 타오르는 애국심에 세찬 부채질을 했을 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도 연주되며 핀란드의 상황을 널리 알리는 전령 역할을 했다.
페카 할로넨의 <카렐리아의 선구자들>.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교향곡 제2번>은 초연 당시 <핀란디아>, 그리고 역시 애국적인 작품으로 각광받은 <교향곡 제1번>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여졌다. 시벨리우스 음악의 권위자였던 로베르트 카야누스는 이 곡을 ‘러시아의 압제에 대한 핀란드의 저항정신과 궁극적인 승리를 그린 작품’으로 규정했고, 작곡가와 절친했던 지휘자 게오르그 슈네보이트는 보다 구체적인 해석을 남기기도 했다. “제1악장은 압제, 압박이라든가 사상에 번민하지 않는 핀란드인의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나타내고, 제2악장은 러시아의 잔인한 압박에 시달리며 애국심에 불타는 핀란드인의 심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제3악장은 국민적 감정을 환기시키면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국가 조직에 대한 요구를 말하고 있다. 제4악장은 구세주의 출현을 예상하는 위안, 미래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노래한 것이다.”
▶인생의 비극과 희망
이 곡에 대한 해석은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일례로 제2악장을 쓰면서 시벨리우스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와 그 원전에 해당하는 <돈 후안과 석상 손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내와 아이들은 라팔로의 숙소에 놔두고 혼자서 로마에 다녀오기도 했다. 아마도 그 무렵 그의 속내는 무척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갔지만 국가보조금을 받으면서도 재정난에 시달렸고, 친구들과 늦도록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무분별한 생활 패턴과 음주벽 탓에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곤 했다. 게다가 막내딸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헬싱키 시벨리우스 공원의 기념비.
관대한 후원자 악셀 카르펠란 남작의 충고와 원조 덕에 따뜻하고 풍요로운 그는 남국을 여행하면서 여유와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예술적 자극도 받았지만, 한편으론 지난날과 현실에 관한 어두운 생각들에 휩싸여 번민했으리라. 방탕한 호색한으로 살다가 천벌을 받아 기사장의 석상에게 지옥으로 끌려가는 돈 후안의 운명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그의 내면이 투영된 비극적 드라마가 교향시풍으로 작곡된 제2악장에 흐르고 있다. 그 비극적 드라마는 후반 악장들에서 돌파구를 찾으며 반전을 꾀한다. 격렬한 투쟁과 목가적 시정이 교차하는 제3악장을 통과하여 제4악장으로 넘어가면, 마침내 극복과 승리, 희망을 지향하는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마냥 긍정적인 결말을 연출하지 않고 그 장엄하게 굽이치는 흐름의 골짜기에 다시금 어둠의 발자국을 새겨놓는다. 깊은 비감에 잠긴 듯한 그 민요풍 선율에는 안타깝게 요절한 처제에 대한 상념이 녹아 있다고 전해진다. 다시 말해 인생이 계속되는 한 비극도 반복되며 우리는 그 모든 굴곡과 파고를 견디고 넘어서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그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