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은 매력적이다. 글 읽는 독자를 글 쓰는 작가로 바꾸고, 지켜보던 팬을 연기하는 배우로 바꾸고, 듣는 백성을 말하는 시민으로 바꾼다. 한나 아렌트는 살아 있음을 목숨(zoe)과 생명(bios)으로 구분했다. 목숨이 생존 그 자체에 몰두하는 동물적이고 생물학적인 삶을 가리킨다면, 생명은 자격을 갖춘 삶, 즉 사회에 참여하고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삶을 가리킨다.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물으면서 대화를 시작할 때, 목숨은 생명이 된다. 그러므로 목숨과 생명 사이엔 말(logos)이 놓여 있다.
댓글은 인간을 자유롭고 용기 있게 말하는 존재, 즉 지배되는 객체에서 통치하는 주체로 바꾼다. 집구석에서 살아남기에 몰두하는 하찮은 무명인을 광장에서 의견을 펼치고 목소리를 떨치는 유명인으로 변화시킨다. 아무것도 아닌 갑남을녀가 온 세상 사람을 향해 이토록 쉽게, 널리, 멀리 자기 생각을 퍼뜨릴 수 있는 시대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댓글은 한 방향 소통에 익숙했던 정치의 구조를 바꾸고, 행정의 작동을 흔들며, 기업의 행태를 달라지게 한다. 듣기만 했던 자가 말하고, 읽기만 했던 자가 쓰고, 소비만 했던 자가 대화하자고 하자, 작가는 귀를 열고, 기업은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론적으론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소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웹소설 #독자 #댓글』(요다 펴냄)에서 김준현 목포대 교수는 “댓글은 소설 작품을 둘러싼 소통을 독자 중심으로 바꾼다”라고 말한다. 댓글은 ‘작가는 독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라는 텅 빈 약속을 꽉 찬 현실로 바꾸었다. 작가와 소통하고 다른 독자와 이야기 나누면서 독자는 작가를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었다. 김 교수는 이 새로운 독자들을 ‘댓글 독자’라고 부른다. 댓글 독자는 자기 취향과 가치를 표현하고, 작품의 방향과 흐름을 그에 맞추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때로는 작가에게 화를 내고, 비난하고, 공격이나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집단으로서의 독자들은 매우 사나운 존재다. 상당히 예민하고, 언제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한 행태다.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공격은 더 과격하고 부정적인 성향을 띤다. 공격받는 이가 얼마나 심한 고통을 당하는지 알 수 없기에 수위 조절이 어려운 까닭이다. 더군다나 “댓글 창에는 분노를 절제할 수 있는 안전장치도 없다.” 그 탓에 댓글에는 막말이 날것 그대로 쏟아져 범람한다.
쏟아지는 막말은 작가를 일종의 마조히즘적 심리 상태로 몰아간다. 댓글을 읽으면서 작가는 “욕설과 모욕이 담긴 악플”에 상처받는 한편, 때때로 보이는 응원의 외침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연독’ 소리에 도파민을 흘린다. 고통이 낳은 열매는 더욱 달디단 법이므로, 이는 인간을 중독시킨다. 고통과 쾌락이 결합한 기이한 심리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관심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을 진화시킨다. 저속한 말을 무서워하고 무책임한 말에 몸서리치지만, 작가는 사리에 맞는 지적에 가슴이 내려앉고 조리 있는 비판에 각성하면서 작품을 고쳐 쓰고 작풍을 바꿔 간다. “작가는 독자의 말에서 배우고 성장한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댓글 독자, 댓글 소비자, 댓글 시민의 존재는 문학과 기업과 정치를 바꾼다.
그런데 댓글의 흐름엔 편향성 같은 게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첫 댓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어떤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사안은 여러 집단의 갈등이 뒤얽힌 데다, 법적 쟁점들이 집약되어 웬만한 문해력 없이는 사실과 의견, 맥락과 의미를 분별해 읽기 힘들다. 이럴 때 첫 댓글이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본문은 길고 댓글은 짧으며 본문은 복잡하고 모호한데 댓글은 단순하고 명료해서다. 이 때문에 “첫 댓글이 다음 댓글을 좌우한다” 같은 경험 법칙이 생긴다. 첫 댓글의 평가가 게시판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이다. 온라인 댓글은 사실 판단이나 진실 규명의 절차가 아니다. 집단의 지혜보다는 확증편향이 더 크게 지배했다. 그래서 이 판은 첫 댓글 선점의 경쟁이고 대중 감정의 방향타를 누가 손에 쥐느냐의 전쟁이 되곤 한다. 이는 지극히 위험하다. 일찍이 아렌트는 진실에 대한 관심 없이 집단의 행동 방향이 결정되고 사회의 앞길이 정해지는 현상이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 경고했다.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는 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차이, 참과 거짓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사실에 대한 경멸이 다른 의견에 대한 비관용과 결합하고, 정치가 음모와 감정에 감염되면, 전체주의가 얼굴을 드러낸다. 일찍이 온라인 댓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악한 진실을 폭로한 작품 『댓글부대』(은행나무 펴냄)에서 장강명 작가는 온라인 여론의 터무니없는 작동 구조와 그 심각한 위험성을 몇 문장으로 압축했다. “기자님도 인터넷 하시잖아요. 거기서 싸움이 어디 팩트랑 논리로 하던가요. 논리 싸움은 두 사람이 양식 있는 사람일 때에나 가능한 거예요. 인터넷 싸움은 정력과 멘탈로 하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선 민주정이 곧바로 중우정(衆愚政)으로 전락한다. 사실과 논리로 무장한, 공감과 연대로 공동체를 이끌려는 사람들이 이기는 게 아니라, 억지를 거듭하고 음모를 뿌리면서 끈질기게 개소리를 늘어놓는 자, 파렴치하고 뻔뻔해서 타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 이들은 사실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나서 불리해질 때도 승복하지 않는다. 이번엔 그 사람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한다. “너 틀려먹었다, 저질이다. 반성해라.” 가짜 아이디를 만들어서 돌려쓰면서 짧고 강렬한 욕설을 거듭 늘어놓아 마음의 상처를 주고, 그 정신을 무너뜨린다.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해요. 진짜 그 짧은 글로 상처를 입어요. 웃기죠? 아는 사람이 하는 말도 아니고, 앞으로 만날 일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당사자에 대해서 쥐뿔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악플 공격에 노출된 사람은 좀처럼 버티지 못하고, 심하면 극단적 선택에 이르곤 한다.
댓글 조작자들은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는 것,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댓글의 편향성을 이용해서 대중 심리를 조작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며 여론을 왜곡하고 공공성을 파괴하는 나라는 점차 약해진다. 아렌트는 말했다. “공론 영역의 공공성만이 시간의 자연적 파멸로부터 보존하기를 원하는 걸 모두 수용해서 수 세기에 걸쳐 빛을 발하게 할 수 있다.” 넘치는 댓글에서 관심을 거두고, 한 발짝 떨어져서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사실과 진실을 확인하고, 공공성을 위해서 무엇이 더 나은 길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