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석에 말린 일본인들이 산 채로 화형대에 올려집니다. 마치 차곡차곡 짐을 쌓아올리듯이 사람들이 차례대로 눕혀지고, 불길이 온몸을 휘감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죽음은 예정돼 있었습니다.
17세기 가톨릭 교인들의 비참했던 신앙과 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던 2016년 영화 <사일런스> 첫 장면입니다. 영화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는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1982년 장편소설 <침묵>“을 원작 삼아 이 영화를 연출했습니다. <사일런스>는 단지 성직자의 고통을 재현하고 전시하는, 그런 뻔한 영화가 아닙니다. “신은 고통의 순간에 왜 침묵하는가?”라는 본원적 물음을 세상에 던지면서 ‘배교한 가톨릭 신부(神父)들의 후일담’을 다루는 논쟁작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 <최후의 유혹>을 원작 삼은 1988년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으로도 종교 모독 논쟁의 중심에 섰던 영화감독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침묵>을 영화화하려 하자 수많은 종교인들이 우려와 반대의 뜻을 표명했던 이유이기도 했지요.
지난 며칠간 영화 <사일런스>와 소설 <침묵>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그 결과,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숭고한 질문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로마 교황청으로 서신이 접수됩니다. ‘일본에서 수십 년 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했던 신부 페레이라가 결국 가톨릭을 배교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심지어 페레이라가 일본 내 권력층과 손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중이란 말까지 들렸습니다. 페레이라의 제자인 로드리고는(영화의 로드리게스) 페레이라에게 사실관계를 따져 묻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합니다.
당시 일본은 가톨릭 박해가 절정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발각된 교인들은 산 채로 불태워졌고, 파란 바닷물에 수장됐으며, 심지어 목이 잘리는 참극까지 빚어지는 지옥이었습니다. 로드리고는 목숨을 걸고 일본에 잠입합니다. 유럽의 사제가 자신들의 땅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자, 은밀히 신앙을 지키며 살아왔던 주민들은 로드리고를 찾아와 미사와 세례를 요청합니다. 로드리고는 페레이라의 근황을 수소문하면서도 자신의 품에 영적으로 기대려는 나약한 교인들을 등질 순 없었습니다. 로드리고의 험난한 여정엔 술주정뱅이 기치지로가 늘 어른거렸습니다. 로드리고가 일본으로 건너올 때 마카오에서 만난 남성이었습니다.
그런 기치지로가 로드리고를 밀고하면서, 그는 관원들에게 끌려갑니다. 로드리고는 “배교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로드리고는 배교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배교의 문제는 간단치가 않았습니다. 영주 이노우에는 로드리고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신, 로드리고 앞에서 일본 가톨릭 교인들을 고문해 죽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로드리고 당신이 예수를 부정하면(배교) 이들을 살려주겠다. 그러니 성화(聖畵)를 밟으라”는 술책이었습니다.
펄펄 끓는 온천수로 신자들의 살갗을 녹이고, 갯바위 옆에 십자가를 세워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살해하는 수형(水刑)이 로드리고 눈앞에서 벌어집니다. 이를 막을 힘이 로드리고에겐 없습니다. 절망한 로드리고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저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배교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예수를 증거하며 함께 공멸할 것인가.’
워낙 유명한 소설이니 결말을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로드리고의 결심은 충격적입니다. 로드리고는 교인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합니다. 심지어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가정까지 꾸렸고, 일본의 전통신앙인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사제복 대신 승려복을 입고 말이지요.
그러나 로드리고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적이 없었습니다. 로드리고가 죽어 불교식 장례가 치러졌을 때 손으로 깎은 나무 십자가상이 로드리고의 손바닥 안에 몰래 쥐여 있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영화에만 등장하며 소설에는 나오지 않음.) 로드리고의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이 작품에서 일본 사회는 ‘중세 동양의 거대한 골고다 언덕’과 같은 위상을 차지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십자가를 진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고통 받았듯이 신부 로드리고는 자기만의 고뇌 속에서 일본이란 험지를 경험했기 때문이고, 둘째,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듯이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로드리고가 잡혀가기 때문입니다. 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로드리고는 동일시됩니다.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팔린 것처럼 자신도 기치지로에게 팔리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지금 지상의 권력자들에게 재판받고 있다.”(195쪽) 가롯 유다가 은전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겼듯이 기치지로도 은전 300냥에 로드리고를 팔아넘겼지요.
이때, 기치지로는 <침묵(사일런스)>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기치지로는 가족을 배신하고, 예수를 부정하고, 로드리고를 배반하면서도(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을 상기합니다) 끊임없이 로드리고가 갇힌 감옥을 찾아와 고해성사를 청하니까요.
따라서 <사일런스>만 본다면 로드리고의 선택을 이해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 <침묵>을 나란히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에는 로드리고가 냇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광인처럼 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면 위 자신의 얼굴에 예수의 형상이 겹쳐지자(환영), 로드리고는 자신이 처한 극도의 비참한 처지를 비관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크게 터뜨립니다. 그러나 소설에선 로드리고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확인하며 사유하는 장면이 5회 이상 반복됩니다. 이때 묘사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변화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소설 초반부에서, 로드리고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재현하려 했던 예수 얼굴 가운데, 이탈리아 포르코 지역에서 봤던 <예수의 부활>이란 작품을 떠올립니다(36쪽). 이 작품은 1463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란 화가의 작품으로, 이 그림 속 방금 부활한 예수는 권위적인 힘을 가진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위풍당당하고 씩씩하게 자신이 눕혀졌던 석관 위에 한쪽 발을 올리고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의 몸도 ‘근육질’이지요.
그런데 소설 후반부에서 묘사되는 예수는 그런 강인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배교한 로드리고는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판 위에 발을 올린 뒤 환영 속에서 예수와 대화합니다. 이때 예수의 얼굴은 <예수의 부활>에서 그려진 ‘강건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슬퍼하는 예수’입니다. “그 얼굴(예수의 얼굴)은 지금 성화판의 나무판자 속에서 닳고 패어버린, 그 슬픈 듯한 눈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다.”(293쪽)
‘고통 속의 인간을 이끌어줄 강건한 메시아’가 ‘울고 있는 인간 곁에서 함께 울고 있는 그리스도’로 바뀐 것입니다. 신부 로드리고는 영주 이노우에의 탄압으로부터 성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교를 택했습니다. 자신이 끝까지 지켜야 했던, 신앙적인 정체성까지 폐기처분하면서 말이지요. 배반의 대가는 인간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골고다 언덕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인간을 구원한 것처럼 로드리고는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써 수많은 인간 생명을 살려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만든 교리를 향한 배신일 순 있어도, 적어도 신에 대한 배신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로드리고의 고백은 그래서 울림이 큽니다. “나는 그들(가톨릭 교리와 사제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예수 그리스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하여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294쪽)
영화 <사일런스>와 소설 <침묵>이 갖는 또 하나의 차이는, 영주 이노우에를 그리는 방식입니다. 영화에서 이노우에는, 신부들의 배교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로 그려집니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그는 악인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보면 이노우에는 이보다 더 복잡한 인물입니다. 이노우에는 한때 가톨릭에 귀의했고 세례까지 받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원작자 엔도 슈사쿠는 이노우에란 인물을 통해, 동일한 삶의 궤적을 지나온 인물일지라도 그 결과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두 얼굴을 가진 인간입니다. 또 인간의 악은 무지보다 지(知)에서 출발하기 마련입니다. 선과 악의 기로에서 결정되는 삶의 방향은 인간의 자율적 의지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가롯 유다에게 “네 할 일을 하라”(예수 자신을 배신하라는 뜻, 요한복음 13장 27절)고 말했을 때 가롯 유다의 선택이 단지 신의 예정된 계획만이 아닌, 가롯 유다 자신의 자율적 의지에 기초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신의 침묵은 종교사에서 늘 화두였습니다. 로드리고는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86쪽) 하지만 고통 속의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자리에 고통 속의 인간 옆에서 함께 울어주는 신을 등장시킴으로써, 엔도 슈사쿠는 큰 위로를 우리에게 건넸습니다. 마틴 스콜세이지 역시 신의 침묵을 영화화함으로써 신의 침묵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던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