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품 안에 여권을 들고 다닌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출근길 지하철 ○○역 계단을 내려가던 당신은 불현듯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이대로 공항으로 가서 출발시간이 가장 빠른 외국행 티켓을 아무거나 발권한 뒤 비행기를 탄다.’ 밥벌이, 가족, 또는 건강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지 결심(決心)만 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겁니다.
스위스 철학자 페터 비에리가 2004년 필명(파스칼 메르시어)으로 발표한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현실화한 명작입니다.
책은 2013년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돼 큰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로의 탑승을 권하고자 합니다. 책 주제를 응축하는 다음 한 문장만 무형의 티켓처럼 가슴에 품는다면 떠남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28쪽)
주인공은 스위스에 사는 57세 고전문헌학자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입니다. 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라이어에 조예가 깊은 그는 혼자 살아갑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정교하고 규칙적입니다. 오전 8시 정각 15분 전 기상해 탁자에서 커피를 곁들인 단출한 식사를 마치고 출근합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생활은 사라져가는 고전 언어의 문법처럼 따분하고, 빡빡한 강의 스케줄처럼 지루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출근길, 비 내리던 육교를 걷던 그레고리우스는 자살하려던 한 의문의 여성을 구합니다. 여성은 사라져 버렸고, 그는 여성이 남긴 빨간 코트에서 포르투갈어로 적힌 한 권의 책을 발견합니다. ‘아마데우 프라우’란 포르투갈 남성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였습니다. 책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표 한 장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15분 후’였습니다.
15분은 한 사람이 탈주하기로 결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차역에 갔다가 리스본행 열차에 탑승합니다. 낯선 도시로 가는 기차 좌석에 앉아 프라우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읽던 그는 저자 프라우를 추적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프라우의 고향이 바로 리스본이었거든요.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116쪽)라는 한줄처럼 우연이 그레고리우스의 리스본행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1974년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의 불씨를 지폈던 의사 출신의 비밀 레지스탕스 프라우의 묘지를 찾아가며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완독한 관객에게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다소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600쪽짜리 소설을 2시간 분량의 영화에 응축해서인지 줄거리가 꽤 단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리스본으로 가는 계기가 의문의 여성이 남긴 기차표 한 장 때문인 반면, 원작의 경우 그가 리스본행을 택하는 계기는 여성의 모국어였던 ‘포르투게스(포르투갈어)’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에서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어 서적 전문 헌책방으로 가서 주인에게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선물로 받습니다. 책을 읽던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 가보기로 결심하는데, 낯선 언어의 땅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의 리스본행이 갈등 속의 타의에 가까웠다면 소설의 리스본행은 매혹 속의 자의였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새롭게 설정된 몇몇 장치는 풍부한 의미지평을 형성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그레고리우스의 체스판이 그 일례입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유일한 취미는 체스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12명의 학생과 동시에 체스를 두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 학생의 속임수를 알아챌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체스 기사였습니다.
체스는 기본적으로 ‘킹, 퀸, 룩, 비숍, 나이트, 폰’ 등 6종류 말을 사용합니다. 폰은 한국의 장기로 치면 졸(卒)이나 병(兵)으로서 1열에 8개가 배치되고, 2열에는 ‘룩-나이트-비숍-킹-퀸-비숍-나이트-룩’ 순으로 말이 판에 놓입니다. 체스판은 짙은 색과 옅은 색의 정사각형 격자무늬이며 세로 8칸, 가로 8칸으로 총 64칸입니다(<그림1> 참조).
그런데 영화 첫 장면에서, 그레고리우스가 밤새 혼자서 두는 체스판의 비숍 위치가 완전히 잘못 놓여 있습니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그레고리우스는 체스말 ‘비숍’을 고심 끝에 움직입니다. ‘룩-나이트-비숍-킹-퀸-비숍-나이트-룩’ 순으로 놓인 2열 중 오른쪽 비숍이었습니다. 비숍은 대각선(사선) 45도 방향으로만 이동이 가능합니다. 전 세계 공통 규칙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비숍의 기본 행마법을 무시하고는 ‘우측 사선 방향으로 두 칸을 이동한 위치에서 전방으로 한 칸을 더 이동한 자리’에 비숍을 착수합니다.(<그림2>에서 ○로 비숍을 이동함, 원래는 두 번째 화살표 지점에 위치해야함).
체스말 가운데 비숍은 백이든 흑이든 2개씩 주어지는데, 대각선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비숍 행마법 특성상 2개의 비숍은 같은 색(짙은 색/옅은 색) 칸에 절대 위치할 수 없습니다. 짙은 색 칸에 놓인 왼쪽 비숍은 짙은 색 칸으로만, 옅은 색 칸에 놓인 오른쪽 비숍은 옅은 색 칸으로만 움직이니까요. 그러나 영화에선 두 비숍이 동일한 ‘짙은 색 칸’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이게 단순한 실수일까요.
감독이 체스의 기초 행마법도 모른 채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충분히 의도적으로 기획된 ‘엉뚱한 한 수’인 것이지요.
체스는 보통 75~100회의 움직임으로 승패를 겨루는 게임입니다. 한 번의 움직임이 하나의 수를 이루고 그 수가 모여 한 판의 게임을 형성합니다. ‘나’와 타자(세계)가 도전과 응전을 주고받는 체스는, 마치 한 사람의 인생과도 같습니다. 밝은 공간(짙은 색 칸)과 어두운 공간(옅은 색 칸)의 공존이란 점에서도 체스는 한 편의 인생처럼 느껴지지요.
그레고리우스는 체스판의 말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모두가 그를 뛰어난 문헌학자로 인정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보지 못한 인물이었지요. 마치 도돌이표와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그레고리우스는 평소와는 다른 하나의 이동, 즉 리스본행을 결정했습니다. 어제와 같이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던 그레고리우스가, 짧은 메시지만을 남긴 채 낯선 도시 리스본으로 떠나버렸으니까요.
그 시작점이 바로 저 체스판이던 것이지요. 영화 첫 장면 체스판의 잘못된 한 수는 따라서 <리스본행 야간열차> 스토리 전체를 움켜쥐는 한 수였던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혼자 두는 체스 게임에서, 고심 끝에 비숍을 움직이면서 다음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이제 생각할 시간을 벌었군.” 그레고리우스의 입을 통해 발화되긴 했지만 이 말이 바로 그가 리스본에서 만나게 될 아마데우 프라우가 그에게 해준 말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그날 밤 체스를 둔 건 그레고리우스 혼자가 아니라 ‘그레고리우스와 프라우’ 두 사람이었다는 해석까지도 가능해지는 대목입니다.
유럽에는 유명 도시만 해도 수십 곳입니다. 영화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원작 소설에는 ‘왜 리스본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이 숨어 있습니다.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가 책에 남겨둔 문장에 따르면, 포르투갈 리스본 등 유럽의 서부 해안가 도시는 1000년 전만 해도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12세기 이슬람 지리학자 엘 이드리시에 문헌을 보면 당시 리스본은 ‘세상의 끝’으로 이해됐다고 하네요. 지구가 구형(球形)이라는 지식이 없던 당대인에게 리스본은 세상의 종점이었으니까요. 인접한 바다는 거칠어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 때문에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살아가는 스위스 베른은 육지로, 유럽대륙 한가운데 위치합니다. 영화에선 베른에서 리스본까지 가는 여정이 짧게 그려지지만, 소설을 보면 베른에서 리스본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26시간’입니다. 직행 열차는 없고,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 이룬(Irun)이란 지역을 경유해야 도착 가능합니다. 따라서 리스본은 단지 그레고리우스가 일탈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세상의 끝’으로 향해보는 경험이 되는 것이지요. 그레고리우스가 선택한 교통수단이 야간열차(night train)란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레고리우스의 기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입니다. 다른 승객과 만나야 하고 또 헤어지는데, 그들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타자들처럼 느껴집니다. 한번 기차에 오른 사람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중간에 내릴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처럼 말이지요. 출발지(탄생)와 목적지(죽음) 사이의 움직임입니다.
‘세상의 끝’ 즉 죽음을 향해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인생의 은유적 공간이 바로 그레고리우스의 야간열차입니다. 인생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 그것이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가진 함의일 겁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서 ‘혁명가’ 아마데우 프라우의 삶을 추적합니다. 제한적인 지면 특성상 이 부분에 대해선 언젠가 다시 다뤄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자면 프라우는 본업인 의사와 포르투갈의 비밀 레지스탕스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그는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불씨가 되지만 결국 불치병 때문에 여정을 끝마쳐야 했던 비운의 인물입니다. 프라우의 혁명을 뒤쫓는 그레고리우스의 탈주 역시 고정된 삶으로부터의 일탈, 즉 삶의 혁명이란 사실은 유념해둘 필요가 큽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