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시누아’. 1980년 홍콩에서 시작된 새로운 형태의 중화요리를 뜻한다. 버터나 향신료 등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식재료 고유의 맛을 끌어내는 프랑스의 ‘누벨 퀴진’에서 영향을 받았다. 정통 중식은 갖가지 향신료와 기름으로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을 내지만, 누벨 시누아는 중식에 꼭 필요한 식재료는 사용하되 유럽 등 다른 나라 음식의 조리법을 적절히 응용해 같은 요리도 더욱 섬세하고 담백하게 풀어낸다. 국내에선 다소 생소하지만 이미 홍콩, 일본, 싱가포르 등에선 오래 전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 한남동의 중식 다이닝 레스토랑 ‘피에세(PIECE)’는 이 같은 누벨 시누아를 발전적으로 계승해나가고 있는 곳 중 하나다.
피에세는 2013년 청담동에서 시작해 방배동을 거쳐 지난 2020년 한화갤러리아가 운영하는 한남동 고메이494로 자리를 옮겼다. 누벨 시누아의 거장인 일본의 고토 리키아 셰프가 초창기 피에세를 이끌었고, 현재는 그를 사사(師事)한 김정훈 셰프(42)가 피에세를 총괄하는 이그제큐티브 셰프(헤드셰프)로 있다. 김 셰프는 “모든 음식이 다 그런 느낌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중식이지만 중식 같지 않은 새로운 중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인다이닝에 초점을 맞춘 피에세는 점심과 저녁 모두 코스로만 운영된다. 다만 좀 더 가벼운 식사를 찾거나 합리적인 가격에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서브 코스도 함께 운영한다. 점심에는 런치 코스와 브런치 코스를, 디너에는 디너 코스와 디너 숏코스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중식당이지만 짜장면이나 짬뽕 같은 일반적인 단품 메뉴는 판매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심시간에는 코스 시작 전 공심채볶음, 이베리코 야키차슈, 딤섬, 통전복찜 등 곁들임 요리를 코스와 별도로 주문할 수 있다.
피에세만이 가진 매력은 누벨 시누아 가운데서도 한식과 일식의 식재료나 기법이 가미돼 누구나 낯설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사천 요리를 베이스로 하지만 지리적으로는 서울에 위치해 다채로운 한국의 신선 식재료를 사용하고, 일본인 셰프가 초기 주방을 세팅했던 만큼 일식의 조리법도 상당 부분 녹아있다. 그렇게 탄생한 중식은 한·중·일 3개국의 맛을 조화롭게 담아낸다.
피에세의 풀 코스인 디너 코스는 프렌치 코스처럼 입맛을 돋우는 아뮤즈 부쉬(전채)로 시작해 메밀 요리, 딤섬 2종, 차완무시, 전복, 오리고기, 생선 요리, 한우 샤브샤브, 식사 메뉴와 디저트, 커피 또는 차로 마무리된다. 모든 메뉴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주기적으로 바뀌는데 한우 샤브샤브는 향긋한 자연송이가 나는 가을 시즌에만 제공된다. 봄이나 여름, 겨울 시즌에는 한우 샤브샤브 대신 한우 스테이크가 제공되고 한우는 모두 1++등급만 사용한다.
이번 가을 코스의 아뮤즈 부쉬는 바다향을 한입에 머금을 수 있는 3가지 작은 요리로 구성됐다. 자연산 홍합과 파래를 올린 들깨죽과 상탕(각종 육류와 파를 넣고 오래 끓여낸 중국식 육수의 일종)으로 만든 젤리를 곁들인 가리비·관자 타르타르, 매시 감자와 함께 튀겨낸 바다장어튀김과 중국식 빵가루로 만든 소스가 함께 제공된다. 김 셰프는 “짭짤한 맛과 담백한 맛, 신선한 맛의 조화로움으로 입맛을 자극하면서 식사를 시작하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메밀 요리는 들기름 막국수에서 착안해 만든 중국식 메밀면이다. 들기름에 무친 메밀면에 게살과 보타르가(염장한 숭어의 알을 말려 압착해 만든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특선 음식)를 곁들였다. 특히 들기름에 중국식 매시소스가 더해져 달짝지근하면서도 새콤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이어 제공되는 딤섬 2가지는 전복으로 만든 슈마이와 새우 춘권으로 촉촉한 맛과 바삭한 맛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했다. 여기에는 중국식 백탕으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다.
피에세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차완무시는 뚜껑이 있는 중국식 찻잔인 ‘개완’에 담아낸 일본식 달걀찜이다. 하지만 단맛이 있는 정통 일식의 달걀찜과 달리 입안에 은은하면서도 깊은 버섯향이 퍼지는 담백한 맛을 살렸다. 달걀을 표고버섯과 함께 찐 후 트러플, 치즈를 올리고 닭고기를 베이스로 한 중국식 청탕을 따뜻하게 부은 뒤 함께 떠먹는 음식이다. 특히 청탕은 닭가슴살을 사용해 우려내서 더욱 진한 맛을 자랑한다.
또 다른 시그니처 메뉴인 전복 요리는 일식처럼 조리한 전복찜이다. 무와 함께 오랜 시간 수비드로 익혀낸 부드러운 전복에 콩을 발효시켜 만든 소스를 곁들이고 그 위에 바다향을 머금은 감태를 올렸다. 두반장을 넣어 매콤하면서도 화이트와인 식초의 깔끔한 산미가 더해져 된장처럼 구수하면서도 톡톡 튀는 맛을 낸다. 전복 아래에는 소량의 당면을 깔았다. 당면이 소스를 머금기 때문에 소스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약간의 든든함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오리고기는 북경오리와 같은 방식으로 오리를 건조시킨 뒤 일주일 정도 숙성해 가슴살만 구워낸 스테이크다. 김 셰프는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는 두 피스가 나가는데 하나는 그냥 드시도록 권하고 다른 하나는 북경오리처럼 중국식 밀가루 전병인 야빙에 싸 먹을 수 있도록 토마토와 호박소스, 텐멘장(춘장)을 함께 드린다”고 설명했다. 부드럽게 씹히는 오리고기가 중국식 소스와 어우러져 조화로운 맛을 낸다. 다음으로 제공되는 생선 요리는 병어찜으로 역시 매콤새콤한 소스의 밸런스가 담백한 생선에 활기를 더해준다.
한우 샤브샤브는 소고기로 우려낸 중국식 청탕에 자연송이와 청경채, 등심 샤브샤브를 넣어 함께 끓인 메뉴다. 일반적인 샤브샤브보다는 들어가는 재료가 단순하지만 그만큼 각 재료의 본연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식 특제 간장소스와 땅콩소스를 찍어 먹으면 중국식 훠궈나 한식 샤브샤브, 일식 스키야키와는 또 다른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샤브샤브를 먹고 나면 그 육수에 면을 익혀내고 함께 먹을 수 있는 식사 메뉴로 연잎밥이 제공된다. 마지막 디저트는 직접 만든 살구씨 푸딩과 코코넛 아이스크림이다.
런치 코스의 시그니처 메뉴로 꼽히는 것은 식사 메뉴 중 선택할 수 있는 탄탄면이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볼 수 있는 탄탄면은 땅콩버터나 땅콩가루를 사용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피에세의 탄탄면은 오로지 국산 참깨만을 사용해 고소한 맛을 냈다. 덕분에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직접 방앗간에서 떼온 국산 참깨를 갈아 만든 국물에 라장, 고추기름과 쪽파, 산초를 살짝 곁들여 감칠맛을 더했다.
중식 레스토랑이라고 하면 화려한 붉은색과 금빛 장식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피에세는 모던하고 세련된 공간으로 꾸며졌다. 높은 천장에 묵직하고 어두운 톤의 가구, 하얀 대리석이 깔린 테이블, 곳곳에 집중된 포인트 조명, 크고 널찍한 벽, 화이트&블랙의 장식으로 채워진 깔끔한 공간은 오롯이 음식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존재감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들릴 듯 말 듯한 잔잔한 음악 역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준다. 프라이빗 룸은 4인석 4개로 구성돼 있지만 홀에 있는 테이블도 저마다 구획이 돼 있고 테이블 간 간격이 먼 편이어서 사실상 모든 테이블이 룸처럼 프라이빗한 공간이 된다.
피에세가 코스와 함께 제공하는 페어링도 경험해볼 만하다. 다양한 와인 리스트를 갖추고 있지만 소믈리에가 코스에 잘 어울리는 음료나 주류를 페어링해준다. 와인 페어링은 코스에 따라 3잔 또는 5잔을 제공하는데 디너 코스 5잔을 기준으로 보통은 스파클링 와인 1잔에 화이트 와인 2잔, 레드 와인 2잔을 페어링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고객을 위한 논알코올 음료페어링과 티 페어링도 피에세만의 독특한 서비스다. 논알코올 음료와 티는 모두 피에세에서 직접 만들어 제공한다.
김 셰프는 불과 큰 칼을 이용해 요리하는 중식의 힘 있는 매력에 빠져 전공부터 중식을 선택해 줄곧 중식 주방에서 경력을 쌓아 왔다. ‘중식 대모’로 불리는 이향방 셰프의 제자로 모리화를 비롯해 서울의 주요 중식 레스토랑을 거쳐 2013년부터 피에세에서 새로운 중식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그는 “평소에 접하게 되는 음식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편”이라며 “앞으로도 중식의 한계를 넘어선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피에세(PIECE)
장르 누벨 시누아(이노베이티브 중식)
위치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 91 고메이494 B2층
헤드셰프 김정훈 셰프
영업시간 매일 12:00~22:00(런치는 13:30 라스트 오더, 15:00~18:00 브레이크 타임)
가격대 브런치코스 4만5000원, 런치코스 6만5000원, 디너숏코스 12만원, 디너코스 16만5000원
프라이빗 룸 4개(4인석)
전화번호 050-71314-4997
주차 발레파킹 또는 건물 지하주차장 이용
송경은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