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인생을 되감을 수 있거나 두 번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요즘 웹소설에 회귀하고 빙의하고 환생하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유다. 그러나 시간의 화살은 한 방향으로만 날아간다. 무정하고 무심해서 인간 사정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피부는 탄력을 잃고 뱃살은 늘어지며 몸에는 힘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무엇보다 얼굴엔 보톡스 주사로 감출 수 없는 연륜이 깃들고, 몸에는 근육 단련으로 막지 못할 분위기가 풍긴다. 이것이 중년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젊게 사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삶은 어느 시기든 똑같이 존중받아 마땅하나, 오늘날 중년은 흔히 위기의 시간, 어떻게든 미루거나 없애야 하는 추한 시간으로 비난받는다. 나이 들어서도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일이 중년 이후 삶의 최대 가치가 되어 있다. 항상 젊게 살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신상품, 즉 새로운 기회와 경험을 거의 무한히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문화는 늙음이 시작되는 중년에 저주를 퍼붓는다. 한 사회의 중심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존중받기는커녕 모욕받고 유린당하는 인생 암흑기의 입구,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인생 방황기의 시작처럼 여긴다. 벤 허친슨 영국 켄트대 교수의 <미드라이프 마인드>(청미)에 따르면, 중년 위기는 1960년대에 처음 생겨났다. 캐나다 정신분석학자 엘리엇 자크가 발표한 에세이 <죽음과 중년 위기>(1965년)가 출발점이다. 중년과 위기를 이어 붙여 사고하려는 시도가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다.
위기는 이겨내야 하므로, 중년 위기는 중년을 소진된 창의성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쳐야 할 분투의 시기로 만든다. 아니면 삶의 황금기를 지나 죽음을 향해 줄달음치는 꺾인 인생, 즉 갈수록 가치를 잃어가는 내리막길의 초입으로 변질시킨다. 중년이 패배감에 얼룩진 분통의 시간, 치유할 수 없는 슬픔에 익사하는 우울함의 시간, 꿈과 희망을 잃고 환멸에 사로잡히는 공허한 시간으로 전락한 것이다. 마흔 이후 찾아오는 육체의 변화는 중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긴다. 스물다섯 살에 정점을 이룬 신진대사 비율은 10년마다 약 2%씩 감소한다. 중년에 들면 섭취한 음식으로 얻은 열량을 갈수록 덜 소비한다. 따로 운동하지 않으면, 배가 튀어나오는 중년 비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울러 뇌의 정보 처리 속도도 떨어진다. 40대부터 두뇌는 10년마다 2%씩 부피가 자연스레 줄어든다. 판단 능력, 자의식, 자제력 등을 책임지는 전전두엽은 노화에 특히 취약하다. 두뇌 힘이 떨어지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빨리 대응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섭섭해 하면서 버럭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진다. 이를 보충하는 것이 풍부한 체험이다. 쌓은 경험이 떨어지는 정보 처리 속도를 보완하고, 축적한 시행착오가 부족한 판단 능력을 채운다.
퇴화의 공포에 따른 심리적 불안, 즉 이루지 못할 꿈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이들과 노인들을 두루 돌봐야 하는 중압감 등을 떨쳐내려고 나이 듦을 부정하는 건 어리석다. ‘여전히 빨리, 높게, 강하게’를 외치면서 노화를 굴욕으로 받아들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승산 없는 싸움에서 이겨보려고 시간에 맞서 싸우는 일은 인생 한 시기를 삶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중년은 나이에 맞게 새로운 성취를 이룩하는 축복의 시기가 아니라 체념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비굴하게 지나야 하는 커다란 공백 지대처럼 변한다. 우리는 중년을 다르게 상상할 수 있다. 위기가 아니라 성숙과 이어 붙일 수도 있다. 중년은 사회적, 윤리적 존재의 정점, 풍부한 경험의 힘으로 삶의 성숙에 이르는 시기다. 인생 후반부를 품격 있게 가꿀 수 있는 삶의 비밀을 인지하고 체화하는 시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 인간>은 이를 잘 드러낸다. 그림의 남자는 완벽한 대칭을 자랑하면서 우주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의 배꼽이 곧 세계의 배꼽이다. 세상을 자기 안에 온전하게 품은 인간, 만물의 척도로서 우뚝 선 이 남자는 중년에 이른 다빈치 자신의 자화상 성격을 띠고 있다.
<비트루비우스 인간>은 경험치가 쌓여 원숙함을 갖춘 사람만이 세계의 중심,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인생 중심축을 이루는 중년은 억지로 젊음에 집착하고 다가올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자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관찰하고, 어찌해야 잘 늙어갈 수 있는지 성찰해야할 때다. 허친슨은 말한다. “아름다운 덕성은 실존적 절박함으로 빚어진다.” 인생길 한복판에서 삶을 돌아보고 자아를 고쳐 쓰려고 하는 열망은 인간을 고결하고 위대하게 만든다.
인간 덕성의 최고 형태는 중용에 있고, 인생 정점에는 중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청년은 대담하고, 노인은 소심하다. 인생 정점에 선 사람은 대담함과 소심함이 어느 쪽도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덕성을 갖추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삶은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고, 결국 넘어뜨릴 뿐이다.
성숙한 사람은 청년처럼 용감하되 노인처럼 절제하며, 노인처럼 차분하되 청년처럼 용맹하다. 중년은 청년의 미숙함을 의식해서 자신을 가다듬을 줄 알고, 인간의 유한성을 성찰해서 삶을 더욱 소중히 갈고닦는 시기다. “인간 정신은 마흔아홉 살에 만개한다.” 중년을 산다는 것은 정신의 꽃을 만개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중년은 생물학의 문제이면서 인식론의 문제이다. 성숙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얻어야 할 덕성은 무엇보다 겸손이다. 젊었을 때보다 더 많이 알지만, 무지를 자각하는 존재일 때, 우리는 성숙한 존재일 수 있다. 중년이란 청년기처럼 새롭고 신선한 지식을 갈망하기보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겸손과 이미 아는 것을 잘 익혀서 지혜로 바꾸어 가는 시기여야 한다. 서른아홉 살 때 사뮈엘 베케트는 깨달았다. “나는 단순하게 지식의 창고를 확장하고 거기에 지식을 더 보태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알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일처럼 보인다.” 인생 후반기에 그는 지식, 통찰, 경험을 새로 축적하려고 애쓰기보다 덜어내면서 밀도 높게 정련하는 데 집중했다. 더 많은 앎이 아니라 덜어냄의 지혜를 추구한 그에게 생겨난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려볼 줄 아는 안목이었다. 중년에 피워야 할 정신의 꽃이 안목이다.
인생 중반에 이르렀을 때는 더 많은 일을 벌이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가진 걸 덜어내는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 더 많은 책, 더 많은 돈,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대신 그들이 인생 전체에서 뜻하는 의미를 음미하면서 하나씩 내려놓을 때 인생의 티핑 포인트가 찾아온다.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 시간과 싸우면서 오만하게 어떻게 젊음을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겸손하게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