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한 지중해 최대 섬 시칠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1990)>의 배경으로 잘 알려졌지만, 로마나 피렌체, 나폴리 같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외국인의 발길이 덜 닿은 곳이다. ‘나폴리식 피자’는 익숙해도 ‘시칠리아식 파스타’는 낯선 이유다. 시칠리아 요리를 먹을 때의 신선한 경험은 이탈리아 현지로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준다.
모던 이탤리언을 지향하는서울 한남동의 ‘시칠리’는 이처럼 오감을 자극하는 미식 경험에 집중하는 다이닝 레스토랑이다. 지중해 해안가를 상징하는 블루&화이트 톤으로 아늑하게 꾸며진 다이닝 공간에서 시칠리아 음식을 기본으로 다양한 이탤리언 창작요리를 선보인다. 직접 새벽 시장에서 떼온 한국의 제철 식재료와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식자재로 셰프의 섬세한 상상력을 풀어낸 음식은 겉보기엔 단순하면서도 갖가지 재료가 조화를 이룬 복잡미로 입안을 가득 채운다.
시칠리의 이흥주 오너셰프(45)는 20대의 끝자락에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나 미쉐린가이드 스타 레스토랑들을 거치며 현지에서만 약 10년의 경력을 쌓았다. 2015년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현대백화점이 이탈리아에서 판교점으로 들여온 대형 이탤리언 그로서리·레스토랑 매장인 ‘이탈리(EATALY)’의 총괄셰프로 영입돼 초기 3년간 브랜드를 이끌었다. 이후 그간의 모든 경험을 집약해 2020년 12월 시칠리의 문을 열었다. 이 셰프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에 대한 존중을 담아 심플하지만 맛있게 재료 본연의 맛을 조화롭게 살리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시칠리는 점심에는 생면 파스타 위주의 가벼운 단품 메뉴를, 저녁에는 다이닝 코스를 운영한다. 본래는 이탤리언 파인다이닝만을 위한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버티기 위해 시작한 단품 메뉴에 단골손님이 제법 생기면서 점심은 계속 ‘파스타 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메뉴의 디테일은 계절, 셰프가 받는 영감 등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오늘의 파스타 32’ ‘오늘의 샐러드 25’ 등 새롭게 내놓는 메뉴마다 번호를 붙여 같은 곳이지만 늘 색다른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특히 시칠리의 강점은 매일 아침 직접 뽑아내는 생면에 있다. 이탈리아산 밀가루와 신선한 달걀을 사용해 물 한 방울 없이 만드는 파스타 반죽은 이 셰프가 이탈리아 현지에서 어깨너머로 배워온 비법을 토대로 숙성된다. 파스타 면 종류마다 각각의 노하우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례로 바늘 너비 정도의 ‘타야린’은 피에몬테식 파스타 면 중 하나로, 탈리아텔레(달걀 파스타를 옷감처럼 얇게 편 다음 길게 자른 면)를 아주 가늘게 잘라 만드는 면인데 삶는 시간에 따라 몇 초 차이로 죽이 돼버릴 수도 있어 경험적인 기술이 중요하다.
디너 코스는 그동안 시칠리 메뉴 중 큰 인기를 끌었던 시그니처 메뉴 6종으로 구성된 ‘시칠리 코스(15만원)’와 한우 등심 스테이크가 포함된 이탤리언 메뉴 8종의 ‘카르페 디엠 코스(18만원)’ 2가지다. 이 중 시칠리 코스는 시칠리를 대표하는 요리로 구성한 테이스팅 메뉴로, 식욕을 돋우는 칵테일 또는 스파클링 와인 등 이탈리안 아페리티보(Aperitivo·식전주)로 시작해 샐러드와 전채, 2가지 파스타, 생선요리, 디저트로 마무리된다.
시칠리 코스 메뉴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치즈를 부드럽게 떠먹는 카프레제 샐러드인 ‘누볼레 모차렐라(Nuvole Mozzarella·구름 모차렐라)’와 생선 라구 생면 파스타 ‘프로푸모 디 마레(Profumo di mare·바다의 향기)’, 참숯에 서서히 구워낸 제철 생선요리인 ‘페스카토 알라모(Pescato all’amo·오늘의 생선)’이다. 누볼레 모차렐라는 우유를 끓일 때 표면에 생기는 우유막인 밀크벨벳으로 숙성 모차렐라 거품을 감싸 구름처럼 만든 뒤 토마토와 바질, 바삭한 빵을 곁들인 샐러드다. 치즈 아래에는 생토마토를 갈아 만든 페이스트를 깔았고 치즈 위로는 쫀득한 체리토마토를 올렸다.
프로푸모 디 마레는 시칠리아식 파스타를 모티브로 전갱이로 만든 토마토 라구 소스에 크리스피한 식감의 시칠리안 크럼블을 곁들여 진한 감칠맛을 살렸다. 보통 라구 파스타라고 하면 소고기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라구 파스타를 떠올리지만, 시칠리의 생선 라구 파스타는 그보다 훨씬 담백한 소스에 다채로운 맛의 변주가 섬세하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 이번 시칠리 코스에서 제공되는 페스카토 알라모의 경우 참숯에 구운 제철 생선에 구운 로메인과 홈메이드 유자 제스트를 곁들여 상큼하게 즐길 수 있다.
이처럼 시칠리만의 독특한 감성을 지닌 생선요리들은 이 셰프가 시칠리아주 칼타지로네에 있는 1스타 레스토랑 ‘리스토란테 코리아(Ristorante Coria)’에서 메인 파트장(수셰프)이 되기까지 수년간 갈고닦은 생선요리 실력을 십분 발휘한 메뉴다. 그는 “이탤리언 다이닝 업계에선 ‘아시아 사람이라면 생선을 잘 다룰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생선을 배울 수 있는 곳, 관광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고 그렇게 졸업 시점에 시칠리아로 가게 됐다”며 “매일 4~5박스를 가득 채워 들어오는 각종 생선 수백 마리를 손질하다 보니 나중에는 생선별 특징과 다른 식재료 간 조화까지 마스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코스는 셰프가 시기별로 테마를 갖고 제철 계절 식재료로 풀어낸 코스다. 현재 운영 중인 디너 코스는 지난 7월 이 셰프가 한 달간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에서 느낀 요리에 대한 셰프들의 변치 않는 철학과 열정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종종 이탈리아를 오가고 있다는 이 셰프는 “한 달 동안 밀도 높은 일정으로 이탈리아 곳곳을 다니면서 많은 영감을 얻고 와 메뉴에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탈리아 피에몬테식 소고기 타르타르를 응용한 전채요리인 ‘프리오카(Priocca)’는 이 셰프가 이탈리아 피에몬테주의 소도시 프리오카에 있는 미쉐린가이드 1스타 레스토랑 ‘일 센트로(Il Centro)’에서 수셰프로 근무할 당시 직접 개발한 메뉴다. 얇게 저민 한우 육회 사이 사이에 얇고 부드러운 지방층을 넣어 여러 겹을 만들고, 허브 전문 생산업체를 통해 계약 재배하거나 직접 키운 20여 종의 허브를 엔초비와 함께 곁들인 차가운 요리다. 저마다 다른 맛과 향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허브들은 입안에서 하나의 향연을 펼친다. 이 셰프는 “프리오카는 지금까지도 일 센트로에서 계속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고 전했다.
시칠리 매장 내 테이블은 4인석 6개, 6인석 1개로 총 7개지만 디너 타임엔 서너 테이블에 12명 정도까지만 손님을 받는다. 손이 많이 가는 파인다이닝 요리의 디테일과 완성도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셰프는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파는 것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만족스러운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모든 요리는 식재료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각 코스에 깃든 이야기를 손님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디저트다. 이 셰프는 “이탈리아는 주별로 대표적인 디저트가 있다”며 이탈리아 지도가 새겨진 종이를 보여줬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거쳐간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 8곳을 중심으로 앞으로 20가지의 이탈리아의 지역별 디저트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시칠리아식 아몬드 쿠키와 피에몬테식 폴렌타 쿠키(옥수수가루로 만든 과자)다. 시칠리아 동남부는 아몬드 산지로 유명하고 피에몬테는 옥수수가 많이 재배되는 지역이다.
시칠리의 다이닝 홀은 과하게 멋내려 하지 않아 소박한 듯하면서도 이 셰프가 온몸으로 겪어온 이탈리아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직접 주문 제작한 가구와 이탈리아 현지에서 수집한 소품들로 채워진 공간을 둘러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시칠리아를 상징하는 ‘트리나크리아(3개의 다리를 가진 메두사)’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가구, 바닥 타일과 시칠리아 책자, 장식장에 진열된 사진과 도자기, 벽면에 걸린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도 등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없다. 이 셰프는 “레스토랑을 오픈하기 전 공간 기획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을 공들였는데 아직은 미완성인 것 같다”며 “지금도 계속해서 디테일을 잡아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시칠리는 매장에서 이탈리아산 치즈, 트러플 솔트 등 현지 식재료와 매장에서 직접 만든 홈메이드 피클, 소스 등도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탈리아 음식을 제대로 알고 즐길 수 있도록 시칠리의 인스타그램 계정(@sicili_liheungju)을 통해 다양한 이탈리아 음식 이야기와 시칠리 소식, 이흥주 셰프의 사색과 경험에 대해서도 공유하고 있다. 셰프가 추천하는 이탈리아 와인 리스트나 오늘의 파스타 등 새로운 메뉴에 대한 소개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칠리(SICILI)
장르 모던 이탤리언
위치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가길 13
주방장 이흥주 셰프
영업시간 수~일 12:00~14:30(파스타 바) / 18 : 0 0 ~22:00(다이닝)
가격대 파스타 2만5000~3만2000원 / 디너 코스 15만원 또는 18만원
프라이빗 룸 없음(단, 디너 다이닝은 테이블 4개 이하 운영)
전화번호 050-71432-4250
주차 발레파킹
송경은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