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국영이 떠난 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그의 대표작〈패왕별희〉 개봉 30주년입니다. 〈패왕별희〉는 19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자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LA비평가협회상, 골든글로브 시상식의 외국어영화상을 전부 휩쓴 명작이자 배우 장국영의 대표작입니다. 팬층이 두터둬 굳이 설명도 필요 없는 걸작이지요.
‘은둔의 소설가’ 릴리안 리의 장편소설 <사랑이여 안녕>이 영화 <패왕별희> 원작입니다. 한국에 출간됐지만 현재 절판 상태인 이 책은 웃돈을 주지 않으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하는 책입니다. 거의 ‘전설’로 남은 책이지요. 서울 한 도서관에서 이 책을 어렵사리 발견해 완독했습니다.
소설 <사랑이여 안녕>은 영화 <패왕별희>와 어떻게 다를까요. 413쪽 책을 다 읽어보니, 어떤 영화도 원작이 의도한 최초의 진의를 담아낼 그릇일 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여 안녕>은 그만큼 깊고 넓은 작품입니다.
1929년 중국 베이징. 연홍이 9세 아들 두지의 손을 잡고 경극단 훈련소를 찾아갑니다. ‘창녀’였던 연홍은 두지를 이곳에 맡기려 합니다. 정확히는 아들을 ‘버리기’ 직전입니다. 두지는 육손이(다지증)였습니다. 경극단 단장 관 사부는 두지의 손을 보고 입단 요청을 거부합니다. ‘육손이는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연홍은 작두(원작에선 부엌칼)로 아들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잘라버립니다. 두지가 잘린 건 손가락이 아니라 생모와의 유대, 정신적 탯줄이었습니다.
두지는 눈물과 핏물 속에 경극에 입문합니다. 경극은 남자만의 무대 예술이었습니다. 훈련소에서 두지는 단(旦)역으로 길러집니다. ‘단’역이란 평생 여성 역할이 주어짐을 의미했습니다. 여성으로 분장한 데이(두지)는 경극〈패왕별희(覇王別姬·초나라 패왕이 우희와 이별하다라는 뜻)〉에서 몰락 직전의 초나라 패왕 항우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를 연기합니다. 두지는 200년 경극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우희가 됩니다. 그러나 중국의 굴곡진 현대사는 무대의 우희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두지는 일제시대, 국민당시대, 공산당시대에 모두 칭송받은 삼개예인(三開藝人)이었지만 역사의 물줄기가 바뀔 때마다 수모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술이 전면 부정되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경극단원은 ‘반동’으로 분류되기까지 하지요.
〈패왕별희〉는〈사랑이여 안녕〉의 서사를 그대로 가져갑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두지는 살면서 총 세 번의 거세(去勢)를 경험하지요.
1차 거세는 어머니에 의한 신체 훼손(손가락 절단), 2차 거세는 예 대인의 성폭행(소년성 제거), 3차 거세는 패왕을 연기했던 친구 시투의 결혼(동성성 단절)이었습니다. 거듭된 거세 의식은 두지가 현실과 무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열증의 원인이 됩니다. 연속된 거세와 두지의 혼돈은〈패왕별희〉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해석입니다.
미적인 사유가 가득한 〈사랑이여 안녕〉을 읽어보면 영화가 오히려 원작의 풍부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가지 삭제된 장면 때문입니다. 영화와 달리, 소설의 결말에서 두지의 손가락은 열 개가 아닙니다. 아홉 개입니다. 세월이 지나며 두지는 손가락 하나가 더 잘려나갑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거리로 끌려나와 홍위병 앞에 선 두지와 시투는 평생 친구였던 상대의 약점과 악행을 고발하면서 살아남습니다. 시투는 “두지가 과거 남창질을 했다”고 비난하고, 두지는 “시투가 전직 창녀(아내 주샨)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한다”고 조롱했습니다. 시투의 아내 주샨은 이 사건으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지요.
여기까진 영화와 소설의 내용이 엇비슷합니다. 그러나 배반 직후의 일들이 영화에선 전부 삭제됐습니다.
두 사람은 홍위병에게 시달린 직후 공산당에 의해 하방(下放)에 처해집니다. 하방이란 생산 노동을 위한 사상교육, 즉 강제유배였습니다. 시투는 중국 남부의 복주(푸저우)란 도시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습니다. 이후 시투는 60세가 되어 홍콩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수십 년 만에 경극 연기를 위해 두지가 홍콩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결국 재회합니다. 두지 역시 하방 후 복권된 상태였습니다. 이때 시투가 본 두지의 손가락은 ‘아홉 개’였습니다. “시투는 두지 새끼손가락 한 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의 손은 이제 손가락이 아홉 개밖에 없었다.” (383쪽)
두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부정당하고, 자신이 걸어온 세상으로부터 또 부정당했습니다. 정상성에 편입되기 위해 강제로 손가락을 잘린 두지는 오히려 세상에 의해 정상성에서 또다시 비껴 나갔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작가 릴리안 리는 두지의 손가락 개수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던 두지의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패왕별희〉는 역사의 흐름 속에 황폐화된 개인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위기’를 은유하는 한 편의 우화로도 작용합니다. 우희 역할을 맡은 두지는 지속적으로 현실 속 자신과 무대 속 우희를 혼동합니다. 이는 ‘당대 예술이 처한 불투명한 미래’를 은유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지의 혼란을 상징하는 사물은 다름 아닌 거울입니다. 거울은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비현실 안에 현실과 정반대 모습으로 나타난 주체를 시각적으로 위치시키는 묘한 사물이지요. 영화에 없는 내용이지만, 두지는 성공한 뒤 병적으로 거울을 사 모읍니다. 두지의 방은 골동품과 예술품이 가득한데, 그는 엄청난 양의 거울을 더 수집합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들)에 무대 위 역할을 부여하지요.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가슴을 찍으면서 ‘너’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자 ‘나’가 정해졌고, 두 손을 흔들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을 짚자 ‘그’가 정해졌다.” (226쪽)
두지는 왜 현실과 무대를 혼동하는 걸까요.
작가 릴리안 리는 책 서문에서, “무대 뒤의 평범한 현실은 창백한 얼굴”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창백함이야말로 인간의 표정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무대 위 연기는, 평범한 현실을 가리거나 제거한 뒤 가장 아름다운 절정만을 보여줍니다. 두지와 시투가 짙은 화장으로 무대에 서면 현실을 잊게 되지만 무대 아래에서 두 사람의 현실세계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오직 예술을 위해 무대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왜놈에게 허리를 굽혔다”며 맹비난을 받아야 했고, 그들의 연기는 또 국민당 사령관에게 “선물로 바쳐”졌으며, 공산당 시절에 이르러서는 경극의 본령과 무관한 “혁명 모범극에 참여하라”고 강요받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사랑이여 안녕〉에서 두지의 삶에 거울은 세 번 등장합니다. 두지가 골동품 거울을 보는 장면(226쪽), 두지가 거울을 모조리 깨버리는 장면(274쪽), 노년의 두지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289쪽)입니다.
두지가 바라보는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는, 한 예술가의 변해가는 얼굴이자 시대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던 한 인간의 ‘흐르는’ 초상(肖像)입니다.
영화 〈패왕별희〉을 보면서 왜 하필 패왕(항우)과 우희의 이별 이야기를 다뤘는지 궁금했습니다. 원작을 읽어보면 이 궁금증이 조금은 해소됩니다.
경극단 훈련소에서 매질로 소년 단원을 규율하는 관 사부는 전형적 황제의 모습입니다. 관 사부의 언행엔 거부해선 안 되는 힘이 내재돼 있으며, 그의 규칙이 곧 질서이자 윤리가 됩니다. 훈련소 담장을 넘어 그곳을 탈출한다는 건 곧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므로 엄하게 단죄됩니다. (실제로 소년 소나루가 목을 매 자살하지요.) 한번 결정되면 평생 하나의 배역(두지의 ‘단’역, 우희)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 공간은 전근대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경극 〈패왕별희〉 공연도 몰락한 청조를 향한 충성심을 의미합니다. 예 대인도 아직 청나라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패왕별희〉 주제는 단지 왕조 시대를 향한 어긋난 그리움으로 수렴되진 않습니다. 경극 〈패왕별희〉 속 패왕과 우희가 슬피 울었던 이유는 한 시대가 지나가버리는 덧없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경극의 본질적 주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지에게 경극 무대는, 변화해서는 안 되는 절대성의 예술입니다. 인간사회에선 변할 수밖에 없는 것과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두지의 삶에서 경극은 계속 ‘변해야만 하는 것’으로 강요받습니다. 두지의 분열증은 그가 지키려는 경극(혹은 우희)의 불변적 속성과 중국 세계 사이의 불일치에 기인합니다.
경극은 그 자체의 모습으로 무대 위에서 상연될 뿐이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건을 경험했던 중국의 20세기 격변을 경험하면서 경극의 예술적 지위는 늘 흔들렸습니다. 예술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경극 〈패왕별희〉 속 우희의 눈물과 영화 〈패왕별희〉 속 두지의 눈물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절대성을 향한 때늦은 눈물이 아닐까요.
두지는 소설 〈사랑이여 안녕〉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경극에 참여해 이런 대사를 내뱉습니다. “어찌하여 인간들은 이토록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시투는 그런 두지를 바라봅니다. 이 한마디에는 러닝타임 3시간짜리 영화 〈패왕별희〉의 모든 마음이 응축된 것만 같습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