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미국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이하 S&P)가 ‘현대차·기아’의 신용등급을 기존 ‘BBB+’에서 ‘A-’로 상향 조정하며 신용등급 전망을 ‘Stable(안정적)’로 제시했다. S&P는 AAA부터 D까지 22개로 등급을 나눠 국가나 기업의 신용을 평가한다. 상위 7번째 등급인 ‘A-’는 신용 상태가 양호해 관련한 위험이 크게 낮은 수준을 의미한다. S&P 신용등급 평가에서 A등급을 획득한 완성차 기업은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토요타’ ‘메르세데스 벤츠’ ‘BMW’ ‘혼다’ 등 6개에 불과하다. S&P 측은 “지속적으로 향상 중인 시장 지위를 바탕으로 견조한 수익성과 현금흐름 창출 능력을 고려해 등급 상향을 결정했다”며 “제품 믹스 개선, 주요 시장 점유율 증가, 우호적 환율 등으로 지난 3년간 수익성이 향상된 것도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전기차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 모델을 보유한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전동화 전환기 시장 변화에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며 “Stable(안정적) 전망은 향후 12~24개월도 견조한 수익성을 유지할 것이란 시각을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미국의 무디스(Moody’s)와 피치(Fitch)는 올 2월 현대차·기아에 각각 신용등급 ‘A3’와 ‘A-’를 부여했다.(이들 신용평가사는 현대차와 기아를 한데 묶어 신용평가를 진행한다.) 이로써 현대차·기아가 올해 S&P, 무디스, 피치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모두 신용등급 ‘A’를 받았다. 이들 신용평가사로부터 모두 A등급을 받은 완성차 업체는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일본의 토요타, 혼다, 한국의 현대차·기아 등 단 4곳에 불과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른바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건 사업전망, 재무건전성 등 질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증거”라며 “세계 3위 완성차업체에 어울리는 평가를 받은 셈”이라고 분석했다. 독일의 ‘폭스바겐’만 하더라도 연간 생산 대수는 현대차·기아보다 많지만, S&P 신용등급은 BBB+(안정적)로 현대차·기아(A-)보다 한 단계 낮다. 미국의 전통적인 자동차 빅 3인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다국적 완성차그룹인 ‘스텔란티스’도 신용평가사 3곳에서 모두 B등급을 받는 데 그쳤다.
현재 현대차·기아의 합산 ‘상각전 영업이익(EBITDA)’ 마진율은 10%를 넘었다. 대표적인 회계지표인 EBITDA는 이자비용과 세금, 감가상각 등을 차감하기 전 이익을 나타낸다. 이 지표가 높을수록 기업이 돈을 벌어들이는 능력, 즉 현금창출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차가 최근 인도에서 최대 30억달러(약 4조원) 규모의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는 점도 유동성 확보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인도의 자동차 시장은 전 세계에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축에 속한다. EV차와 하이브리드차를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유연한 생산 능력도 3대 신용평가사의 주요한 판단 근거가 됐다. EV차량만 생산하는 ‘테슬라’, 하이브리드 모델 생산에 주력하는 ‘토요타’와 비교하면 현대차와 기아는 시장 상황에 맞춰 EV와 하이브리드의 생산을 조절하는 게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남부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선 EV뿐 아니라 하이브리드차도 함께 생산할 계획이다. 현지에서 하이브리드차 수요가 늘자 이러한 시장 변화를 반영한 조치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부진)이 이슈가 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글로벌 EV시장에서 영향력이 줄어든 것도 아니다. 미국 자동차 관련 조사업체 모터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올 1∼7월 미국에서 현대차(제네시스 포함)·기아의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10%로 집계됐다. 1위인 테슬라(50.8%)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 포드(7.4%)와 GM(6.3%)이 각각 3, 4위로 뒤쫓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전기차 시장 영향력이 여전히 높다는 점을 감안, 유럽에서도 올해 안에 소형 전기차 ‘캐스퍼 일렉트릭’을 공개해 캐즘 탈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현대차와 기아의 신용등급 상승은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에도 부합한다. 신용등급 상승은 곧 기업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안전한 투자처로 인식돼 주식을 사려는 수요가 늘고 주가 역시 오를 가능성이 커진다. 현대차나 기아에 투자한 소액 투자자 역시 밸류업 효과로 자연스럽게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도 조달 금리가 낮아지면서 이자 비용이 줄어들 전망이다. 이자 비용 감소에 따라 기업이 보유한 현금은 더 많아지기 때문에 신사업 투자나 배당 여력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번 등급 상향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대외신인도 상승과 자금조달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며 “향후에도 시장 변화에 유연하고 민첩하게 대응해 재무건전성과 시장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인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 상향으로 현대차·기아는 전동화, SDV(Software Defined Vehicle·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AAM(Advanced Air Mobility·미래 항공 모빌리티), 로보틱스 등 미래 사업 추진에 한층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차·기아는 ‘2024 CEO 인베스터 데이’를 통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현대차는 지난 8월 28일 열린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올해부터 오는 2033년까지 10년 동안 총 120조 5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 계획과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이번에 공개된 투자 계획은 지난해 발표했던 10년간(2023~2032년) 109조 4000억원 투자 대비 10%가량 늘어난 수치다. 차세대 하이브리드와 EREV(Extended Range Electrified Vehicle), EV, SDV, 수소 등 중장기 핵심 전략인 ‘현대웨이’ 실행에 투입될 예정이다. 기아도 지난 4월에 열린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오는 2028년까지 총 38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존 5개년(2023~2027년) 투자 계획 대비 5조원 증가한 것으로, 이 중 15조원은 전동화와 PBV, SDV, AAM, 로보틱스 등 미래 사업에 투입된다. 현대차·기아의 신용등급 상향은 이러한 미래 신사업 투자 계획의 재원 확보 과정에 신규 주주와 투자자 유치는 물론 필요 시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AAM, 로보틱스, 인공지능(AI) 등 미래 모빌리티 사업을 추진하면서 IT, 전자, 항공 등 다양한 산업계의 한 차원 높은 글로벌 리딩 기업들과의 전략적 파트너십도 기대해 볼 수 있다. 금융 시장 내 위상 격상은 주주 및 투자자 신뢰도 상승, 기업 위상 및 브랜드 가치 제고, 사업 추진 시 거래 조건 개선, 금융 시장 조달가능 자금 확대 및 조달금리 하락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기아 관계자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물론 금융 시장에서 격상된 위상에 맞춰 국내외 더욱 적극적이고 투명한 소통에 나서는 동시에 차질 없는 중장기 미래 전략 실행을 통해 위상을 더욱 높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대차·기아는 올 상반기 합산 매출액 139조 4599억원, 합산 영업이익 14조 9059억원을 기록했다. 현대차의 올해 상반기 연결 기준 매출액은 전년 대비 7.1% 증가한 85조 6791억원, 영업이익은 0.7% 감소한 7조 8365억원을 기록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 총 206만3934대의 차량을 판매했다. 기아의 올 상반기 연결 기준 매출액은 전년 대비 7.7% 증가한 53조 7808억원, 영업이익은 12.6% 증가한 7조 694억원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총 155만 5697대의 차량을 판매했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