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보다 고도화되고 최신화되는 AI 반도체칩 기술 경쟁에서 ‘유리기판’ 기술이 이목을 끌고 있다. 반도체 기술 개발 분야에서 ‘게임체인저’로 평가받는 유리기판 시장을 놓고 주요 반도체 기업 간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며 전 세계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유리기판 산업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SKC 자회사인 앱솔릭스(Absolics)는 최근 미국 정부로부터 7500만달러(약 1015억원) 규모의 반도체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반도체 개발사에 지급된 해당 보조금이 반도체 소재 기업에 지급된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다. SKC는 이번 보조금 수령을 계기로 AI 반도체 생태계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으는 유리기판 사업에 한층 속도를 낼 계획이다. 미 상무부는 지난 5월 23일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른 반도체 생산 지원금으로 앱솔릭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예비조건각서(PMT)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보조금 대상은 앱솔릭스의 조지아주 코빙턴 유리기판 제 1공장으로, 보조금 7500만달러는 총투자비 3억달러 중 25% 규모다. 1공장의 연간생산능력은 1만2000㎡이고, 최근 완공돼 시운전에 착수했다. 상업 양산 시점은 내년 상반기다.
앱솔릭스는 연산 7만2000㎡ 규모의 제2공장 건설도 추진할 예정으로 투자금으로 4억달러 이상을 투입할 방침이다.
SKC는 지난 2021년 반도체 장비업체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반도체 패키징용 유리기판 합작사인 앱솔릭스를 설립했다. 유리기판은 앱솔릭스가 세계 최초 상업화를 앞두고 있는 제품으로 플라스틱을 활용하는 기존 반도체 기판과 달리 유리를 원재료로 기판을 만든다. 플라스틱기판보다 두께를 줄여 얇게 만들 수 있고, 전력 소비는 기존 기판 대비 30% 이상 줄일 수 있다. 데이터 처리 속도도 빠르다.
유리기판의 이러한 특성이 AI를 비롯한 대용량 데이터를 고속으로 처리하기 위한 게임체인저로 꼽히는 이유다. 유리기판 수요처는 대규모 데이터 센터를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과 고성능 반도체 제조사 등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유리기판은 매끄러운 표면의 사각 패널을 넓은 면적으로 만들 수 있어 반도체 패키징 미세화와 대형화 추세에 적합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소재·부품업체로는 최초로 SKC의 투자회사 앱솔릭스에 보조금 1000억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은 유리기판이 반도체산업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핵심 부품임을 인정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앱솔릭스가 유리기판 시장을 이끌어나갈 기업임을 미국 정부가 사실상 보증해줬다는 점에서 향후 유리기판 시장 주도권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반도체지원법 보조금은 반도체 유리기판 생산기업인 앱솔릭스의 투자와 기술 노력을 인정한 것”이라며 “AI 반도체 기술을 놓고 전 세계가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유리기판 기술 경쟁이 본격화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23년부터 본격적인 AI 시대가 열리면서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고성능 반도체 칩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AI 성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 중 하나가 연산과 추론을 담당하는 고성능 반도체다. 이 때문에 한층 빠르고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처리하고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AI 반도체 칩 전쟁이 불붙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서 반도체 칩 집적화와 미세공정 고도화의 한계에 부딪히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 이어졌다. 최근 주목받은 기술이 기존 플라스틱기판 대신 유리기판을 사용하는 신기술이다.
유리기판은 플라스틱보다 크고 매끈한 기판을 더 얇고 평평하게 만들 수 있어 더 많은 회로나 장치들을 올릴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전송 데이터 손실이 적고 고속 데이터 전송이 가능해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생성형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분류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AI 기술에 최적화돼 있다는 평가다. IBM에 따르면 2020년 하루 평균 25억기가바이트(GB)의 디지털 정보량이 생산됐는데 2025년에는 하루 175조GB의 정보가 생산될 것으로 추정된다. 5년 새 하루 생산 정보량이 7만배가량 늘어나는 셈이다.
유리기판 사업을 타사 대비 3년가량 먼저 시작한 앱솔릭스는 축적한 기술 노하우와 대량생산 역량을 이번 미국 정부 보조금 수령을 계기로 더욱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회사는 미국 조지아주에 3억달러를 투자해 지은 제1공장의 성능테스트와 시험 운전을 올해 중 마무리 짓고 내년 상반기 본격적인 양산에 돌입한다.
또한 소규모 생산(SVM)을 택한 제1공장에 이어 제2공장은 대규모 생산(HVM) 방식으로 시장 장악력을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이미 내로라하는 글로벌 반도체업체들의 러브콜이 잇따르고 있다. 제2공장 생산량은 연간 1만2000㎡를 생산할 수 있는 제1공장 대비 약 5~20배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앱솔릭스 관계자는 “주요 반도체 기업들과 협력 모델에 대해 논의 중”이라며 “시장 기대가 큰 만큼 향후 증설 규모 등에 대해 다양하게 검토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SKC는 앱솔릭스 양산 준비와 함께 미국 패키징 기술 기업 칩플렛에 투자하는 등 현지 생태계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칩플렛은 반도체 패키징 설계 역량과 고객사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앱솔릭스와의 시너지가 기대되는 이유다.
미국 시장을 직접 공략하고 있는 만큼 산학 협력을 바탕으로 한 인력 수급도 확대한다. 앱솔릭스는 현지 조지아 공과대 등과 협력해 전문 인력을 확보할 방침이다.
앱솔릭스가 유리기판 분야 리더십을 주도해나갈 경우 SK하이닉스와의 시너지도 기대된다. SK하이닉스는 AI용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데다 유리기판 기술까지 접목시킬 경우 더욱 강력한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리기판에 다른 국내외 기업들도 뛰어들고 있는 만큼 진검승부는 이제 시작이란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앤마켓은 유리기판 시장이 2028년엔 84억달러(약 11조5000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앞으로 시장 파이가 더욱 확대되면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해진다는 뜻이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 등도 잇달아 유리기판 사업에 뛰어들었다. 인텔, AMD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 역시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유리기판 생산과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인텔은 지난해 9월 유리기판을 적용한 반도체 시제품을 공개한 바 있다.
이재모 그로쓰리서치 연구원은 “유리기판은 기존 제품보다 50% 많은 칩을 장착할 수 있다”며 “8배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면서도 절반 정도의 낮은 전력을 소비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국내 부품사들도 유리기판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삼성전기와 SKC가 눈에 띈다. 특히 삼성전기는 선발 주자인 SKC를 매섭게 추격하고 있다. 연내로 계획했던 파일럿 라인 구축을 1분기 앞당기기로 한 것이다.
삼성전기는 9월에 파일럿 라인 장비를 반입할 예정이다. 앞서 삼성전기는 ▲파일럿 라인 구축(2024년) ▲시제품 양산(2025년) ▲양산 본격화(2026년)라는 로드맵을 세운 바 있다. 4월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수주 사업인 만큼 고객들과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애플에 유리기판을 공급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애플은 차세대 모바일 프로세서(AP)에 유리기판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규하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애플이 차세대 반도체 기판을 유리기판으로 낙점하고 삼성 밸류체인과 협력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애플과 협력해온 LG이노텍도 유리기판 공급에 나설 전망이다. 최근 LG이노텍은 유리기판 사업에 진출하며 최고기술책임자(CTO) 부문에서 인력 충원에 나섰다. 문혁수 LG이노텍 대표는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미국 반도체기업들이 관심이 많기 때문에 LG이노텍도 당연히 유리기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소재 기업 코닝 역시 유리기판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한국 투자 50주년을 맞은 코닝은 국내 유일한 첨단 유리 제조 업체다.
반 홀 코닝 한국 총괄사장은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유리기판을 비롯한 한국 사업 전략을 소개했다. 코닝은 반도체 패키징 공정 중 특히 유리기판 분야 진출을 위해 글로벌 업체들과 긴밀히 협업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충남 아산에 연구개발(R&D)과 제조 시설을 모두 두고 있는 코닝은 국내에서도 유리기판 생산에 나설 방침이다. 홀 총괄사장은 “코닝은 실제 반도체 패키징 공정에 유리를 적용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고객들과 협업하고 있다”며 “현재 패키지 기판으로 널리 쓰이는 유기소재 기판을 유리기판으로 대체하면 여러 측면에서 장점이 있을 것으로 예상돼 유리기판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특히 코닝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기업들이 모여 있는 한국 시장을 글로벌 연구개발 거점으로 키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미 시장과 국내 시장 모두 유리기판 경쟁 최전선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향후 기술 개발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각 국가별, 지역별 개발 경쟁이 치열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직 상용화가 되지않은 기술인 만큼 상용화 이전까지는 어디가 더 앞선다고 확언하기 힘들 것”이라며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몇 년 후에 어떤 기업이 가장 앞서 있고 경쟁력을 갖추는지에 따라 마지막에 웃는 자가 뒤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