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연말을 앞두고 2018년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린 롤드컵 열기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다. 롤드컵 2023은 ‘FIFA 월드컵(축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결승전 당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결승전 응원전을 벌였다. 서울시는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 광화문 광장에 대형 화면을 설치하고, 경기를 생중계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e스포츠 대회 단체 응원전이 펼쳐진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개최된 롤드컵이 역대급 흥행에 성공하면서, e스포츠의 반등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감도 감지된다.
2023년 11월 19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3 리그오브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전에서는 한국팀(국내 리그 LCK)인 T1이 중국팀 WBG를 세트 스코어 3 대 0으로 완파하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에서 개최된 롤드컵은 흥행과 서사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월드스타 ‘페이커’ 이상혁은 통산 4회 롤드컵 우승을 기록하며 역대 최다 우승 타이틀을 자체 경신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e스포츠의 전설’ 반열에 오른 셈이다. 롤 팬덤 사이에서 페이커는 축구로 치면 리오넬 메시, 농구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슈퍼스타로 통한다.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이번 롤드컵은 온·오프라인에서 역대급 흥행 스코어를 기록했다. 이번 대회 4강까지 라이엇게임즈 내부에서 잠정 집계한 시청률(최대 동시접속자 수)은 미국과 멕시코에서 열렸던 2022년 대회보다 6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라이엇게임즈가 아직 최종 집계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롤드컵 2023의 시청자 수(누적접속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4억 명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최고 흥행카드인 ‘한중전’으로 펼쳐진 결승전 역시 역대급 흥행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동시접속자 수 ‘1억 명’ 돌파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역대 최고 기록은 지난 2021년 롤 결승전의 최고 동시시청자 7386만 명이다.
결승전 당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열린 롤드컵 경기 중계 방송의 조회 수는 1000만 명에 육박했다.
오프라인에서도 역대급 흥행을 거뒀다. 2023년 10월 1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세계에서 모인 22개팀은 서울과 부산에서 예선전과 토너먼트까지 총 53경기의 대장정을 펼쳤는데, 이 기간 오프라인 관중은 총 7만 명으로 집계됐다. 예선전을 포함해 서울에서 열린 경기는 모두 매진됐다. 롤드컵을 보러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도 상당수였다는 후문이다.
소위 ‘빅매치’의 경우 한정된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암표’까지 등장하며 팬들이 치열한 직관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2023년 결승전 현장 좌석 1만 8000석은 8월 예매 시작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가장 저렴한 티어8석이 8만원, 최고가인 티어1석이 24만5000원에 판매됐다.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티어1석이 최고 300만원에 거래된 사례도 있었다. 현장에 가지 못한 팬들을 위해 CGV는 전국 44곳 영화관에서 결승전을 생중계했다.
‘롤(LoL)’은 2009년 라이엇게임즈가 출시한 온라인 전투 게임이다. 1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으로 불린다. 게임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는 메가히트 지식재산권(IP)이다.
라이엇게임즈에 따르면 전 세계 기준 매월 1억 명 이상이 롤에 접속하고 매일 2700만 명 이상이 플레이하고 있다. 특히 롤은 국내에서도 여전히 확고한 위치에 있다. 리서치회사 게임트릭스에 따르면 롤은 국내 PC방 사용시간 점유율에서 277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다(2023년 11월 16일 기준). 평균 점유율은 43.48%에 달해 1위를 수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왕좌’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는 것. 특히 장기간 흥행에 성공하면서 롤은 전 세계에 e스포츠를 확산시킨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게임을 단순히 즐기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IP의 수명주기를 더 길게 가져갈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롤의 장기 흥행 비결은 첫째, 장르의 지속성에 있다는 분석이다. 기타 경쟁 게임이 단순한 구조로 짜여 쉽게 질리는 데 비해 롤은 ‘파고들게 만드는 게임’으로 꼽힌다.
특히 캐릭터를 키우는 역할수행게임(RPG)에 실시간 전략(RTS) 장르를 접목한 것이 주효했다. 롤에선 5명 영웅이 한 팀을 이뤄 상대방의 건물을 부수기 위해 실시간 전략 대전을 펼친다.
사용자는 165명의 수많은 영웅 중 1명을 선택해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자신과 한 팀을 이룬 4명과 함께 상대방이 택한 5명의 영웅과 겨뤄 적 팀의 ‘넥서스(본부)’를 먼저 파괴하면 승리하는 방식이다.
건물을 짓고 병력을 만들어 상대방과 싸우는 스타크래프트 등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긴장감과 장시간을 투자해 캐릭터를 키워 미션을 수행하는 리니지류 롤플레잉게임(RPG)의 중독성을 합쳐놓은 것이다. 자신이 고른 영웅 1명에게 집중하면 돼 조작성과 접근성도 뛰어나다.
집요한 업데이트도 롱런의 비결로 꼽힌다. 한때 롤의 경쟁작이었던 블리자드 오버워치는 업데이트가 지연되면서 침체기를 맞았다. 반면 롤은 게임 재미를 위해 파격에 가까운 업데이트를 꾸준히 이어왔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페이스리프트’가 아닌 ‘풀체인지’급 업데이트를 주기적으로 이어온 셈이다.
롤은 게임 자체도 재밌지만 돈을 추가로 내지 않고도 즐길 수 있어 ‘착한 게임’으로 불린다. 롤에선 상대 진영의 핵심 건물을 부수면 승리한다. 캐릭터를 꾸미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지만 이것이 승리를 위한 필수 요소는 아니다. 모든 캐릭터를 게임 플레이를 통해 벌 수 있는 화폐만으로 구입할 수 있다. ‘현질’ 여부에 따라 과금과 비과금 플레이어 간 큰 능력치 차이를 줘 과금을 유도하는 게임들과의 차별점으로 꼽힌다.
지속적인 이용자 유입과 증가는 수익모델로 이어진다. 실제로 라이엇게임즈의 영업이익률은 국내 주요 게임사 평균의 2배 이상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엇게임즈는 롤 IP를 게임과 e스포츠 밖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수익 다각화가 아니라 ‘게임도 문화이고 경험’이라는 회사 철학에 따라 추진된다. 예컨대 롤의 e스포츠 대회 부대행사로 열리는 ‘롤 오케스트라’ 콘서트에 등에도 항상 구름관중이 몰린다. 제러미 리 롤 글로벌 제작총괄은 “무엇보다 뛰어난 게임성이 (롤의) 장기 흥행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게임의 본질인 ‘재미’를 추구하고, 메가 히트·장기 흥행 IP를 만들면 돈도 따라올 것이라는게 롤 제작진의 믿음이다. 확률형 아이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진 한국 게임업계도 최근엔 이를 인식하고 신작 게임을 만드는 추세다.
라이엇게임즈는 이번 한국 롤드컵을 계기로 지속가능한 e스포츠 리그 수익화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게임업계에서는 롤드컵 2023이 쪼그라들고 있는 전 세계 e스포츠 시장을 반등시킬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스포츠 선수층이 두텁고, 팬덤이 두터운 한국은 글로벌 인기 확장의 핵심으로 주목받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올해 국가별 e스포츠 시장 규모는 한국(2억7440만달러)이 미국(8억7100만달러)과 중국(4억4520만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클 전망이다.
최근 사우디, 중국과 같은 ‘큰손’들이 e스포츠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e스포츠업계의 호재로 손꼽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이끌고 있는 사우디는 엔터테인먼트와 게임을 미래 먹거리로 지목했다. 오일머니를 대거 투입해 석유에너지 사업뿐 아니라 전 세계 엔터·게임산업을 주도하겠다는 구상이다.
그 중심에는 ‘새비게임스그룹(Savvy Games Group·SGG)’이 있다.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다. ‘전 세계 최고의 게임 그룹’을 목표로 내세웠다. 빈 살만 왕세자는 PIF 등을 통해 게임·엔터 산업에 370억달러를 투자할 방침을 세워뒀다. 사우디는 2024년부터 매년 ‘e스포츠 월드컵’을 열 예정으로 알려졌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사우디가 마음만 먹는다면, 롤드컵을 능가하는 규모의 e스포츠 대회가 탄생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