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를 무기로 꺼내든 미국의 굴기가 우리 기업들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 재진출한 미국 인텔은 삼성전자를 제치고 시장 2위에 등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세부 사업 구조를 개편하고 ‘내부 파운드리’ 모델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내년 1분기부터 자체 생산하는 중앙처리장치(CPU) 등을 자사 파운드리 수익으로 집계한다. 데이비드 진스너 인텔 CFO(수석 부사장)는 최근 투자자 대상 웨비나에서 이 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인텔은 7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의 벽에 부딪혀, 지난 2018년 파운드리 시장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 취임 이후 반도체 제국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며, 2021년 시장 재진출을 선언했다. 인텔은 반도체 사업 부문을 팹리스(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로 분리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내부적으로 반도체 생산 주문을 파운드리 사업부가 수주받아 생산에 나서는 방식이 되고, 자사 칩 생산 실적이 파운드리 매출로도 잡히게 된다. 데이비드 CFO는 “2024년에는 내부 물량을 기준으로 200억달러 이상의 제조 매출을 기록해 파운드리 2위 사업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파운드리 사업에서 208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를 감안하면 인텔의 2위 사업자 선언이 실현될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이 같은 매출 집계 방식은 실제로 이미 그 효과가 입증됐다. 현 2위인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사업부도 삼성전자 제품을 별도의 고객 매출로 잡기 시작하면서 매출 규모가 급속도로 확대됐다. 인텔도 내년부터 단숨에 글로벌 파운드리 빅3 업체로 몸집을 키우면서 세를 과시하고 외부적으로 홍보 효과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인텔의 2위 선언이라는 야심찬 대대적 선언이 무색하게도 투자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발표 다음날 뉴욕 증시에서 인텔의 주가는 오히려 전거래일보다 6% 급락한 32.90달러를 기록했다.
발표 내용이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텔이 파운드리 재진입을 선언한 뒤 투자자들이 전망한 것은 신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외부 물량 대량 수주였다. 한데 인텔이 내부 회계 방식 변화로 ‘2위’를 하겠다는 전략을 밝히자 이를 ‘꼼수’로 받아들인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인텔의 발표는 역설적이게도 투자자들에게 인텔의 현재 제조 규모가 소규모이며 당분간 이 수준이 유지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텔은 즉각 수습에 나섰다. 인텔은 “외부 수주 물량 기준으로도 2030년까지 2위 사업자가 되겠다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텔의 이 같은 전략을 단순‘꼼수’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인텔은 본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텔은 지난 6월 18일 250억달러를 들여 이스라엘 남부 키르얏 갓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지난 16일에도 46억달러(약 6조원)를 들여 폴란드 브로츠와프 지역에 반도체 패키징 및 테스트 같은 후공정 라인을 지을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독일 마그데부르크(170억유로), 아일랜드 레익슬립(120억유로)에도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실제로 지난 4월 인텔은 ARM과 함께 인텔의 18A(옹스트롬) 공정을 활용한 모바일용 SoC(시스템온칩)를 생산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텔의 18A 공정은 1.8나노(㎚)에 해당한다. 인텔 측은 “이번 협력은 우선적으로 모바일 SoC 설계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향후 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데이터센터, 항공우주산업 등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ARM과의 협력을 계기로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서 빠르게 안착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블룸버그는 “겔싱어는 인텔 프로세서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신기술을 보유한 ARM에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개방성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전했다.
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반도체 업계의 자존심으로 여겨졌던 SK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반도체 업계의 자존심으로 여겨졌던 SK하이닉스는 미국 마이크론에 글로벌 시장 점유율 2위 자리를 내주고 9년 만에 3위로 밀려났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마이크론의 올해 1분기 D램 매출은 27억2200만달러를 기록했다. 전분기(28억2900만달러)에 비해 3.8% 줄었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 매출은 23억1200만달러로, 33억8600만달러를 기록한 지난 분기에 비해 31.7% 급감했다. SK하이닉스는 1분기 출하량과 평균판매단가(ASP)가 모두 15%이상 하락해 가장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지난해 4분기 D램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점유율(매출 기준)은 27.6%로 마이크론(23.1%)에 앞선 2위 자리를 유지했지만, 올해 1분기 시장 점유율은 마이크론 28.2%, SK하이닉스23.9%로 2위와 3위의 순위가 바뀌었다.
트렌드포스는 “글로벌 톱3 메모리반도체 기업 가운데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D램 출하량 감소폭과 ASP 하락폭이 가장 컸다”며 “반면 마이크론의 출하량은 전분기 대비 늘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기업들의 추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삼성전자는 ARM과 손잡은 인텔처럼 ‘K연합’을 꾸렸다. 삼성전자는 현대자동차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분야에서 손을 맞잡았다. 디스플레이, 카메라 모듈, 사운드 시스템에 이어 반도체까지 삼성과 현대차 간 협력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현대차 차량에 프리미엄 IVI용 프로세서인 ‘엑시노스 오토 V920’을 공급한다고 밝혔다. 두 회사는 2025년 제품 수급을 목표로 본격적인 협력에 들어갈 계획이다. ‘엑시노스 오토 V920’은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IVI용 프로세서다. 운전자에게 실시간 운행 정보는 물론 고화질 멀티 미디어 재생, 고사양 게임 구동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지원한다.
특히 이번 제품은 영국 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ARM의 최신 전장용 CPU 10개가 탑재돼 기존 제품보다 성능이 약 1.7배 향상됐다. 한국의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이번 협업으로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를 확실히 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두 회사 간 ‘미래차 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일본 전자기업 소니와 자동차기업 혼다가 미래차 개발을 위한 협업을 진행 중인 것처럼 삼성전자와 현대차 간 협업 방향에 대한 산업계 안팎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피재걸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 부사장은 “삼성전자는 이번 협력을 통해 IVI용 프로세서 시장에서 리더십을 공고히 다질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품 공급과 관련해 특별한 대외적인 발표가 없었던 삼성 다른 관계사의 사례와 달리, 이번 삼성전자의 ‘엑시노스 오토 V920’ 공급 소식은 공식적인 발표로 공개됐다. 그만큼 미래차를 겨냥한 삼성과 현대차의 협력관계가 ‘공식화’되는 신호라는 해석이다. ‘엑시노스 오토 V920’은 최신 그래픽 기술 기반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탑재, 그래픽 처리 성능이 이전보다 최대 2배 빨라졌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고사양의 게임을 비롯해 더욱 실감 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삼성전자 측 설명이다. 이와 함께 최신 연산코어를 적용해 신경망처리장치(NPU) 성능도 약 2.7배 강화했다. 운전자 음성을 인식하고 상태를 감지하는 운전자 모니터링 기능은 물론, 주변을 빠르게 파악해 사용자에게 더욱안전한 주행 환경을 제공한다. 차량용 시스템의 안전 기준인 ‘에이실(ASIL)-B’를 지원해 차량 운행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시스템 오작동을 방지하는 등 높은 안정성을 제공한다.
삼성전자는 급성장하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IHS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 규모는 680억달러를 넘어섰고, 2029년 말에는 이보다 2배가 넘는 143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차량에 탑재되는 반도체 종류도 더 다양해져 2029년까지 7년간 연평균 11% 성장세가 예상된다는 게 IHS의 예측이다.
SK하이닉스는 또 다른 대어 애플과 손을 잡았다. SK하이닉스의 D램이 애플의 차세대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 프로’에 탑재될 예정이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최근 애플이 출시를 예고한 비전 프로에 들어갈 맞춤형 D램을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D램은 애플이 비전 프로를 위해 자체 개발한 새로운 칩 ‘R1’과 연동한다. R1 칩은 카메라 12개, 센서 5개, 마이크 6개가 입력한 정보를 처리해 콘텐츠가 이용자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비전 프로용 D램 공급과 관련해 SK하이닉스 측은 “고객사 정보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비전 프로는 스키 고글처럼 머리에 착용하는 공간형 컴퓨터다. 컴퓨터나 아이폰에서 해왔던 컴퓨팅 기능을 3차원(3D) 공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기다. 새로운 운영체제인 비전OS에 이용자가 눈과 손, 음성을 통해 기기를 조작할 수 있도록 카메라와 센서를 갖췄다.
애플은 지난 6월 초 열린 연례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서 비전 프로를 처음 공개하고, 내년 초 출시를 예고한 바 있다.
매일경제 산업부 오찬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