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가 가고 젠슨 황(Jensen Huang) 의 시대가 왔다. 지난 3월 24일 미국 반도체 업체인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Gordon Moore)가 세상을 떠났다. 무어는 자타가 공인하는 반도체의 역사다. ‘반도체는 2년마다 집적도가 배로 늘어난다’라는 무어의 법칙은 지난 수십 년간 업계의 성경과 같았다.
지금도 인텔을 필두로 삼성, TSMC 등은 무어의 법칙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 중이다. 그러나 일찌감치 무어의 법칙은 끝났다고 선언한 인물이 바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다.
무어의 사망 며칠 전인 지난 3월 21일 열린 엔비디아 ‘GTC(GPU Technology Conference)2023’ 행사에서 젠슨 황은 “범용 CPU를 통한 무어의 법칙은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엔비디아가 설계한 GPU가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시대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엔비디아의 칩을 사용한 챗GPT가 인공지능(AI) 혁명을 쏘아 올렸듯이 향후 반도체 발전도 자신들이 주도할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젠슨 황은 이미 몇 년 전 무어의 법칙 대신 황의 법칙을 선언했다. AI를 작동시키는 실리콘 칩의 성능이 2년마다 2배 이상 향상한다는 법칙이다. 챗GPT를 필두로 광범위한 산업에 AI가 접목되고 있는 환경에서 엔비디아의 황의 법칙은 반도체 산업을 넘어 전 산업을 관통하는 법칙으로 주목받고 있다.
챗GPT가 전세계를 강타한 올 상반기 미국 주식 시장의 신데렐라는 개발사인 오픈AI나 서비스를 출시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닌 엔비디아였다. 올해 초만 해도 140달러대에 불과했던 주가는 7월 19일 기준 473달러로 전고점을 지속적으로 경신하며 3배 이상 껑충 뛰었다. 시가총액도 5월 말 반도체 기업 최초로 1조달러를 돌파했다. 쟁쟁한 빅테크들만 가입할 수 있는 ‘시총 1조클럽’을 형성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아마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엔비디아의 1분기 실적 발표는 충격 그 자체였다. 2분기 매출 예상치가 월가의 예측을 53%나 웃돌았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2023년 1분기 반도체 설계 기업 매출 보고서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지난해 4분기 대비 13.5% 증가한 67억3000만달러를 기록, 상위 5개 반도체 디자인 전문 기업 중 유일하게 두 자릿수 성장을 달성했다. 바로 위 퀄컴이 79억4000만달러로 이 부문 1분기 매출 1위를 달성했지만, 현재 상승세를 보면 엔비디아가 1위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향후 실적 전망도 밝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코웬그룹의 매튜 램지 애널리스트는 전날 엔비디아의 회계연도 2분기(5~7월) 매출 전망치를 120억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엔비디아가 올해 5월 1분기 실적 발표에서 자체적으로 내놓은 2분기 매출 전망치(110억달러)에 대해 당시 “폭발적인 전망”이라는 평가가 잇따랐지만, “이마저도 보수적인 추산”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엔비디아의 선전은 바로 챗GPT를 필두로 생성형 AI에 없어선 안 될 부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픽처리장치(GPU·Graphic Processing Unit)다. 챗GPT처럼 AI 스스로 데이터를 학습·분석하면서 능동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을 ‘생성형 AI’라고 하는데, GPU는 이런 생성형 AI의 토대이자 근간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데 최적화돼 있어서다. 타사가 유사한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출시하기 위해서는 현재까지 엔비디아의 GPU가 답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생성형 AI에 쓰이는 머신러닝(기계학습)용 GPU 시장의 95%를 점유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하 려는 기업 중 열에 아홉은 엔비디아의 GPU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챗GPT를 개발한 오픈AI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픈AI는 챗GPT를 만들 때 엔비디아의 GPU 수만개를 연결한 슈퍼컴퓨터를 이용했다.
1993년 AMD 출신의 젠슨 황이 설립한 엔비디아는 평범한 PC(개인용 컴퓨터)용 그래픽 처리 칩(GPU) 제조사로 시작했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0년대 들어 GPU를 병렬연산 처리장치로 활용하는 ‘GPGPU’ 기술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황 회장과 엔비디아는 여기에 집중해 CPU 성능에만 의존하던 컴퓨터의 연산 성능을 GPU를 병렬연산 처리 장치로 활용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국가 단위의 투자가 필요한 슈퍼컴퓨터에 GPU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다. AI가 주목을 받으며 엔비디아의 가치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난 2016년 3월, 전 세계를 강타한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와 AI 바둑기사 ‘알파고’의 등장은 그때까지 연구실의 구상 및 실험 단계에 머물던 AI 기술을 당장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접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사건이었다. 특히 차세대 AI 개발에 GPU의 병렬연산 기능을 활용한 딥러닝, 머신러닝 기술이 주목받으면서 엔비디아는 단숨에 GPU 컴퓨팅 기업에서 AI 컴퓨팅 전문 기업으로 변신하게 된다. AI의 미래 가치를 내다본 기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새로운 AI 연구개발에 뛰어들었고, 여기에는 엔비디아의 GPU를 탑재한 고성능 컴퓨터들이 아낌없이 투입됐다. 엔비디아도 이에 맞춰 ‘고성능 컴퓨팅 전용 GPU’를 본격적으로 선보이며 시장에 호응했다. 현재 상용화되어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접목된 각종 생체 인식 기술과 사진 및 영상 인식 기술, 상용화가 코앞에 다가온 자율주행차 기술 등도 이 시기 AI 개발 열풍의 결과물이다. 더불어 AI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지배력 또한 덩달아 커졌다.
엔비디아는 지난 10년간의 인공지능 산업 발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로 자리잡고 있다. 지배적 표준이 확정되지 않은 과도기로 다양한 기업들이 활용 목적 및 분야에 따라 뛰어들고 있다. 아직 표준적 시장 지배자는 없는 상황에서 인공지능 반도체 개발에 기존 반도체 제조사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며 신생 스타트업에도 열린 시장이다. 현재 GPU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엔비디아를 뛰어넘기 위해 특별한 강자가 없는 NPU(신경망처리장치) 분야를 중심으로 기업들이 도전하고 있다.
심경석 KB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첨단 파운드리 공정을 한 번 이용할 때마다 수억원의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설계된 반도체를 1~2회만 시험 제작해도 소규모 스타트업계에는 큰 비용 부담이 발생한다”라며 “첨단 AI 반도체는 엔비디아 및 인텔, IBM, AMD 등의 거대 기업이나 많은 투자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 위주로 산업 생태계가 조성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말했다.
“지난 20년이 어메이징했다면, 다음 20년은 공상과학과 같을 것입니다.” 2020년 GTC 기조연설에서 젠슨 황이 한 말이다. 엔비디아의 상승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AI의 대중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빌 게이츠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5~10년 안에 모든 산업이 AI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 내다보기도 했다.
실제 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이터를 통해 연산하는 컴퓨터의 성능도 개선되면서 이를 활용하는 AI 역시 엄청난 발전 속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발간한 AI 보고서를 살펴보면 2010년 이후부터 AI의 성능 향상 속도가 무어의 법칙보다 7배나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집적 회로가 2년에 2배씩 향상된다면, AI는 3~4개월에 2배씩 성능이 좋아지고 있는 셈이다.
성능이 좋아지면서 비용도 줄어들고, 학습에 걸리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18년 이후 AI가 이미지를 분류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비용은 최대 63.6%, 훈련 시간은 94.4%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반 기술의 발전을 통해 AI는 모든 산업을 바꾸고 있다. 제조·교육에서부터 미용, 의료까지 거의 모든 산업 영역에 AI가 적용돼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고 있다. AI가 적용된 산업들은 과거보다 더 소비자 지향적으로 변하고 있다. 다양한 질문에 결과를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답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AI 시장의 확대를 내다본 엔비디아는 고성능 반도체 칩의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다양한 기업들을 인수했다. 엔비디아의 첫 번째 인수 업체는 ‘3Dfx’였다. 3Dfx는 엔비디아에 앞서 3차원(3D) 그래픽 칩과 그래픽 카드를 선보이며 1990년대 후반 이름을 날리던 기업이다. 이후 엔비디아는 2003년 7000만달러를 들여 모바일용 그래픽 프로세서를 선보이던 미디어큐(MediaQ)를 인수, 관련 기술 개발에 속도를 높였다.2008년엔 물리 엔진(게임에서 나오는 물체가 실세계 물리 법칙, 예를 들어 중력이나 관성 등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처리해주는 프로그램) 기업 에이지아(AGEIA)를 인수하기도 했다. 에이지아는 당시 가장 많이 쓰이던 물리 엔진 ‘피직스’를 선보이던 곳으로, 엔비디아는 이후 자사 그래픽 제품에 물리 엔진 적용을 늘리며 기술력을 한층 끌어올렸다.비교적 최근인 2020년엔 데이터센터 사업을 키우기 위해 이스라엘 기업 멜라녹스(Mellanox)를 인수했다. 멜라녹스는 데이터센터 내 CPU와 GPU, 메모리 간 원활한 데이터 처리를 돕는 데이터처리장치(DPU)를 선보인 곳이었다. 이후 데이터센터 사업은 엔비디아 세부 사업 분야에서 가장 큰 매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엔비디아는 최근 다른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 7월 12일 AI 기반 바이오기업 ‘리커전(Recursion)’의 AI모델 개발을 위해 5000만달러(약 640억원)를 투자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리커전 주가는 하루 만에 80% 가까이 폭등했다. 리커전은 AI 모델을 통해 발굴하고 설계한 신약과 치료법을 ‘리커전 OS’ 플랫폼을 통해 의약품 제조업체에 제공하는 기업이다. 리커전은 2만3000테라바이트(TB)가 넘는 생물 및 화학 데이터세트를 사용해 엔비디아의 클라우드 플랫폼에서 AI 모델을 학습시킬 계획이다. 엔비디아는 리커전이 생성하는 AI 모델을 자사의 생성형 AI용 클라우드인 ‘바이오 니모(BioNeMo)’에서 라이선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이오 니모는 엔비디아가 지난 3월 발표한 바이오 분야에 특화된 클라우드 서비스다. 이러한 엔비디아의 행보에 대해 CNBC는 “AI 열풍이 제약 산업에도 진입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최신의 사례”라며 “헬스케어 분야에 접목된 AI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치료제를 빠르게 제공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엔비디아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히 칩 공급자를 넘어서 GPU 컴퓨팅 기술과 AI 플랫폼 사업자로 변모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자신들이 만든 GPU 컴퓨팅 및 AI 생태계를 더욱 가속해 시장을 더욱 확대하고, 후발주자들과의 격차를 더욱 벌리려는 모양새다. 업계에선 엔비디아의 이러한 독주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 예상하는 시각이 많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당분간 GPU 기반 고성능 컴퓨팅과 AI 분야에서 엔비디아를 대체할 기술과 기업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며 “양자컴퓨터처럼 기존 컴퓨팅 기술의 근간을 바꾸는 차세대 컴퓨팅 기술이 실용화 및 대중화될 때까지 향후 수년간은 ‘황의 법칙’이 유효할 것”이라 내다봤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