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경영’에 고삐를 죄고 있는 SK그룹이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 시설 투자에 대한 자금 확보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일각에선 최근 일정 정도 자금 수혈로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계획된 투자 규모가 커 설비 투자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최근 일련의 일들이 이를 방증한다. SK는 지난 6월 15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최태원 그룹 회장 주재로 올 하반기 확대경영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최회장뿐 아니라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 추형욱 SK E&S 사장, 지동섭 SK온 사장, 유영상 SK텔레콤 사장 등 계열사 CEO 30여 명과 동행 임원 등 총 60여 명이 참석했다. 저녁까지 종일 이어진 회의에서 각 계열사의 주요 경영 문제가 논의됐다. 확대경영회의는 8월 이천포럼, 10월 CEO 세미나와 함께 SK그룹 최고경영진이 모여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연례회의다.
이날 회의에서는 SK그룹 자금 사정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근 4대 그룹 모두 현금·현금성자산이 늘어난 가운데 SK그룹만 부채비율이 악화된 것으로 집계됐다. 부채비율은 삼성그룹이 2021년 36.5%에서 2022년 34.4%로, 현대차그룹이 67.1%에서 65.7%로, LG그룹이 102.8%에서 94%로 각각 개선됐다. 하지만 SK그룹은 76.6%에서 86.2%로 악화됐다. 이 기간 SK하이닉스는 부채비율이 44.7%에서 52.6%로 높아졌다.
결국 핵심은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다. 최근 2분기 연속 5조원 규모 누적적자를 기록한 SK하이닉스의 자금 조달 우려부터 커지고 있다. 업계에선 올해 SK하이닉스가 10조원 이상 적자를 피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SK하이닉스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최근 금리 인상으로 SK하이닉스가 부담해야 할 이자가 커졌다. 올 1분기 이자비용만 2142억1600만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954억1200만원)보다 220% 증가했다. 차입금 역시 같은 기간 11조원 이상 늘어난 28조7600억원에 달한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SK하이닉스는 차세대 반도체 투자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인텔에서 인수한 솔리다임 잔금 20억달러(약 2조5660억원)를 2025년까지 내야 한다. 이날 회의에 입장하던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현재 솔리다임 적자는 걱정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일찌감치 유동성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올 1분기에 회사채 1조6949억원을, 지난 4월에는 교환 사채를 발행해 2조2377억원을 확보했다. 최근 하나은행에서 2000억원 안팎의 자금을 대출받기도 했다. SK 하이닉스 측은 “선제적으로 자금을 충분히 조달해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며 “최근 인공지능(AI)발 호재로 고대역폭 메모리 등을 중심으로 메모리 업황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최근 주목되는 일이 벌어졌다. SK이노베이션이 1조18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한 것이다. 신성장 사업 투자를 미룰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이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정유·석유화학 업황 악화에 돈줄이 말라붙은 영향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6월 말 이사회를 열고 1조18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안건을 의결했다. 예정 발행가액은 1주당 14만3800원이며 신주 발행 수는 819만주(증자 비율 8.7%)에 달한다. 최종 발행가액은 9월 중 확정될 예정이며 주주 배정 이후 실권주는 일반 공모까지 거칠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유상증자는 주가 하락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유상증자를 통해 주식의 총수가 늘어나면 주주가치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하는 자금으로 회사가 성공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경우에는 긍정적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번 SK이노베이션 유상증자를 두고는 당장의 자금난으로 재무구조 개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의 유상증자 발표는 주력인 정유·석유화학 업황이 하반기에도 반등할지가 불확실한 가운데 탄소 배출이 많은 기존 업종들의 녹색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으로 해석된다.
SK이노베이션은 올 1분기 매출 19조1429억원, 영업이익 3750억원을 기록했는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77.3% 감소했다. 지난해 4분기 6833억원의 영업적자를 낸 직후 영업이익으로 전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익이 크게 줄었다. 이로 인해 SK이노베이션 부채는 지난해 말 43조9766억원에서 올 1분기 말 47조4093억원으로3조원 넘게 늘었다.
이런 가운데 탄소포집(CCUS·에어레인), 수소(아모지), SMR(테라파워) 같은 신사업에 추가로 투자가 필요해지자 사업 지연을 막기 위해 유상증자를 결정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이 부천대장신도시에 구축하고 있는 그린캠퍼스도 추가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린캠퍼스는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지오센트릭 등 계열사 7곳이 입주해 연구인력 3000명이 근무할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은 공시를 통해 “이번 유상증자는 시설자금에 4185억원, 채무 상환에 3500억원, 타 법인 증권 취득에 4092억원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이 1조원이 넘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한다는 소식에 주가는 곧장 급락했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주주들의 반발을 의식해 자사주 소각 등 주주가치 제고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증권사들은 이번 유상증자의 지분 희석과 채무 상환 목적이 주가에는 악재로 작용하지만 그 영향은 단기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자회사인 배터리 제조사 SK온도 여전히 분기 적자를 기록 중이고 지난해 적자만 1조원이 넘는다. 상장을 위해 지난해 말부터 꾸준히 자금을 모아 현재까지 6개월 새 확보한 금액은 8조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말 SK이노베이션이 SK온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며 2조원을 출자했고 상장 전 지분투자(프리 IPO)를 통해 한국투자PE에서 1조2000억원, MBK컨소시엄에서 1조500억원, 사우디아라비아 SNB캐피탈에서 1900억원을 확보했다. 이달 초에는 싱가포르 재무적 투자자로부터 5300억원 투자도 유치했다. 여기에 유로본드 발행으로 1조2000억원, 현대차·기아에서 2조원(차입)도 모았다.
급한 불은 껐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올해 SK온의 설비투자 계획만 7조원이고 전략투자 계획 3조원까지 더하면 투입할 돈만 10조원에 달한다. 향후 2차전지 시장 상황에 따라 자금을 추가로 조달해야 할 수도 있어 8조원 남짓한 현금만으로는 모자라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달한 자금의 이자 문제도 적잖다.
SK 관계자는 “올 초만 해도 SK온의 흑자 전환은 내년은 돼야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배터리 수율(정상품 비율)이 오르고 있고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보조금 문제도 일정 부분 해결돼 당장 2분기 흑자 전환을 예상하는 증권사들도 있다”며 “지금은 자금 사정보다 하반기 미·중 갈등 등 지정학적 이슈가 더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특히 SK온은 최근 미국 완성차업체 포드와 함께 만드는 배터리 합작사 블루오벌SK가 미국 정부에서 12조원 규모의 정책자금 차입을 잠정 승인받았다고 밝혔다. 이르면 연내 최종 승인이 이뤄질 전망으로 연간 120만 대의 전기차에 탑재할 수 있는 배터리 공장 건설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기마다 실시하는 그룹 차원 회사채 발행은 계속될 전망이다. 다만 기존 단기채를 상환 의무 부담이 적은 장기채로 상환하면서 재무구조를 조금씩 호전해간다는 전략이다. SK그룹은 자금 사정 개선을 토대로 미래 성장동력인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 중심 투자 진행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일단 최태원 회장은 미·중 경쟁과 세계 경기침체 등 각종 위험 변수와 기회 요인에 맞춰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 플래닝’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경영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 우리는 과거 경영 방법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글로벌 전환기에 살고 있다”며 “미·중 경쟁과 이코노믹 다운턴, 블랙스완 등 예기치 못한 위기 변수들은 물론 기회 요인에 대응하기 위해 시나리오 플래닝 경영을 고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축구 선수들이 여러 상황에 맞는 세트 플레이를 평소에 반복 연습하면 실전에서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골로 연결시킬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SK그룹 역시 다양한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 가능할 수 있도록 전사 시스템과 모든 임직원들의 역량을 높여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 회장은 구체적으로 “그동안 추진해온 파이낸셜 스토리에 향후 발생 가능한 여러 시나리오에 맞춰 조직과 자산, 설비투자, 운영비용 등을 신속하고도 탄력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경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SK 파이낸셜 스토리는 매출과 영업이익 등 기존 재무 성과뿐 아니라 시장이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목표와 구체적 실행 계획을 담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고객, 투자자, 시장 등 이해관계자들의 신뢰를 이끌어내 성장을 가속화하는 전략이다.
최 회장은 이와 관련해 “기업을 둘러싼 국내외 경영환경은 어느날 갑자기 변하는 게 아니라 크고 작은 징후가 나타나면서 서서히 변한다”며 “그때마다 즉각적이고도 체계적 대응에 나설 수 있도록 SK 구성원들이 충분히 훈련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전략 재점검도 주문했다. 최 회장은 “글로벌 시장은 옛날 같은 하나의 시장이 아닌 다양한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시장이 됐다”며 “그 시장 하나하나에 SK의 의미와 상황을 담아낼 필요성이 생겼다”고 언급했다. 특히 그는 “SK 관계사별 대응은 힘들기도 하고 속도도 잘 나지 않을 것”이라며 “그룹 차원에서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등 각 시장별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자금 사정을 에둘러 말했지만 세트플레이식으로 계열사가 합심해 접근하지 않으면 자금 사정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매일경제 산업부 서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