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침체 위기 돌파라는 막중한 미션을 받은 4대 그룹 경영진들의 인사가 완료됐다. 2022년 인사에서는 삼성과 SK, LG그룹에서 오너가 출신이 아닌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했다.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능력과 성과만으로 평가해 불황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를 선발했다는 게 2022년 대기업 정기 임원인사의 특징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2월 5일 이영희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총 7명의 사장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삼성에서 오너 일가가 아닌 여성 사장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영희 사장은 그동안 삼성전자에서 가장 유력한 최초 여성 사장 후보로 거론돼왔다. 그는 유니레버, 로레알 출신의 마케팅 전문가로 2007년 삼성전자 마케팅 담당 임원으로 발탁됐다. 2012년 부사장으로 승진한 후 10년째 부사장직을 유지했다. 이 신임 사장은 갤럭시 시리즈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삼성전자의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 측은 “역량과 성과가 있는 여성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켜 여성 인재들에게 성장 비전을 제시하고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평소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모셔오고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회장 취임 일성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엄중하고 시장은 냉혹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앞서 준비하고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창업 이래 가장 중시한 가치가 인재와 기술이다.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모셔오고, 양성해야 한다.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LG그룹은 최근 정기 임원 인사에서 18년간 LG생활건강을 이끈 차석용 부회장 후임으로 이정애 사장을 발탁했다. 이정애 사장은 1986년 LG생활건강으로 입사해 2015년 그룹 공채 출신 첫 여성 부사장이 된 데 이어 국내 5대 그룹을 통틀어 비오너가 출신의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이 사장은 취임 후 첫 임직원 인사에서 ‘소통’을 강조했다. LG생활건강은 이 사장이 지난 12월 6일 오후 사내 게시판 및 임직원들에게 발송한 문자 메시지를 통해 공개한 첫 인사 영상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며 “구성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 얘기를 귀담아 듣는 것부터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사장은 임원, 부문장, 팀장 등 조직 리더들에겐 “상황과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설명하고 설득해서 우리 구성원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마음을 같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 사장은 사내 구성원들에게 “우리 모두가 회사를 위한다는 생각을 경계하고 나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으면 좋겠다”며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회사나 타인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은 의욕을 잃게 하고 보람과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게 하기 때문에 나의 일을 통해 의미와 보람도 찾고 자신의 시장 가치도 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마지막으로 임직원들에게 “저에게는 1만2000명의 든든한 뒷배, 여러분이 있다”며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마음으로 저와 함께해주실 것을 믿으며 고객, 소비자, 여러분을 바라보고 진솔하게 소통하며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다”고 덧붙였다. 여성 CEO 시대를 연 것은 삼성과 LG만이 아니다. 유통, IT 분야에서도 연말 인사에서 여성 CEO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SK 창사 이래 첫 ‘여성 CEO’ 타이틀은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의 안정은 최고운영책임(COO)이 차지했다. 11번가는 ‘신임 최고경영자(CEO)에 안정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내정했다’고 밝혔다.
안 신임 대표는 야후코리아, 네이버, 쿠팡, LF 등을 거친 e커머스 서비스 기획 전문가로 11번가에는 지난 2018년 신설법인 출범 시기에 합류해 서비스 총괄 기획과 운영을 담당했다. 오늘날 국내 전자상거래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아온 이커머스 기획자인 만큼, 11번가의 여러 서비스에도 안 내정자의 노하우가 녹아 있다. 일례로 글로벌 이커머스 기업 ‘아마존’과 협력해 성사한 해외직구 서비스 아마존 글로벌 스토어, 상품 후기를 동영상으로 제작해 공유하는 서비스 ‘꾹꾹’ 등이 안 내정자의 진두지휘하에 만들어졌다. COO로 취임한 이후로는 익일배송 서비스 ‘슈팅배송’, 마이데이터 서비스 ‘머니한잔’ 등 신규 서비스 기획에 참여했다.
현대차는 외국인 사장을 다시 한 번 발탁하면서 능력 우선주의 인사 기조를 이어갔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고창조책임자(CCO)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대표이사와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글로벌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 장기화에 대비한 위기 대응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고 성과 기반의 핵심 인재 발탁과 함께 미래 모빌리티 전략 컨트롤타워를 신설한 것이 핵심이다.
벤틀리 수석디자이너 출신인 동커볼케 사장은 2016년부터 현대차그룹에 합류해 현대차와 기아, 제네시스 차량 디자인과 미래 항공 모빌리티(AAM) 같은 미래 모빌리티 관련 고객 경험 디자인을 이끌어 왔다. 선행 디자인, 콘셉트 디자인을 통해 현대차·기아·제네시스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명확히 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미국 뉴욕에 설치된 ‘제네시스 하우스 뉴욕’ 같은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총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의 외국인 사장은 호세 무뇨스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와 동커볼케 사장 등 2명이 됐다. 현대글로비스 대표이사에는 재무, 해외 판매, 프로세스 혁신 등 다양한 경험과 글로벌 역량을 보유한 현대차 프로세스혁신사업부의 이규복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 내정했다.
이규복 부사장은 유럽 지역 판매법인장과 미주 지역 생산법인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경험한 재무, 해외 판매 기반의 전략 기획 전문가다. 수익성 중심 해외 권역 책임 경영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현대차그룹의 지속 가능한 미래 성장을 위한 프로세스 전반의 혁신을 담당해 왔다.
현대차그룹은 핵심 사업 간 연계 강화를 통한 미래 모빌리티 그룹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기 위해 글로벌 전략 오피스(GSO)도 신설하기로 했다. 2022년 연말 인사에서는 1970년대생 젊은 리더들의 발탁도 눈에 띈다. 조직을 젊게 만들면서 의사소통 과정을 신속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개발 수장을 퀄컴 출신 최원준 부사장으로 교체했다. 삼성전자는 최원준 전략제품개발팀장(부사장)을 개발실장으로 선임했다. 최 부사장은 무선통신 전문가로 꼽힌다. 5세대(5G) 스마트폰과 차세대 통신 시장에서 삼성 주도권을 견고히 하고 폴더블폰 대중화를 앞당기려는 인사로 풀이된다. 최 부사장은 외부 영입 인재여서 주목된다.
그동안 삼성전자 핵심 요직인 무선 개발실장은 삼성전자 출신 인물이 주로 도맡았다. 이번에는 ‘삼성 순혈주의’보다 능력과 성과 위주의 인사 철학이 반영됐다. 1970년대생 무선 개발실장이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 개발실장보다 5살 젊다. 고동진 고문(전 사장), 노태문 MX사업부장 모두 개발실장을 거쳐 MX사업부장 자리에 앉았다.
LG도 젊은 임원들을 등용했다. 이번 인사에서는 변화에 민첩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젊고 추진력 있는 인재들이 대거 발탁됐다. 2021년에 이어 2022년도 전체 승진자 가운데 70% 이상이 신규 임원이다. 새로 임원으로 승진한 사람 114명 가운데 92%가 1970년 이후 출생자로, 최연소 임원은 1983년생인 LG전자 우정훈 수석전문위원(상무, 39세)이다. 우정훈 위원은 데이터 기반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주도하며 데이터 플랫폼 구축, 스마트 가전 및 ThinQ 앱의 성능 향상 등에 기여한 공로로 발탁 승진했다.
SK하이닉스는 사내 의사결정 체계를 축소해 경영판단의 스피드와 유연성을 높이기로 했다. 기존 안전개발제조담당과 사업담당 조직을 폐지하고, CEO와 주요 조직 경영진 간 의사결정의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1980년생 박명재 담당을 차세대 기술인재로 발탁했다. 성과와 잠재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발탁된 이들 신규 리더들은 베테랑 선배 CEO들과 함께 경제 위기를 돌파해나가기 위해 힘을 모을 예정이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2022년 인사에서는 베테랑 CEO들이 상당수 유임됐다. 삼성전자는 12월 5일 이재용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실시한 사장단 인사에서 기존 한종희 부회장(DX부문장)과 경계현 사장(DS부문장)의 2인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했다. 엄중한 경영 현실을 감안해 ‘변화’보다는 그동안 두 사업부문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온 두 대표이사를 중용해 경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앞서 지난 12월 1일 임원인사를 발표한 SK그룹 역시 ‘안정 속 미래 대비’ 기조가 뚜렷했다. 최태원 회장의 핵심 브레인으로 불리는 장동현 SK㈜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정호 SK스퀘어·SK하이닉스·SK텔레콤 부회장이 모두 자리를 지켰다. 이들 세 명의 부회장은 그룹 컨트롤타워인 SK 수펙스추구위원회에서 담당했던 위원장 자리를 후배에게 맡기고 나와 현장 경영에 집중한다. 투자형 지주사(장동현)와 에너지·화학·배터리 사업 지주사(김준), ICT사업 지주사(박정호)의 3대 축을 유지해 불확실성을 최소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부 계열사 CEO나 CFO에 젊은 경영진을 배치해 경험을 쌓도록 하며 중장기적 세대교체에 대비했다.
LG그룹도 차례로 발표한 2023년 임원인사 결과 지주·배터리·화학·유통을 이끌던 4명의 부회장 중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과 권봉석 ㈜LG 최고운영책임자(COO) 부회장,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모두 자리를 지켰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변화를 최소화하는 소폭 인사를 택했다. 장재훈 현대자동차 사장, 송호성 기아 사장, 조성환 현대모비스 사장, 안동일 현대제철 사장 등 주력 계열사 대표이사들은 모두 자리를 유지해 안정을 꾀했다. 오찬종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