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서열 43위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차남 조현범 사장 승계 구도 | 조양래 회장 지분, 차남 조현범 사장 넘겨받아… 지분다툼·재판리스크 넘어 신사업 강화할까
박윤구 기자
입력 : 2020.07.27 15:02:34
수정 : 2020.07.27 15:02:52
재계 서열 43위 한국테크놀로지그룹(옛 한국타이어그룹)이 전격적으로 경영권 승계 작업에 돌입해 그 배경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범효성가(家)로 분류되는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자산총액만 9조4000억원에 달하며 한국아트라스BX, 한국네트웍스, 한국카앤라이프 등 24개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조양래 회장이 지난 2018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이후 장남인 조현식 부회장과 차남인 조현범 사장이 각각 지주회사, 사업회사를 나눠 맡으면서 형제 경영을 펼쳐왔다. 그러나 지난 6월 26일 조 회장이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지분 매각을 통해 차남인 조현범 사장을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판교 본사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이란
한국 최초의 타이어 전문기업인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옛 한국타이어)의 역사는 해방 이전인 194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태인 조선다이야공업은 서울 영등포 공장에서 하루 300여 개의 타이어를 생산하며 국내 타이어 시장을 개척했고 1951년 한국다이야제조로 이름을 바꿨다. 1967년 효성그룹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 인수해 효성그룹으로 편입됐지만 1985년 계열 분리를 통해 차남인 조양래 회장이 경영권을 쥐고 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다. 조홍제 창업주는 삼형제에게 주력 사업을 하나씩 승계하고 일찌감치 독립경영의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성공적인 경영권 승계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양래 회장은 1992년 서울 역삼동 테헤란로 사옥으로 본사를 이전하고 1999년 한국타이어로 사명을 변경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2012년 9월에는 한국타이어를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 사업회사인 한국타이어로 인적분할하며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지난해에는 타이어 제조업체에서 혁신 기술 개발업체로 도약하기 위해서 한국테크놀로지그룹과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로 지주회사, 사업회사의 사명을 변경했다. 올해 들어서는 혁신기업들이 몰려있는 판교 테크노밸리로 본사를 이전하고 미래 먹거리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는 한국 현재 4개 글로벌 지역본부와 30여 개 해외지사, 8개 생산시설, 5개 연구개발(R&D) 센터 등을 운영하면서 180여 개국에 타이어를 생산·판매하고 있다. 북미와 유럽 등 해외 매출 비중이 80%를 넘어서며 국내 타이어 시장 점유율은 30%대로 알려져 있다. 벤투스, 키너지, 다이나프로, 윈터아이셉트, 스마트, 밴트라 등 6개 상품 브랜드를 구축했고 최근에는 테슬라와 포르쉐에 전기차용 타이어를 납품하고 있다.
조현식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총괄부회장,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
▶조양래 회장 오너 일가는
조양래 회장은 홍긍식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의 딸인 홍문자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2남 2녀를 뒀다. 1970년생 장남 조현식 부회장은 미국 시러큐스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일본 미쯔비시 상사에 근무하다가 1997년 한국타이어(현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경영혁신팀 부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해외영업본부장과 마케팅본부장, 경영기획본부장 등을 거쳐서 2017년 말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현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총괄부회장으로 승진했다.
1972년생인 차남 조현범 사장은 미국 드와이트엥글우드고등학교와 보스턴칼리지 재정학과를 졸업하고 1998년 한국타이어에 입사했다. 광고홍보팀장과 마케팅본부장, 경영기획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영업과 마케팅, 경영기획 분야에서 두루 경험을 쌓았다. 2011년 12월 사장으로 승진했고 2017년 말에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로 잘 알려진 조현범 사장은 최근 하청업체로부터 수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추징금 6억원을 선고 받았는데, 최근 열린 항소심에서 검찰은 조 사장에게 징역 4년과 추징금 6억원을 구형했다.
장녀인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은 1966년생으로 오랜 기간 사회공헌활동을 펼치면서 시민사회단체에 발이 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년생인 차녀 조희원 씨는 그룹 내에서 별도의 직책을 맞지 않고 가정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은둔형 경영자로 꼽히는 조양래 회장은 꼼꼼하고 검소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데, 효성그룹의 보수적인 가풍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전격적인 지분 매각, 차남 최대주주 지위로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은 지난 6월 26일 시간 외 대량매매(블록딜) 형태로 그룹 지분 전량(23.59%)을 차남인 조현범 사장에게 매각했다. 이에 따라 조현범 사장이 기존 보유 지분 19.31%에 부친 조양래 회장 지분을 더해 42.9%로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본래 조현식 부회장과 조현범 사장의 그룹 지분율은 19.32%, 19.31%로 거의 차이가 없었는데, 조양래 회장의 매각 결정으로 대세를 뒤바꿀 수 없을 정도로 큰 격차가 벌어졌다.
재계에서는 조현범 사장이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대표이사직을 사임하면서 조현식 부회장에게 무게가 실리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러나 조현범 사장은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직과 등기이사직은 물론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최고운영책임자(COO·사장)까지 유지하며 그룹 경영 전반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분 매각 직후에는 장녀인 조희경 이사장(지분율 0.83%)과 차녀 조희원 씨(10.82%)가 장남인 조현식 부회장을 지지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경영권 분쟁설이 확산됐다. 이로 인해 유가증권시장에서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주식 거래량이 급증했고 6월 말에는 주가가 장중 한때 1만5900원까지 뛰었다. 조현식 부회장이 두 누나와 함께 손잡고 국민연금(6.24%)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면 한진그룹처럼 지분 경쟁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글로벌 전략 브랜드 ‘라운펜’
같은 달 30일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이 “최대주주에 대한 변경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이 형제 경영에는 변화가 없을 예정”이라며 “조현식 부회장은 그룹 부회장직을, 조현범 사장은 그룹 최고운영책임자(COO)와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직을 기존대로 유지한다”고 밝히면서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 장녀인 조희경 이사장을 중심으로 3남매가 조 사장의 지분 인수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회사 안팎이 술렁였다. 이들은 지난해 말에 열린 가족회의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 조양래 회장 지분을 재단에 기증하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분 매각 이후 한 달이 지나서도 조희경 이사장이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서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주가는 1만1000원대로 다시 떨어졌다. 특히 차녀인 조희원 씨가 그룹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 참여할 의지가 없다는 입장을 회사 측에 거듭 밝히면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조희경 이사장이 다시 행동에 나선다 해도 3남매의 보유 지분(30.97%)에 국민연금(6.25%)을 합쳐도 조현범 사장(42.9%)과의 지분율 격차가 적지 않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디자인랩
▶장남 조현식 ‘타이어’ vs 차남 조현범 ‘신사업’
재계에서는 지난 수년간 조현식 부회장, 조현범 사장 형제가 공동 경영을 펼쳐왔는데, 갑작스럽게 조양래 회장이 차남인 조현범 사장에게 지분을 넘긴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조 부회장과 조 사장이 주요 분야를 번갈아가면서 맡아왔는데 아무런 전조 없이 지분 매각이 이뤄져 의아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며 “조 부회장도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룹 내 역할 분담과 입장 정리가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변수가 남아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안팎에서는 새로운 먹거리 사업 발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조양래 회장이 일찌감치 차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장남인 조현식 부회장은 그동안 글로벌 완성차, 타이어 업황 부진에 대응하기 위해 그룹의 본연인 타이어사업 역량을 강화하는 데 치중해왔다. 올 들어서도 신사업 관련 부서를 일부 재편하고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며 내실 다지기에 주력했다. 또한 2015년 대규모 리콜 사태로 거리가 멀어진 현대자동차와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 ‘현대차그룹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 건립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조현범 사장은 형과 달리 인수합병(M&A)과 신사업 개발 등을 통해 새로운 미래 동력을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 2017년 호주 최대 타이어 유통업체 작스 타이어즈 인수, 2018년 독일 3대 타이어 유통업체 라이펜 뮐러 지분 매입 등을 통해서 타이어 제조에서 유통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지난해 혁신 기술기업을 표방하며 지주회사 사명을 한국테크놀로지그룹으로 변경한 것 또한 조 사장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건축 분야 세계 최고의 상으로 꼽히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영국 출신 노먼 포스터를 섭외해 판교 테크노플렉스에 새 본사를 마련하는 등 기업문화 혁신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판교 본사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향후 과제는
후계자로 낙점 받은 조현범 사장이 형인 조현식 부회장과 ‘형제 경영’을 계속 이어가면서 경영권 승계 논란은 마무리됐지만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지난해 주력 회사인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영업이익은 글로벌 경쟁 심화 여파로 인해 직전연도 대비 22.7% 감소한 5429억원을 기록했다. 2016년 영업이익 1조1032억원과 비교하면 3년 새 반토막이 났다. 올해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국내외 주요 공장이 완성차업체 가동률 저하로 잇따라 멈춰 선 데다 이동 수요가 줄면서 교체용 타이어 판매까지 부진에 빠진 탓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2017년 1억 대에 육박했던 글로벌 자동차 판매량은 2018~2019년 2년 연속 하락했고 올해는 7879만 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량이 8000만 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2012년 이후 처음이다.
최근 미국 상무부가 한국과 대만, 태국, 베트남에서 수입하는 자동차 타이어를 대상으로 반덤핑 관세·상계 관세 부과를 위한 조사에 착수하면서 수출길마저 흔들리고 있다. KOTR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한국산 타이어 수입액은 11억9854만달러로, 미국 수입 타이어 시장에서 태국(17%)과 멕시코(12%)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점유율(10%)을 기록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는 미국 테네시주에 위치한 현지 공장 생산량을 늘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출하는 물량을 줄이는 등 공급망 개편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한때 50%에 육박했던 국내 타이어 시장 점유율을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는 과제도 남아있다. 최근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내수시장 점유율은 30%대까지 떨어지면서 2위인 금호타이어와 격차가 거의 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는 글로벌 전략 브랜드 ‘라운펜’의 트럭·버스용 타이어를 국내에 출시하고 타이어 라인업을 제품 성향에 맞춰 6개로 재분류하는 등 판매 전략을 재구축하고 있다. 이밖에 최대주주인 조현범 사장의 재판 리스크도 변수로 남아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5억원 이상 횡령·배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영진은 회사 복귀가 금지된다. 재판 결과에 따라 조 사장은 회사 경영권에서 손을 떼고 최대주주로서의 역할만 할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항소심에서 형량이 늘어나 법정 구속을 당한다면 경영활동에 공백이 생기고 회사 지배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