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팬데믹 공포로 확대된 지난 3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이어졌다. 경기하강과 실적악화 등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환경 속에도 기업들의 성과와 미래사업에 대한 비전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인 만큼 주총에 대한 주주들의 관심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위험성이 정통으로 관통한 시기인 만큼 주주총회 현장은 예년과는 달라진 분위기였다. 지난 3월 18일 수원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한 진행요원 수십여 명이 주주들의 입장 전에 발열을 체크하고 사전 방역작업에도 나섰다. 예년처럼 수십 미터 줄을 서서 입장하는 분위기와 다르게 한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000여 명이 참석했던 지난해 주총과 달리 참석자는 약 400여 명에 그쳤다.
현대차는 지난 19일 서울 양재동 본사 사옥 대강당에서 이원희 사장 주관으로 제52회 정기 주주총회를 개최했다. 주총장 입구에서 발열 체크를 진행하고 TV로 주총을 볼 수 있는 대기공간도 마련했다. 오전 9시부터 진행된 이날 참석자는 약 140명가량으로 800석 규모 강당에 좌석은 몇 개씩 띄워 앉아 마스크를 쓴 주주들의 눈이 반짝였다. 현대차는 올해 처음 도입한 전자투표를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SK텔레콤은 아예 동영상 중계와 전자투표를 통해 주주총회를 진행한다. SK텔레콤은 오는 3월 26일 서울 본사 수펙스홀에서 열리는 정기 주총을 실시간 동영상으로 온라인 중계한다. 최고경영자(CEO) 등 경영진이 현장에서 온라인으로 받은 주주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이다. 온라인 주주총회에서는 현장만 볼 수 있어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전자투표를 통해 사전 투표를 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주주총회의 전자투표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달 상장 계열사 전체에 대해 전자투표제도 도입을 완료했다. 지난해부터 전자투표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주주들이 더 많이 전자투표에 참여토록 독려하기도 했다.
포스코그룹 역시 올해 정기 주주총회부터 전체 상장사에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 기존 포스코와 포스코인터내셔널, 포스코케미칼, 포스코ICT, 포스코엠텍뿐 아니라 포스코강판까지 확대 적용된다.
▶실적악화 위기감 속 신사업 기대 확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환경의 위기감은 주주총회 장에서도 감지됐다.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IM부문장) 역시 “올해 스마트폰 시장은 코로나19 여파로 위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현석 삼성전자 CE부문장(사장)은 “(코로나19) 초기에는 중국에서 부품조달 문제가 일부 있었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생산에 차질이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코로나19가 유통이나 소비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파악을 못했고 더 많은 연구를 통해 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희 현대차 사장은 주주총회에서 “코로나19 글로벌 확산에 따른 경기 침체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자동차 산업은 신흥국의 소폭 반등 예상에도 불구하고, 미국·유럽 등 선진 시장의 부진이 지속되면서 전반적인 산업수요 감소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상반기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어닝쇼크를 기록할 것이란 예상이 커지는 가운데 신사업 확대를 통해 활로를 돌파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먼저 삼성전자의 경우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초격차 기술 확대 의지를 밝히는 한편 퀀텀닷 디스플레이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김기남 사장은 이에 대해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2030년까지 연구개발(R&D), 생산 설비에 133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며 퀀텀닷 디스플레이는 사업을 본격 추진하면서 2025년까지 13조원을 투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이달 26일 열리는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통신판매 및 전자상거래 관련 사업’을 정관에 추가할 예정이다. 이 사업은 소비자 편의성을 한층 끌어올리고 자사 인공지능(AI) 분야를 고도화시키겠다는 전략을 엿볼 수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8월 스마트폰으로 가전제품 제어가 가능한 AI 기반의 ‘LG 씽큐’ 앱에 음성인식 서비스를 추가한 바 있다. 이외에 세탁기와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에 소모품이나 주요 식료품 등이 떨어지는 시기가 다가오면 알아서 주문해주는 AI 기능 개발에도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앞서 LG전자는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자동 주문 시스템인 ‘아마존 대시’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소비자들은 아마존 대시를 통해 소모품을 일일이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 기기가 알아서 소모품 잔량을 파악해 아마존에서 주문해준다. 현대차는 차세대 모빌리티 사업을 미래먹거리로 낙점했다. 정관에 ‘기타 이동수단’ 항목을 추가해 사업목적에 ‘각종 차량과 동 부분품의 제조판매업’을 ‘각종 차량 및 기타 이동수단과 동 부분품의 제조판매업’으로, 기타 이동수단을 추가해 명기했다. ‘전동화 차량 등 각종 차량 충전 사업 및 기타 관련 사업’도 신설했다. 이는 그룹의 미래전략인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의 전환을 본격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타 이동수단’이란 사업목적 항목 추가는 자율주행과 인공지능(AI)을 비롯해 차량공유, 수소전기차 등이 접목된 분야에서 현대차의 미래를 책임질 사업을 반드시 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요그룹 계열사들의 신규 사업들도 눈에 띈다. 앞서 지난 3월 18일 삼성SDS는 ‘전자금융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하는 정관변경 안건을 의결할 예정이었으나 ‘사업방향성에 대한 추가검토’가 필요하다며 지난 11일 안건 철회 공시를 낸 바 있다. 삼성SDS의 전자금융업 관련 사업에 대한 비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금융결제원에서 제공하는 오픈 API(응용프로그래밍인터페이스)를 활용해 데이터·플랫폼 기반의 신규 금융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SK하이닉스는 사업목적에 ‘평생교육 및 평생교육시설 운영업’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올해 3년째를 맞은 ‘반도체 아카데미’를 강화해 협력사 상생프로그램으로 활성화시킨다는 계획이다.
현대자동차 직원이 입장 주주들을 대상으로 발열 체크를 하고 있다.
▶은행권 CEO 연임 여부 주목, 국민연금 반대에도 강행하나
은행권 주주총회의 주요 화두는 최고경영자(CEO)의 연임 여부다. 최근 DLF와 라임 사태가 이어지며 은행에 대한 불신이 커진 가운데 국민연금이 CEO에 대한 연임 반대 의견을 낸 곳들이 적지 않아 그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먼저 지난 20일에 열린 하나금융지주 주총에서는 국민연금 반대에도 사외이사 선임 안건을 모두 통과시킨 바 있다. 앞서 하나금융 지분 9.89%를 보유한 국민연금은 ‘기업가치 훼손’ ‘주주권익 침해행위에 대한 감시 의무 소홀’ 등의 이유로 사외이사 연임 건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외국인 주주를 포함한 나머지 주주들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결국 연임으로 가닥이 잡혔다. 8인의 사외이사(윤성복, 박원구, 백태승, 김홍진, 양동훈, 허윤, 이정원, 차은영)가 전원 연임에 성공했고, 이에 따라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도 현 체제를 유지할 전망이다.
3월 25일 열리는 우리금융지주의 주주총회에서는 손태승 회장이 연임에 성공할지 여부가 화두다. 우리금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도 손태승 회장 연임 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우리금융 지분 7.89%를 보유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손 회장이 금융당국에 중징계를 받으면서 연임이 사실상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앞서 금감원은 우리은행이 DLF를 불완전판매한 배경에 경영진의 부실한 내부통제가 있다고 보고 손 회장에게 문책 경고 처분을 내렸다. 문책 경고 이상의 중징계를 받으면 3년 동안 금융권 취업을 하지 못한다. 손태승 회장은 금감원의 처분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금감원의 징계 효력이 정지됐다. 손 회장은 일단 오는 25일 열리는 우리금융 주주총회에서 연임 승인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본안 소송 결과가 확정되려면 대법원까지 거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단 금감원에서 법원의 결정에 항고해 상급심 판단을 다시 구할 가능성도 있다.
3월 26일 열리는 신한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는 조용병 회장의 연임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국민연금은 앞서 취업비리 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조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 권익 침해 이력이 있다고 판단해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다만 국민연금의 반대의견에서 관련 업계에서는 20%가 넘는 우호지분 때문에 조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예상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강성부 KCGI 대표
▶주주연합 vs 조원태 연합 지분전쟁, 한진칼 조원태 회장 연임 여부 촉각
올해 주총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기업은 한진칼이다. 주주연합과 조원태 연합의 표 대결로 조원태 회장의 퇴진 여부가 갈릴 것으로 보이는 한진칼의 주주총회는 3월 27일 오전 중구 한진빌딩 본관에서 열린다.
이날 주주총회에서는 감사보고, 영업보고, 최대주주 등과의 거래내역 보고 등에 이어 재무제표 승인건, 사외이사 선임건, 사내이사 선임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건, 정관 일부 변경의 건 등을 의결하게 된다. 최대 관심 사안은 역시 한진칼 이사회가 낸 조원태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건이다.
지난해 대한항공의 주총에서 고(故)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되는 뼈아픈 경험을 한 한진그룹 측은 노조와 전직임원회 등까지 조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며 조 회장의 연임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상태다.
이에 맞서는 3자 연합은 조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조 회장 측은 이번 주총에서 의결권이 유효한 지분을 기준으로 특수관계인을 포함한 지분 22.45%와 그룹 ‘백기사’ 델타항공의 지분 10.00%를 확보했다. 대한항공 자가보험과 사우회 등이 보유한 지분 3.80%와 GS칼텍스가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0.25%, 중립에서 다시 ‘백기사’로 입장을 선회한 카카오(1.00%)까지 포함하면 총 37.50%를 확보한 셈이 된다. 반면 의결권 지분 기준으로 3자 연합은 조 전 부사장(6.49%), KCGI(17.29%), 반도건설(8.20%)의 지분을 합해 31.98%를 확보한 상황이다. 근소한 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양측 모두 소액주주와 사실상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2.9%)을 비롯한 기관 투자자에 표심을 얻기 위해 여론전에 나서고 있다. 지난 2월 20일 주주연합의 대표자격으로 강성부 KCGI 대표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조원태 회장을 ‘전교 꼴등하던 아들’에 비유하며 경영 실패를 강조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대한항공의 에어버스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조 회장이 연루됐다고 주장하는 등 비난 수위를 높였다. 최근에는 한진칼이 의결권 위임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주주들에게 상품권 등을 제공했다며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한진그룹도 이에 강력히 맞서고 있다. 주주연합이 제시한 이사 후보군의 이해 충돌 우려를 지적하는 한편 리베이트 의혹에도 선을 그으며 명예훼손에 대해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외에도 한진그룹은 주주연합 측에 선 권홍사 반도건설 회장이 작년 말 조 회장을 만나 그룹 명예회장직을 요구한 사실을 공개하며 지분 보유목적 허위 공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사들의 견해는 갈리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과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 국내 자문사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찬성을 권고했지만 서스틴베스트와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반대를 권고해 자문사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분현황이나 분위기를 보면 이번 주총에서는 조 회장 측이 승기를 잡은 것으로 보이지만 향후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양측이 지분 추가매입을 하고 있고 조원태 회장 측에 있는 델타항공이 코로나19로 자금난에 빠질 수 있는 등 변수가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