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세계 e스포츠에서 한국의 위상은 마치 축구에서 영국이나 브라질이 차지하고 있는 그것과 같다. ‘축구 종가’라 불리는 영국이 축구를 스포츠로 체계화하고 리그와 팀을 만든 것처럼 게임을 e스포츠로 발전시킨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또한 세계 프로축구리그 어느 곳에나 선수를 공급할 만큼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하는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한국 선수들은 여전히 e스포츠의 판을 좌지우지하는 에이스로서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e스포츠 시장은 세계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일단 e스포츠를 존재하게 만든 게임 산업은 지난 2017년 기준 국내 시장 규모만 해도 13조1423억원이다. 세계로 시야를 넓혀보면 게임 이용자수는 전체 인구의 1/3에 가까운 23억 명이고, 전체 시장규모는 1349억달러(약 157조원)에 달한다. 이처럼 게임을 즐기는 이가 늘어나면서 e스포츠 시장도 함께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장조사 전문기관 뉴주(Newzoo)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세계 e스포츠 매출액은 9억600만달러(약 1조540억원)다. 이는 전년 대비 약 38.3%나 성장한 수치고, 오는 2021년에는 16억5000만달러(약 1조92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 사회에서 이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산업군을 찾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추후 e스포츠 시장에서 한국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주기는 어렵다. 아직까지 ‘플레이어’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보여주는 한국 e스포츠지만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선수가 줄어들면서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주도권을 미국이나 중국에 뺏길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오고 있다. 이제라도 단순한 ‘플레이어’를 넘어 장기적으로 판을 만들어가는 ‘플래너’가 되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보는 게임’이 대세로
동네 내기 장기에 끼어들어 훈수를 두는 할아버지부터 값비싼 티켓 가격을 지불하고 유럽 챔피언스리그 축구 경기를 보는 관객까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은 없다. 자신이 어떤 놀이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진 남이 플레이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라며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들이나 즐기는 전자오락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게임의 위상을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e스포츠로 끌어올린 단초를 만든 곳은 누가 뭐래도 한국이다. 축구나 야구같은 일반 스포츠부터 바둑, 체스같은 멘털 스포츠까지 중계가 이뤄지는 점에 착안해 게임을 중계한 것이 e스포츠, ‘보는 게임’의 효시나 다름없다.
1990년대 중반에도 북미 등지의 게임쇼에서 이벤트성으로 ‘둠’ 등 고전 FPS를 이용해 대회를 개최한 적은 있다. 하지만 e스포츠의 진정한 시작은 지난 1998년 미국 블리자드가 만든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1997년 외환위기를 넘긴 한국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국내외 게임 산업도 함께 커지기 시작했다. 1999년에서 2000년 초반까지 오프라인 게임 리그들이 활성화됐고, 투니버스가 세계 최초의 게임전문 케이블 채널인 ‘온게임넷’을 개국하는 등 환경까지 조성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보는 시대가 열렸다.
이후 스타크래프트뿐 아니라 다양한 게임을 이용한 e스포츠가 등장하면서 한국을 모델로 삼아 세계 e스포츠가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승부조작 사건 등 어두운 과거가 있고, 여전히 WHO의 게임중독 질병화 지정, 각종 규제 등 넘어야할 벽도 남아있지만 국내에서도 차츰 산업적인 측면에서 e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사들이 5G 대중화 시대의 킬러 콘텐츠로 e스포츠를 점찍으면서 시장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고, 성남과 대전, 광주, 부산 등 지역자치단체들도 e스포츠 상설 경기장 마련 계획을 밝히는 등 정부에서도 진흥 의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 시장은 이보다 더욱 빠르게 게임 시청자들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한국에서 시작된 바람은 이제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기준 전 세계 e스포츠 시장 매출 규모는 북미가 38.0%, 중국이 18.0%고 한국은 약 7%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글로벌 대비 국내 e스포츠 시장 규모는 2015년 18.9%, 2016년 16.8%, 2017년 13.1%로 매년 줄어드는 모양새다.
지난 2015년부터 e스포츠 굴기(우뚝 선다는 의미)를 외친 중국은 거대 IT 공룡들을 앞세우고 있다. 텐센트가 2015년 ‘리그 오브 레전드’를 만들고 서비스하던 라이엇게임즈 지분 100%를 인수하고, 알리바바도 2015년 자회사 알리스포츠를 통해 투자를 늘리며 국제e스포츠연맹(IeSF)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에 자극받은 북미와 유럽도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전통 스포츠 구단들이 e스포츠 관련 투자를 이어가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뉴욕 양키스,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 휴스턴 로케츠, 파리생제르맹 등 스포츠 팬들에게도 익숙한 구단들이 앞다투어 e스포츠 팀을 창단하면서 ‘종합 스포츠 구단’으로 발전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UC버클리, 애크론 대학 등 미국 내 대학들도 운동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e스포츠 리그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향평준화’된 e스포츠
세계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그동안 인구도, 국토도 작은 한국이 e스포츠의 종주국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은 역시 선수들이다. 동네마다 넘쳐나는 PC방 등 게임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난 이들은 세계무대에서까지 최고를 다투는 수준으로 성장해 말 그대로 e스포츠의 얼굴이 되었다. 스타크래프트가 e스포츠 주류를 차지하던 시절에는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 세계 e스포츠 대회인 ‘월드사이버게임스(WCG)’에서도 최초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부와 명성을 얻었고, 그 뒤를 이어 ‘리그 오브 레전드’가 인기를 끌게 된 이후에는 ‘페이커’ 이상혁이 롤드컵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처럼 일부 유능한 개인에게 짐을 지우는 방식으로 왕좌를 영원히 지키기는 어려운 법이다. 실제로 e스포츠 판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세계 최강자 위치에 있던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는 페이커 이상혁을 보유한 SK텔레콤 T1이 유럽 G2 e스포츠와의 4강전에서 1:3으로 패배하며 한국 팀이 2년 연속으로 결승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 프로리그(LCK) 팀들은 상반기에 열렸던 국제대회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에서도 4강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반면 막대한 투자를 해온 여타 대륙의 성장세가 놀랍다.
중국은 지난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e스포츠 분야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와 ‘아레나 오브 베일러(한국명 펜타스톰)’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빠른 성장세를 과시했다. 고액 연봉으로 한국 출신 선수들을 영입하며 세를 키운 중국 프로리그(LPL) 팀들은 세계 대회에서도 더 이상 약체가 아니다. 펀플러스 피닉스(FPX)는 올해 롤드컵 결승에서 유럽 LEC 리그 소속 G2 e스포츠를 3:0으로 완파하면서 세계 최강 자리에 올랐다. 비록 이번에는 우승을 놓쳤지만 G2 e스포츠 역시 MSI 우승에 이어 롤드컵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럽의 자존심을 세웠다.
비단 리그 오브 레전드만의 일이 아니다. ‘오버워치’나 ‘카운터 스트라이크’ 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e스포츠 판에서의 선수들 실력이 상향평준화되면서 한국이 무조건 우승을 차지하는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플레이어’로서만 안주할 시간이 끝나가는 셈이다.
▶가능성 있는 韓 IP 키워야
e스포츠 플레이어로서 경쟁력이 자꾸 떨어진다면 이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어차피 역사가 그리 길지 않고, 유행에 따라 판도가 자주 바뀌는 산업인 만큼 대회 성적보다도 그 대회의 주요 게임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반 스포츠와 e스포츠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바로 특정 회사가 게임 개발과 서비스를 하면서 지식재산권(IP)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포츠로서 인정받는 일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종목사의 독점적 리그 운영에 따른 사업 확장성 제약 우려도 있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커다란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한국 e스포츠는 IP와 관련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스타크래프트’가 압도적인 인기를 끌던 지난 2007년 블리자드 사는 온게임넷과 MBC게임, 한국e스포츠협회(KeSPA)에 공문을 보내 자사의 작품에 대한 IP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협상 끝에 2010년 지적재산권 침해 중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가는 분쟁을 벌인 적이 있다. e스포츠라는 산업의 열매를 안정적으로 따먹으려면 e스포츠에 걸맞은 독창적인 게임을 개발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현 시점에서 e스포츠 주요 종목 빅5를 꼽으라면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필두로 ‘오버워치’, ‘배틀 그라운드’, ‘카운터 스트라이크’, ‘도타2’가 꼽히는데 이 중 한국산 게임은 ‘배틀 그라운드’가 유일하다. ‘배틀 그라운드’를 만든 펍지는 전 세계 9개 지역에서 프로 시즌 대회를 출범시키고 각종 대회마다 달랐던 인게임 세팅과 포인트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하는 표준화 작업을 하는 등 e스포츠로서의 생명력을 길게 가져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컴투스의 ‘서머너즈워’도 국내보다 북미, 유럽 등 해외에서 오히려 인기를 끌면서 앞으로 더욱 커질 수 있는 e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머너즈워’는 빠른 마우스 조작 속도와 판단력, 집중력 유지 등이 중요한 대부분의 e스포츠와 달리 전략을 짜고 상대방의 플레이에 대응하는 ‘턴제 RPG(순서대로 전투하는 역할수행게임)’라서 신체적인 손놀림보다 두뇌게임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는 호평을 듣고 있다. 선수 입장에서도 20대 중반이면 고참급 선수가 되는 다른 게임과 달리 오랜 시간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셈이다.
또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국산 게임이라고 해서 e스포츠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넥슨의 ‘카트라이더’다. 어느덧 출시된 지 15년이 된 카트라이더는 초보자가 봐도 이해하기 쉬운 레이싱 게임 방식과 짧은 플레잉 타임 등을 무기로 삼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넥슨은 지난 9일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개최한 ‘2019 카트라이더 시즌2’ 결승전에서 입장권 3000장이 모두 매진되는 성과를 거뒀고, 또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팬 페스티벌 X019에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선보이며 다양한 플랫폼으로 글로벌 게임 유저들에게 ‘카트라이더’를 알리는 작업에도 힘쓰고 있다. 이와 함께 넥슨은 ‘카트라이더’ 외에도 ‘피파 온라인’, ‘서든어택’ 등 자사 게임을 이용해 프로게이머와 BJ가 감독, 코치를 맡고 유저가 선수로 나서는 참여형 e스포츠 대회도 개최하며 저변 확대를 노리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게임이 언제 다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e스포츠로도 세계의 관심을 받을지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현실적으로 국내에서는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장르가 유독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고, 자신의 캐릭터를 고르고 미션을 완수하며 성장시키는 특성상 e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게임 장르가 대세로 자리 잡은 모양새이기도 하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MMORPG 위주 개발도 틀린 방식은 아니지만 멀리 본다면 보다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제작해야 장기적인 수익은 물론, 한국 e스포츠계가 단순 플레이어를 넘어 판을 짜는 플래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