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글로벌 경기 불황과 미·중 무역 분쟁 등 불확실성 확대 등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계 ‘뉴리더십’이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주요 기업 그룹 총수들이 직원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에 나서 주목된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국내 4대 그룹에서는 현재 4050세대 총수가 전면에 나섰다. 창업주와 2세 경영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40·50대에 접어든 3·4세대가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맞물려 미래 신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4050세대 총수들은 신사업 발굴, 인사혁신 등을 추진하면서 조직 구성원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꾀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해외 유학을 통해 몸에 익힌 국제 감각과 창의·수평적 문화를 바탕으로 기업들의 위기 탈출을 위한 체질 변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과거 수직적 의사결정 체제에서 수평적인 의사결정 문화가 국내 주요 그룹 조직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직원들과 번개 자리 갖는 SK그룹 최태원 회장… 올해 100차례 행복토크 약속
대표적인 예가 그룹 회장이 회사의 비전과 자신의 경영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직원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이어가고 있는 SK그룹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문화가 조성돼야 사회적 가치가 창출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어려운 경영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소통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말 서울 광화문 인근의 식당에서 직원들과 연이어 ‘번개 토크’ 자리를 가져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자리는 최 회장이 “형식을 파괴해 구성원들과 소박하고도 진솔한 대화 자리를 갖고 싶다”며 직접 제안해 열렸다는 전언이다.
최 회장은 “그동안 관계사별로 타운홀 미팅 형식으로 진행했던 형식에서 벗어나 그룹 전체 구성원들에게 제가 밥을 사면서 행복 스킨십을 강화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이날 “회장님 팔뚝이 굵은데 관리는 어떻게 하시냐”, “회장님 개인의 행복은 어떤 것이냐” 등의 소소한 질문도 나왔는데 최 회장은 “웨이트도 하고 많이 걷는다. 테니스 같은 스포츠와 영화, 음악도 삶의 소소한 행복”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날 최 회장은 직원들과 직접 셀카를 찍고 건배 제의를 했다. 술이 몇 잔 돌자 인생고민을 털어놓기도 했고, 회사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등 격식 없는 자리가 됐다. 최 회장은 건배사로 “회사는 우리다, 우리는 하나다”를 선창했고 구성원들은 잔을 들어 화답했다. 최 회장은 그가 추구하는 경영철학에 대해 구성원들에게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행복이 커진다는 믿음이 있으면 몰입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성과가 나타나 우리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 더불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행복해지면 곧 수펙스(SUPEX·Super Excellent)한 회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최 회장과의 번개미팅에 참석한 구성원들은 SK그룹 사내 게시판을 통해 모집한 인원들로 참여희망 인원이 넘쳐 두 곳 식당에 스탠딩 자리까지 추가로 마련해 진행됐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은 이날 밤 늦게까지 국밥집에 남아 구성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격의 없는 소통을 이어갔다. 앞서 최 회장은 올해 SK신년회에서 구성원과 이해관계자의 행복을 새 경영화두로 제시하고 구성원들과 100회에 걸쳐 행복토크를 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 같은 약속을 지켜 실제 구성원들과 활발한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달 번개 저녁모임으로 진행된 행복토크는 각각 89, 90번째 자리였다. 소통 자리는 기존의 형식과 내용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주목을 받기도 했다. 타운홀 미팅 형식으로 진행된 소통자리는 모바일 앱을 통해 현장에서 직원들이 질문을 올리면 최 회장이 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때로는 최 회장이 구성원들의 의견을 되묻기도 했다. 사전 각본 없이 진행되면서 격의 없고 솔직한 대화가 오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0월 28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대중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번개 행복토크를 열고 구성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 직원들과 소통하며 경영철학·회사비전 공유
최 회장이 직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 행보’에 나선 것은 그가 가진 경영철학을 구성원들에게 이해시키고 동의를 구하기 위한 취지로 풀이된다. 최 회장은 2016년 SK그룹이 앞으로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며 소위 ‘더블 보텀 라인’ 경영을 시작했다. 주요 계열사의 정관을 변경해 사회적 가치를 경영원칙으로 설정하고, 지난해부터는 성과 평가의 절반을 사회적 가치로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SK 경영함수를 행복추구로 삼으려면 구성원의 동의가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반복해왔다.
최 회장은 지난 7월 중국 주재 직원들과의 소통 자리에서는 “기업의 존재 이유를 ‘구성원 전체의 행복추구’로 바꿔 나갈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적극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구성원의 하나 된 힘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게 필수라는 얘기다. 동의는 단순히 의견을 같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을 의미한다는 게 최 회장의 생각이다. 재계에서는 경영 환경이 불확실할수록 중국, 중동, 동남아시아 등 해외 성과를 돌파구로 삼아 구성원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행보라는 평가도 나온다. 최 회장은 올해 8월 열린 ‘2019년 이천 포럼’에서 “나도 변화는 두렵고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번지 점프하듯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꾸 새로운 시도를 해야 ‘딥 체인지’를 이룰 수 있다”며 구성원들에게 “피할 수 없다면 변화를 즐기자”고 당부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8월 20일 ‘삼성 청년 SW 아카데미’를 찾아 교육생들을 격려하는 모습.
▶삼성전자 창립 50주년 맞아 ‘신성장’ ‘사회적 책임’ 비전 제시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신성장’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구성원들에게 제시하면서 구성원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줬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이달 1일 삼성전자 창립 5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전 임직원을 상대로 경영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구성원들과의 소통에 나섰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2012년 부회장에 오른 이 부회장은 그동안 반도체·디스플레이 투자 발표나 현장 경영, 회의 등을 통해 경영과 관련된 메시지나 사업 비전 등을 얘기했지만 공식적으로 전 임직원에게 자신의 경영 철학을 전달한 것은 처음이었다. 경영 메시지는 이 부회장이 상당 기간 고민하며 다듬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창립 50주년 이 부회장이 구성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다가올 50년을 준비해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100년 기업이 되자’로 요약된다. 그는 “지금까지 50년은 (임직원) 모두의 헌신과 노력으로 가능했다”며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한 삼성전자 성과에 대해 격려했다. 이 부회장은 “50년 뒤 삼성전자의 미래는 임직원이 꿈꾸고 도전하는 만큼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며 “우리의 기술로 더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세계 최고를 향한 길”이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상생을 강조했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이 같은 메시지에 대해 ‘현장과 소통하는 경영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경영 구상을 직원들과 공유해 삼성을 한 차원 더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이 부회장이 삼성이 수십 년간 주력해온 ‘세계 최고, 초일류’라는 가치에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상생’을 더한 것으로 상당수 구성원들이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지난 10월 22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대강당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직원들과 셀카를 찍고 있다.
▶수평적 리더로 친밀한 모습도 주목
보여주기식 아니라 실천하는 비전 증명
이 부회장의 고압적 총수의 모습이 아닌 소통하고 수평적인 리더로서의 친밀한 모습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직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글과 사진을 올리지 않지만 상대방의 기념사진 촬영에 적극 응하는 방식으로 SNS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올해 초에는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구내식당에서 직접 식판을 들고 직원들과 기념촬영에 응하는 모습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소탈한 ‘인간 이재용’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 3월에는 ‘아시아 최고 부호’ 무케시 암바니 인도 릴라이언스그룹 회장의 장남 결혼식에 참석해 인도 전통 복장을 입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모습이 세간에 화제를 뿌렸다.
또 지난 8월에는 삼성 청년 소프트웨어 아카데미(SSAFY) 광주 교육센터를 방문해 교육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격려하는 모습이 화제를 모았다. 이 같은 이 부회장의 행보는 단순한 보여주기식 소통이 아닌 매번 실질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삼성은 소프트웨어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전국 4개 지역에 ‘삼성 청년 소프트웨어 아카데미’를 설립해 1년에 두 차례 교육생을 선발하고 있다. 5년간 총 1만 명의 소프트웨어 전문 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청년 취업난 해소는 물론 삼성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방면에 걸쳐 소프트웨어 인력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필수라는 판단에서 파격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 부회장은 “소프트웨어 인재 양성은 IT 생태계 저변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다. 어렵더라도 미래를 위해 지금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안팎에서 소통… 수평 문화 안착시키는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업계 안팎에서 직접 소통에 나서면서 현대차그룹의 업무 스타일을 변화시키고 있다. 자동차 업계 등에서는 정 수석부회장이 ‘실패해도 되지만 꽉 막힌 사람처럼 일하지 말라’고 주문한 것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외부 전문가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고,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외부 영입에도 관심을 쏟는 등 자동차 업계뿐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9월 열린 현대모비스 이사회에서도 외국인 사외이사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면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모빌리티 이노베이터스 포럼 2019’에 예고 없이 등장해 인간 중심의 모빌리티 개발 철학에 대해 직접 설명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투자자들과 그룹의 미래에 관한 자유로운 대담을 갖기도 했다. 그는 지난 5월 세계적 사모투자펀드(PEF)인 칼라일그룹이 서울에서 주최한 투자자 콘퍼런스에 초청돼 여러 투자기관 관계자 앞에서 이규성 칼라일 공동대표와 단독 대담했다. 이 자리에서 정 수석부회장은 “앞으로 현대차그룹 기업문화는 스타트업처럼 더 많이 바뀔 것”이라며 “미래에는 재택근무가 확대돼 연구개발(R&D)을 제외하면 현대차 본사 오피스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 문화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자율적인 의사결정 문화로 변모할 것”이라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창업주)님은 직원을 독려하고 일사불란하게 따르도록 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지금은 직원과 같이 논의하고 서로 아이디어를 나눠 속도는 느리지만 더 좋은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임직원 직급 축소, 복장 자율화 등 자율·수평 문화 안착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평가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0월 임직원 약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타운홀 미팅을 열기도 했다. 타운홀 미팅은 다양한 주제로 임직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회사의 방향성을 공유하는 수평적 기업 문화의 일환으로 마련된 자리다. 지난 3월과 5월 ‘자율복장’과 ‘미세먼지 저감’을 주제로 열리는 등 올해만 세 번째 마련됐다.
정 수석부회장은 직원들과 즉석 문답을 주고받고 의견을 청취하는 한편 참석 임직원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셀카를 함께 촬영하는 등 격의 없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특히 직원들은 수석부회장 애칭인 ‘수부’라고 정 수석부회장을 호칭하고 대화과정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후문이다. 이날 직원들은 정 수석부회장에게 업무부터 변화, 회사의 비전 등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고 정 수석부회장은 질문에 대해 하나하나 상세한 답변을 했다. 또 정 수석부회장이 청년 세대의 고민을 담은 책을 소개하면서 직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3~4세 전면 나선 재계, 경영 스타일 ‘민첩함’과 ‘소통’으로 변화 중
삼성 현대차 SK뿐만 아니라 LG GS 한진 두산 효성 등 50대 전후 3·4세대가 그룹 경영 전반에 나서면서 재계 경영 스타일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재계에서는 일찍부터 글로벌화를 경험한 젊은 총수들이 경영 키워드를 바꿔놓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민첩함(Agile)’과 ‘소통’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창업 1·2세대의 권위주의와 일사불란함 대신 ‘속도·소통·실리’가 키워드로 부상했다”면서 “한동안 정체된 듯했던 재계 의사결정 속도는 빨라진 반면 대내외 구성원들과의 소통은 더욱 활발해졌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