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이마트 왕십리점을 찾은 하은정 씨는 마트 중간 매대에 놓인 7900원짜리 보디워시를 카트에 담았다 5분 만에 뺐다. ‘1+1’ 상품이라 이득이라고 생각했는데, 10m 앞 매대에서 2900원짜리 ‘에브리데이 국민가격’ 보디워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 씨는 “평소 사용하던 LG생활건강에서 만든 제품인데 행사상품보다도 저렴했다”고 했다. 하 씨가 지인들에게 보디워시 가격을 이야기하자, 30대 초반인 지인들은 “2000원짜리 치약묶음, 칫솔세트를 이미 구매해 비축해놨다”고 했다.
# 지난 8월 초 오픈한 스타필드시티 부천점, 11시경 4층에 위치한 노브랜드 버거를 찾은 정기환 씨는 긴 줄에 한 번, 버거 가격에 한 번 더 놀랐다. 메뉴판에 있는 제품 중 가장 싼 그릴드불고기 버거 단품 가격이 1900원이었다. 소고기 패티가 두 장 들어가 가장 비싼 NBB어메이징 버거가 4900원으로 5000원을 넘지 않았다. 정 씨는 “점심시간을 피해 일찍 왔는데도 줄이 길어 주문까지 30분 걸렸다”며 “그래도 가격이 저렴해 스타필드 올 때면 간단하게 한 끼 먹으러 찾을 것 같다”고 말했다.
▶8월 이마트 에브리데이 국민가격 출시 돌풍
하반기 유통업계의 화두를 꼽는다면 단연 ‘초저가’다. ‘기존에 없었던 가격’ 또는 ‘할인 가격보다 싼 상식 이하의 가격’으로 정의되는 초저가 상품 경쟁은 이마트가 촉발했다.
이마트는 지난 8월 1일 ‘에브리데이 국민가격(국민가격)’ 상품을 출시했다. 할인행사 없이도 연중 최저 가격에 판매하는 상품이다. 병당 4900원짜리 와인, 개당 480원짜리 비누, 2900원 보디워시 등 30여 개 상품이 첫 타자로 등판했다.
8월 말에 2차로 출시한 제품은 더 자주 사는 생필품, 비싸서 망설이게 되는 가전제품군으로 확대됐다. 100매에 700원인 물티슈, 24만9000원 의류건조기와 17만9000원 32형 TV 등 40여 개를 추가했다.
국민가격 상품은 비슷한 제품의 경쟁상품과 비교하면 가격 차이가 크다. 칠레와 스페인산 도스코파스 와인은 기존 판매하던 칠레·스페인 와인 대비 60% 저렴하다. 1.8ℓ 용량을 1350원에 판매하는 자동차 워셔액은 기존 제품보다 45%, 온더바디 보디워시는 같은 용량 타 제품보다 50% 더 싸다. 한 개 가격으로 두 개 사는 제품들이 새로 출시된 것이다.
이마트는 이 가격을 맞추기 위해 원가구조를 새롭게 만들었다. 대형마트에서만 할 수 있는 대량매입으로 가격을 크게 낮추거나, 기존보다 더 싸게 구매할 수 있는 신규 생산지를 발굴하는 게 주요 골자다. 불필요한 기능을 없애고 이마트만을 위한 제품을 새로 제작하기도 했다.
국민가격 대표상품인 도스코파스 와인이 대량매입으로 원가를 낮춘 사례에 든다. 이마트 주류 바이어는 5000원짜리 와인을 만들기로 우선 가격을 정하고, 품질과 가격 조건이 맞는 와이너리를 수십 곳 찾아다녔다. 마지막으로 칠레와 스페인 와이너리에서 낙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마트는 와인 수입 물량을 평소(3000병) 대비 300배 이상으로 보증했다. 병당 이윤을 줄이더라도 대량으로 소비해 와이너리와 이마트도 이익을 볼 수 있도록 구조를 짰다. 기존에 없던 제품을 새로운 곳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잼처럼 발라 먹는 피넛버터는 기존에 미국 브랜드나 중국에서 만든 제품을 판매했는데, 올 초부터 세계 2위의 땅콩 산지인 인도에서 신규 소싱처를 발굴했다.
이마트는 초저가 가전제품에서 TV는 ‘화면 크기에 맞춰 편하게 볼 수 있게’, 건조기는 ‘옷을 빨리 잘 말릴 수 있게’ 핵심 기능에만 집중했다. 일렉트로맨TV는 화면 해상도를 TV 크기별로 차등 적용했고, 일렉트로맨 의류건조기는 최근 신상품에 들어가는 원격제어·스마트 기능을 아예 뺐다. 상품 조작 방식도 다이얼 방식으로 변경해 건조기 본연의 기능만 남겼다.
알맹이만 남기고 가격을 낮추자, 소비자가 지갑을 열었다. 도스코파스 와인은 8월 1일 출시 이후 44만 병이 팔리면서 단숨에 와인 매출 1위로 올라섰다. 7000원대 와인으로 이마트 기존 판매수량 1위였던 G7이 1년에 120만 병가량 팔리는데, 도스코파스는 한 달 만에 넉 달치가 팔려나갔다.
700원 물티슈는 2차 제품으로 4주 후에 출시됐지만 판매 속도는 더 빠르다. 8월 29일 출시 이후 지난달 8일까지 11일 만에 물티슈 판매수량 1위에 올랐다. 전체 이마트 물티슈 판매량의 50%를 국민가격 물티슈가 차지할 정도다. 자동차 워셔액(24만 개), 온더바디 보디워시(22만 개), 다이알비누(17만 개) 등이 뒤를 이었다. 판매량 상위 5위 안에 든 제품 판매량만 합쳐도 132만 개에 달한다.
국민가격 상품은 전체 상품군 매출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8월 1~26일 와인 매출은 같은 기간 대비 41%, 다이얼비누와 온더바디 보디워시가 속한 목욕용품 매출은 16% 상승했다. 이마트에서는 주요 지표 중 ‘방문객 수’에 의미를 두고 있다. 8월 1~26일 이마트 방문객 수는 전달 같은 기간보다 8%, 2차 상품 출시 열흘 후인 9월 8일까지 5% 증가 추세를 유지했다. 아예 ‘마트에선 장 안 본다’고 돌아섰던 고객 중 일부가 “이마트가 뭔가 싸게 판다”면서 돌아온 것이다. 한 번도 사지 않았던 제품을 사보는 고객도 생겨났다. 도스코파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구매 고객 중 최근 6개월 동안 와인을 한 번도 구매한 적이 없는 고객 비중이 55%를 넘었다. 기존 충성고객 외에 신규 고객을 유입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다. 이갑수 이마트 대표는 “에브리데이 국민가격 1차 상품 성공을 통해 국내 소비자의 초저가에 대한 니즈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이마트 역량을 총동원해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핵심상품을 초저가로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브랜드버거 매장
▶“초저가만 살아남는다”… 온라인에 치이는 대형마트
이마트에서 ‘초저가’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대형마트 생존의 구원투수가 될 초저가 전략에 대해 언급했다. 정 부회장은 “아마존이 ‘고객의 절약을 위해 투자한다(We invest to save)’는 슬로건 아래 고객에게 낮은 가격으로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와 혁신을 추진하는 것처럼 신세계도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본질적인 문제는 채널에 구애받지 않고 가장 낮은 가격을 찾아가는 ‘스마트 컨슈머’와 ‘가치 소비’ 행태다.
정 부회장은 “스마트 컨슈머는 ‘가치 소비’를 바탕으로 가장 저렴한 시점을 놓치지 않고 구매하는 것이 생활화됐다”며 “결국 중간은 없어지고 시장은 ‘초저가’와 ‘프리미엄’의 두 형태만 남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에는 ‘미끼상품’으로 취급했던 저가 상품이 대형마트로 고객을 끌어들일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자 전망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형마트는 꽃게, 귤, 삼겹살 등 품목별로 특정 기간 동안 경쟁사보다 100원, 10원씩 싸게 파는 할인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온라인쇼핑이 보편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정 상품을 일주일간 할인해 특가에 판매한다고 해서 고객이 마트를 찾지 않았다. 고객은 필요할 때, 본인이 필요한 만큼을 스마트폰으로 주문하고 가장 편한 시간에 배송 받는 시스템에 점점 익숙해졌다. 땡처리 특가 상품은 ‘타임세일’이라는 명목으로, 하루에도 두세 차례 이상씩 판매됐다. 생필품과 비식품류를 위주로 취급했던 온라인몰이 신선식품 판매에 손을 뻗기 시작하면서 대형마트는 최후의 보루였던 ‘장 보기’에서도 온라인몰과 직접 경쟁하게 됐다. 한 달에 두 번 대형마트를 쉬는 의무휴업도 소비자에겐 ‘불편’을 넘어선 지 오래다. 소비자들은 마트에 미리 가는 대신 새벽배송을 이용하고, 급할 때는 집 앞 식자재 마트나 편의점을 찾았다. 대형마트에서 즐겼던 여가는 복합쇼핑몰이 기능을 대신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7월 온라인쇼핑동향에 따르면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11조1822억원으로, 지난해 7월보다 1조4896억원(15.4%) 증가했다.
전체 소매 판매액 중 온라인쇼핑 거래액 비중도 2018년 7월 18.9%에서 올해 7월 21.4%로 증가했다.
홈플러스 매출 효자 ‘삼양국민라면’
대형마트 성장 정체론이나 대형마트 위기론은 구문이지만, 떠돌던 말들이 올 초부터 숫자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4월 대형마트 3사가 ‘창립행사’ ‘봄나들이’ 등을 명분으로 한 달 내내 할인행사를 진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지난해만 못한 매출을 올렸다.
이마트는 올해 2분기 29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마트가 분기 실적에서 적자를 낸 것은 1993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증권가에서 예상했던 이마트의 2분기 적자 규모(최대 100억원대)보다도 3배 가까이 큰 규모였다. 지난해 2분기 대비해서는 영업이익이 832억원 줄었다.
이마트는 “2분기는 전통적인 비수기이며, 전반적인 대형마트 업황 부진과 전자상거래 업체 저가 공세, SSG닷컴 등 일부 자회사 실적 부진 영향으로 영업이익이 적자가 났다”고 설명했다. 실제 대형마트 부문에서 영업손실은 43억원, 부츠와 삐에로쑈핑 등 전문점에서의 손실도 188억원으로 나타났다. SSG닷컴(-113억원), 이마트24(-62억원), 조선호텔(-56억원) 등도 영업적자를 냈다. 세제 개편에 따라 부동산 보유세가 지난해보다 123억원 늘어난 점이 적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해도, ‘대형마트 1위의 적자 성적표’를 받아든 업계의 충격이 컸다.
하반기 이를 반전하기 위한 카드로 내민 것이 다시 초저가다. 결국 대형마트에 손님을 오게 하려면 여기에만 있는 상품, 여기서만 가능한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마트는 연내 국민가격 상품을 500개까지 확대해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초저가 열풍은 지속
피자·라면·버거 등으로도 확산
경쟁 대형마트도 초저가 대열에 합류했다. 롯데마트에서는 ‘통큰치킨’을 10년 만에 부활시켰다. 창립행사로 3월 선보였던 통큰치킨 12만 마리가 일주일 만에 매진되자, 5월 앙코르 행사를 다시 한 번 진행했다. 큰 통에 담은 치킨 한 마리를 7800원에 구매한다는 콘셉트가 초저가 트렌드와 맞물려 호응이 높았다. 올 초부터 심심찮게 등장했던 ‘담기’ 행사도 월례행사로 늘렸다. 개수나 중량 대신 한 봉지에 가득 담아 가격을 매기는 이벤트로, 3월에는 고당도 오렌지, 5월 햇감자와 키위, 6월 양파, 8월 햇고구마 등으로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대형마트 외 오프라인 채널에서도 초저가 상품이 속속 등장했다. 이마트24는 7월 바나나 5개를 한 묶음으로 엮어 1550원에 파는 ‘2+3’ 바나나를 출시했다. 기존 편의점 바나나 1개(800원)대비 개당 60%이상 저렴한 가격이다. 봉지당 390원꼴인 민생라면, 200원짜리 도시락김 등 기존 제품 대비 40~50% 저렴한 민생 시리즈가 인기를 얻어 이를 신선식품에도 적용한 것이다. 삼각김밥을 ‘10년 전 가격’으로 판매하는 이벤트도 인기를 끌었다.
식품 제조사도 합류했다. 삼양식품은 홈플러스와 6월 ‘삼양국민라면’을 출시했다. 다섯 봉지 한 팩에 2000원으로, 봉지당 400원이다. 출시 2개월 만에 130만 봉지가 팔렸다. 전체 140여 종의 봉지라면 중에서 순위도 6월 14위, 7월 13위, 8월 11위로 계속 올랐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출시한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매출 순위가 꾸준히 오르는 것은 신제품을 맛본 고객들이 재구매를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팔도와 이마트24가 출시한 민생라면(개당 390원), 농심의 해피라면(700원) 등도 저가 라면 대열을 형성하고 있다.
이마트 에브리데이 국민가격 상품 모음 컷
유통업계 전반을 휩쓰는 ‘초저가’ 열풍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프리미엄 신제품을 출시하며 계속 가격을 높이던 햄버거·피자 등 프랜차이즈 업체들도 저가 경쟁에 뛰어들었다. 버거킹은 지난해 10월 론칭한 ‘올데이킹’메뉴가 9개월 만에 1000만 개 판매됐다고 밝혔다. 인기 버거 세트를 하루 종일 4900원에 제공하는 가성비 전략이 통했다. 버거킹은 올해만 25개 이상의 매장을 신규 출점했다. 도미노피자는 지난달 미디엄 사이즈 한 판에 2만1000원, 2판에 2만9900원에 파는 ‘취향존중 시리즈’를 내놨다.
‘1900원 버거’로 SNS를 달구는 이마트의 노브랜드버거도 지난달 9일 중화점을 오픈하며 3호점까지 열었다. 1호점 홍대에서는 평일 기준 평균 1500개, 주말 기준 2000개가 팔렸다. 신세계푸드 관계자는 “스타필드시티 부천점, 중화점에서도 일일 1000개 이상이 판매되며 호응이 높다”며 “8월 19일 오픈 이후 9월 11일까지 판매량은 5만 개를 돌파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