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의 로봇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는 올해 첫 번째 출장 일정으로 지난 1월 사우디의 KAUST(킹압둘라과학기술대학교)가 진행한 ‘WEP 워크숍’에서 키노트를 맡아 발표했다. 이를 두고 정보기술(IT)업계에서는 KAUST가 총사업비 700조원대에 이르는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프로젝트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네이버와의 접점에 주목하고 있다.
‘사우디판 MIT’로 불리는 KAUST는 사우디 과학기술 인재양성과 연구개발(R&D)의 산실인 현지 최고 명문 공과 대학이다. 국가 차원의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받아 단기간에 세계적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WEP는 KAUST가 중요 인사들을 초청해 진행하는 상징적인 워크숍이다. 2009년 이후로 약 1500여 명의 연사가 참여했다. KAUST가 사실상 네옴시티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만남이 주목된다. 네옴시티 최고경영자(CEO)인 나드미 알 나스르는 KAUST 수석 부총장 출신이다. 이 밖에도 KAUST의 핵심 관계자 다수가 네옴으로 자리를 옮겨 영향력을 행사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KAUST 이사장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맡고 있다. 지난해 8월 그는 직접 ‘KAUST 새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KAUST 이사회에는 사우디 장관 등이 포진해 있다. 올해부터 제다 등 사우디아라비아 5개 도시를 디지털트윈 플랫폼으로 구축하는 사업을 진행 중인 네이버가 현지 사업 반경을 넓히는 데 있어 KAUST와의 협력이 중요한 이유다.
석 대표는 키노트 발표와 관계자 미팅 등을 통해 네이버가 개발 중인 디지털 트윈, AI, 클라우드 로보틱스, 자율주행기술 등을 소개했다. 구체적으로 항공사진과 AI로 핵심 데이터를 제작하는 솔루션(ALIKE)과 멀티 로봇 인텔리전스 시스템(ARC), 자율주행 로봇 등에 관계자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석 대표는 “워크숍 현장에서 네이버 기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는 것이 고무적”이라면서 “KAUST와의 교류는 글로벌 테크 기업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팀네이버의 여정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사우디의 실질적 지배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2030년 완공을 목표로 초대형 신도시 사업 ‘네옴시티’를 추진 중이다. 석유 중심의 사우디 경제를 대전환하기 위한 ‘사우디 비전 2030’의 핵심 프로젝트다. 로봇이 물류와 보안, 가사노동 서비스를 맡고, 그린수소·태양광·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스트럭처를 갖춘 미래형 AI도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나드미 알나스르 네옴시티 CEO는 “네옴시티를 AI 과학기술로 가득 찬 도시로 만들어서 세계의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네옴시티는 사우디 북서부 타북주 일대에 약 2만6500㎢로 조성될 예정인데, 이는 서울시의 약 44배에 달하는 크기다. 네옴시티는 공식 사업비만 5000억달러에 달한다.
사우디 정부는 네옴시티 건설을 위한 다양한 파트너 국가와 기업을 발굴 중이다. 네옴시티는 모든 인프라와 물류가 AI와 로봇으로 작동하는 ‘세계 첫 인지도시(Cognitive City)’를 꿈꾸고 있다. 사우디는 특히 클라우드·로봇·AI·디지털 트윈 등 최첨단 기술을 신사옥 1784에 집약시킨 네이버의 기술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네이버는 신사옥 1784를 세계 최초의 로봇 친화형 빌딩으로 건립했다. 네이버는 신사옥에서 직접 개발한 로봇을 풀어놓고 학습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 국내 기업 최초로 5G(5세대) 이동통신 특화망을 구축했고 로봇의 눈과 두뇌 기능을 모두 클라우드에 올렸다. 그 결과 로봇을 상황에 맞게 원격조종하거나 개선이 가능하고, 다양한 역할을 맡기도록 설계할 수 있게 됐다. 로봇이 빌딩에서 낮에는 배달부로 일하고 밤에는 경비를 서는 것이 가능하다.
네이버는 자사의 기술을 다른 기업의 기술이나 플랫폼과 호환이 잘되도록 ‘개방형’으로 개발하고 있다. 특정 기업에 대한 기술 종속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A사의 로봇, B사의 클라우드, C사의 통신망 등에서도 네이버의 아크를 이용할 수 있다.
사우디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을 방문하면서 네이버 1784를 수차례 찾고 관련 기술을 점검했다. 사우디 정부 인사가 9차례나 네이버에 방문할 때 채선주 대표를 비롯한 네이버 경영진은 버선발로 달려와 기술 수출을 타진하기도 했다.
석 대표뿐 아니라 네이버의 핵심 경영진은 연초 사우디아라비아 출장길에 올랐다. AI, 클라우드 로보틱스 등 핵심 기술 해외 세일즈에 공을 들이고 있는 추가적인 사업 수주를 위해 네이버가 확실한 고객인 사우디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채선주 네이버 대외·ESG정책 대표를 중심으로 김유원 네이버클라우드 대표,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AI이노베이션 센터장 등 주요 경영진들이 새해 첫 출장단에 포함됐다. 이들은 현지 핵심 관계자들과 연쇄 미팅을 진행했다. 특히 디지털 분야의 현지 사업파트너들과 추가적인 사업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네이버 경영진들은 사우디 측 고위관계자들과 만나 네이버의 기술에 대한 수요를 확인했다고 한다.
정부 주도의 ‘수퍼앱(가칭)’ 구축을 준비하고 있는 사우디는 특히 네이버가 자체 구축한 대규모언어모델(LLM)과 네이버클라우드의 업무용 협업 도구 네이버웍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는 네이버웍스의 발전 방향을 기업의 디지털 전환은 물론 스마트빌딩, 스마트시티 운영에 필요한 ‘AI 수퍼앱’으로 잡고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문장의 생성이나 음성 인터페이스 등 네이버웍스의 다양한 기능을 AI로 확충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들에게 AI 개인 비서를 제공하는 서비스로 진화시킨다는 구상이다.
앞서 네이버는 지난해 10월 1억달러(약 1300억원) 규모 디지털 트윈 플랫폼을 사우디 자치행정주택부(MOMRAH)에 수출했다. 이를 두고 IT업계에서는 네이버가 ‘오일머니’ 확보라는 IT업계 숙원을 풀었다고 평가했다. 사우디는 네이버가 수출한 기술을 갖고 디지털 트윈 도시를 구축한다. 디지털 트윈이란 가상 모형에 실제 기상 현상이나 사물을 쌍둥이처럼 구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예측·최적화 등 시뮬레이션을 통해 현실세계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기술이다. 사우디는 디지털 트윈 플랫폼을 도시 계획이나 홍수 예측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해당 프로젝트는 내년부터 5년간 수도 리야드를 비롯해 메디나, 제다, 담맘, 메카 등 5개 도시에서 순차 진행된다.
지난해 8월 자체 LLM ‘하이퍼클로바X’를 내놓은 네이버는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제3문화권’으로의 확장을 통해 틈새시장을 노린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AI 주권’이 부각되는 가운데 한국 LLM에 대한 틈새 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판단에서다. 자국어를 학습하고 생성하는 LLM은 한 국가의 IT 주권이나 다름없는 만큼, 미국과 중국 간 경쟁 속에서 네이버가 제3세계를 상대로 승산이 있다는 것.
특히 사우디의 경우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제3국과의 AI 협력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가 자체 기술로 LLM ‘하이퍼클로바X’를 개발했듯 현지 데이터를 활용해 AI모델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할 수 있다. 현지 시장에 맞춰 법과 제도를 모두 이해하고 작동하면서도 데이터 유출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는 게 핵심 포인트다.네이버는 관계사 라인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일본, 동남아 시장에서도 서비스 수출을 모색 중이다.
IT업계에서는 사우디 기술 수출이 결코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네옴시티, LLM 등 굵직한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빅테크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네이버의 경우 오랜 시간 AI·로봇·클라우드기술을 연계해 기술을 발전시켜왔고, 사우디와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빅테크와 경쟁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네이버의 사우디 현지 법인 설립도 구체화될 전망이다. 현지 법인은 네이버가 지난해 10월 사우디 정부와 체결한 1억달러(약 1300억원) 규모 ‘디지털 트윈’ 플랫폼 구축 사업 전반을 관리하는 한편 신규 사업 발굴 등을 맡게 된다.
현지 법인은 사우디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설립이 결정된 사안이다. 올해 출범 예정인 사우디 법인 대표는 현지 고위 관계자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채선주 대표가 겸임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황순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