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본격적으로 실생활 곳곳에 침투하고, 기술과 서비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챗GPT 열풍이 불었던 2023년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테크업계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면서 산업과 경제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2022년 11월 세상에 등장한 오픈AI의 챗GPT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AI를 각인시켰다. 올해는 첨단 기술의 융합과 기업들의 합종연횡이 더욱 활발할 전망이다. 기업과 크리에이터(창작자) 생산성이 대폭 향상되면서 ‘파괴적 혁신’을 실행하는 스타 플레이어(스타트업)의 등장도 기대된다. 주요 테크 기업과 매체·벤처캐피털(VC) 분석 등을 토대로 올해 테크업계를 달굴 이슈를 추려봤다.
구글은 연초부터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시스턴트(AI 비서)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등을 담당하는 직원을 포함해 수백 명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보통신(IT) 매체 더버지 등에 따르면 이에 대한 직원들의 반발도 나왔다. 구글 내부 밈 게시판인 ‘밈젠(Memegen)’에는 이번 해고에 대해 “경영진의 횡포”라는 게시물이 올라왔고, 이 게시물에는 수천 개의 ‘좋아요’가 눌렸다. 또 다른 글은 “우리의 새로운 연례 전통에 감사드린다”며 경영진을 비꼬기도 했다. 앞서 구글은 지난해 1월 전체 인력의 약 6%인 1만 2000여 명을 감원한 바 있다. 구글은 그동안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는 ‘안전한’ 직장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지난해 대규모 해고 이후에는 상황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츠는 ‘빅테크의 미래’ 보고서에서 빅테크 6개사(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메타,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에 대해 ‘규모가 커지면서 성장이 둔화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빅테크가 생성형AI, 양자컴퓨팅, 혼합현실(AR·VR) 등 최신기술을 통해 새 시장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에 속도를 높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래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도 사업 내실을 기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칠 수 있다는 것.
우선 상당수 빅테크 기업들은 ‘효율성으로의 복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빅테크 기업들은 2020년과 비교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어 신규 채용이 축소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유력 VC를 압도하는 빅테크의 자체 연구개발(R&D) 투자 기조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대기업의 R&D 투자가 미국 전체 벤처 자금을 큰 폭으로 앞섰다. 빅테크는 특히 생성형AI 분야에서 컴퓨팅 등 자원과 자금을 투입하며 유망 AI 스타트업에 힘을 싣는 전략을 구가하는 모양새다.
빅테크 6개사는 현재 클라우드, 디지털 광고 등 상당 부분에서 수익원이 겹치는 상황이다. CB인사이츠는 “빅테크가 서로의 핵심 사업을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시장에서의 성장을 모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분야 유니콘들의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특히 이들 기업이 AI 사업의 수익성을 증명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미국 IT 전문 매체 디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오픈AI는 지난해 매출 16억달러(약 2조793억원)를 넘어서며 1년 전 매출 2800만달러(약 364억원)에 비해 57배 이상 증가했다. 구글과 아마존이 투자한 앤트로픽은 올해 매출 8억5000만달러(약 1조1000억원)를 벌어들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챗GPT 출시 만 2주년을 맞는 올해 오픈AI 매출은 50억달러(약 6조4980억원)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여전히 오픈AI와 같은 ‘AI유니콘’들의 수익성 개선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챗GPT의 하루 운영비용은 약 70만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AI 유니콘들이 수익성 확보라는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들에 대한 빅테크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미국 IT 전문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올해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의 AI 하드웨어 기기 출시를 점쳤다. 현재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과 삼성이 양분하고 있다. 미국 스마트폰 시장의 경우 양사 점유율이 80%에 육박할 정도다. 새로운 AI 기반 모바일 기기의 등장이 시장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디인포메이션은 “AI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기기들의 출현이 1위인 애플을 위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과거 스마트폰 시장에서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는 MS와 아마존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MS의 경우 이미 오피스와 같은 소프트웨어 제품에 통합 중인 ‘코파일럿’을 기반으로 한 기기를 내놓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애플의 대응에도 귀추가 주목된다. 애플은 지난 2011년 ‘시리’를 출시하며 AI의 디바이스 적용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지만 최근의 AI 열풍에서는 소외됐다는 인식을 받고 있다.
애플은 AI가 클라우드가 아닌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하는 방식에 힘을 싣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이와 별도로 자체 대규모언어모델(LLM) 개발에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하드웨어 노하우와 UX에서의 차별점을 가진 애플이 올해 어떤 형태로든 반격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핵심은 스마트폰 사용자의 데이터를 모아서 만드는 개인화된 AI 비서다. 테크크런치는 “애플이 독점적인 지위를 통해서 사용자 데이터를 실용적으로 응용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로운 AI 디바이스가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붙는다. 하지만 네트워크 없이 AI를 활용할 수 있는 이른바 ‘온디바이스AI’ 개발이 붐을 이루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AI 중심의 스마트폰이 1억 대 이상 출하될 전망이다. 온디바이스AI를 적용하기 시작한 PC 산업 역시 큰 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오픈AI의 챗GPT나 구글의 바드(Bard)처럼 인터넷에 연결돼 클라우드 기반으로 사용되는 AI와 달리 온디바이스AI는 데이터를 외부 서버로 전송하지 않고, 기기 내에서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특징이 있다. AI가 멀티 모달리티 기능을 갖추게 되고 AI와 소통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 예상되면서 새로운 ‘AI 웨어러블 디바이스’도 부상하고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투자한 휴메인이 만든 AI 핀과 메타의 스마트 안경이 대표적인 AI 웨어러블이다. 이어폰도 중요한 AI 디바이스로 떠오를 수 있다.
노엄 샤지르 캐릭터AI CEO는 엔터테인먼트가 인공일반지능(AGI)의 첫 번째 사용 사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AGI란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인간처럼 추론, 학습,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강력한 AI를 말한다. 리처드 케리스 엔비디아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책임은 올해 최초의 생성AI 장편영화가 등장할 것으로 점쳤다. 그는 “35㎜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영화 제작자는 동일한 콘텐츠를 생성AI를 통해 70㎜ 영화로 제작할 수 있다”면서 “이를 통해 아이맥스(IMAX) 포맷의 영화 제작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하고, 더욱 많은 감독이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텍스트, 오디오, 시각적 형식에 걸쳐 스토리를 만들고 전달하는 AI의 능력은 빠른 속도로 향상되고 있다. 올해는 AI가 텍스트 기반 채팅을 넘어 음성, 비디오까지 통달하는 멀티 모달 모델로 완전히 대중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례로 2023년 11월 오픈AI가 공개한 GPT4 터보는 멀티 모달리티 능력을 갖췄다. LLM이 텍스트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음성까지 이해하는 능력이다. 같은 해 12월 공개된 구글 제미나이도 멀티 모달리티 능력을 갖췄다. 이런 멀티 모달리티 능력은 앞으로 나오는 모든 LLM 기반 AI의 표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캐시 가오 사파이어벤처스 파트너는 “2024년에는 텍스트, 이미지, 오디오와 같은 데이터가 멀티 모달 형태로 융합하면서 AI에 대한 재정의가 이뤄질 것”이라며 “이러한 모델을 사용하는 스타트업은 더 나은 의사 결정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향상할 것”으로 내다봤다. AI는 창작자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데이터 및 분석 플랫폼 data.ai는 “올해 모바일 시장에서는 AI를 통해 다음 혁신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고, 소비자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누구나 개발자가 될 수 있는 시대도 본격적으로 열린다. 기존에는 애플리케이션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려면 특정 개발 언어를 알고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AI가 소프트웨어 개발 언어에 대한 훈련을 받게 되면서 누구나 앱, 서비스, 디바이스 지원 등을 기계가 만들도록 명령할 수 있게됐다. 개발자 품귀 현상을 겪고 있는 IT 회사,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2023년은 영화와 TV보다 게임이 더 큰 성공을 거둔 해로 기록됐다. 할리우드는 문화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글로벌 게임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세를 보이는 추세다. 실리콘밸리 유력 VC 앤드리슨호로위츠(a16z)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게임 매출은 188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글로벌 박스오피스는 345억달러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a16z는 새해 전망에서 “최근 디즈니가 비디오 게임에 다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많은 논평이 있었지만, 다음 디즈니는 비디오 게임 회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게임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클래시 오브 클랜, 발로란트 등 주요 게임 지식재산권(IP)을 플레이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추세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게임을 IP로 선택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더욱이 스튜디오 단계에서부터 게임 제작에 활력을 불어넣는 AI를 도입하면서 게임사들의 진격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24년에는 크리에이터가 대규모 모델을 활용해 새로운 게임 시스템과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첫 번째 ‘AI 퍼스트 게임군’을 보게 될 전망이다. LLM으로 구동되는 생성형 에이전트는 마치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NPC(비플레이어 캐릭터)로 진화해 게임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다. AI로 게임 속 세계관을 학습해 마치 사람처럼 사용자와 소통하는 AI 게임 캐릭터(NPC)도 올해 화두로 떠오를 전망이다.
중국에서는 AI NPC를 상용화한 사례가 나왔다. 중국 넷이즈가 지난해 출시한 모바일 게임 ‘역수한’은 전 세계적으로 AI NPC를 적용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일명 ‘역수한GPT’가 적용된 NPC는 사용자와 대화한 것을 기억하고 행동하며 NPC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등 실제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용자가 채팅창에 입력한 말이 NPC 사이에서 소문으로 퍼지고, NPC가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이용자가 NPC에게 신고당해 추방당한 사례도 나왔다. 블리자드를 품은 MS는 지난해 11월 미국 AI 전문기업 인월드AI와 손잡고 AI 도구를 개발 중이다. 플레이어 자유도를 극대화한 ‘오픈월드’ 방식 게임에 AI NPC가 접목되면 이전과 차원이 다른 몰입도를 자랑하는 ‘가상현실’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940억달러(약 252조원)에 달했던 게임시장 규모가 더욱 커질 여지가 있다는 분석이다.
[황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