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철 국가건축정책위원장 명지대 석좌교수 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장 | 좋은 도시라면 도시 생각한 건물 많아야
입력 : 2014.02.13 09:37:37
“맨해튼 브로드웨이 108번가에 살 때야. 컬럼비아대학이 120번가에 있었는데 버스 타고 갈 때도 있고 걸어서 가기도 했지. 3년 있으면서 (튀는) 건물은 못 봤던 것 같아. 몸으로, 분위기로 느꼈을 뿐이야. 좋은 도시라면 그렇게 품격 있는 도시를 생각한 집들이 많이 있어야 해.”
한국 최고의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이기도 한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장)는 컬럼비아대에서 강의할 당시를 떠올리며 건축가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제시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국세청이 한때 입주했던 종로타워가 있지. 라파엘 비뇰 리가 설계했는데 나에게 그 건물을 평가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어. 그래서 천만 명 사는 도시가 저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편협하다고 하지 않겠냐고 했지. 건물 하나하나가 좋고 나쁜 게 아니야.”
건물을 도시 품격에 맞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김 교수는 암으로 투병하느라 오랜 역사도시 서울에 기이한 공공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김 교수는 지금 네 번째 발병한 암과 싸우는 중이다.
“DDP라고 불리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서울시청사는 내가 아플 때 했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되도록 놔주지는 않았을 것이야. 서울시청 옛 건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헐어냈을 거야. 아마 지하시청을 만들었을 것 같아. 그 안을 내려고 했는데 안됐다. 도심 한 복판에 그 정도 광장을 만들어낸 시청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는 지난해 발간한 <만인의 건축 만인의 도시>란 책에서 “헐었어야 하는 서울시 구청사를 그대로 두려다 보니 거기에 맞춰 비틀리고 꼬이게 지어진 신청사는 억지 춘향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국적 불명의 건축이란 지적이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 대해선 조선 이후 600여 년 역사를 되살릴 공간을 잃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DDP 정도 건물이 들어설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게 그 지역은 아니란 지적이다. 그는 특히 이 건물이 동대문의 특수성보다 건축가의 홍보성이 강하다고 혹평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건축가
김 교수가 건축에서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세계의 고도들을 샅샅이 훑고 수많은 도시 건설에 참여해 누구보다도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건축가이지만 새 건물 짓는데 그치지 않고 유산을 지키려고 적극 나서기도 했다.
천년고도 경주를 지키려고 이미 공사까지 시작한 고속철도 노선을 변경한 것은 전설 같은 이야기다. 문민정부 시절 고속전철이 건설될 때 그는 헬기를 타고 경주의 사진을 일일이 찍은 뒤 자비로 옛 서라벌의 큰 틀을 보여주는 지도를 만들어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설득했다. 덕분에 경주는 옛 문화유산을 복원해 고도의 영광을 재현할 시간을 벌었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원서동 한샘 DBEW 디자인 센터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사실 이번 인터뷰는 그가 국가건축정책위원장으로 선임돼서가 아니라 그 건물의 매력 덕분에 하게 됐다.
“내가 경주 지나려는 고속철도를 우회시켰기에 김석철이라면 전통을 지킬 거라며 문화재 위원들이 통과시켰지. 그러고 나서 한영우(사적분과) 위원장이 현장에나 가보자고 해서 갔어. 그런데 거기서 (수정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거야. 박자청이 창덕궁을 만들었다는데, 내가 박자청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뭐냐고 했지. 그런데 함께 갔던 장경호 경기도박물관장이 “김 교수, 창덕궁은 500년 역사를 갖춘 유일무이한 존재야. 예의를 갖춰야 해”라는 거야.”
창덕궁 정문 앞에 현대나 공간 사옥이 버젓이 들어서게 하고 구석의 자그마한 건물에 시비를 거니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마음을 바꿨다.
“문화유적을 보호하자고 강조했던 내가 그렇질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시 돈으로 3억 다 날리고 다시 시작했지. 그렇게 해서 계단식으로 한옥을 짓고 창덕궁 담장과 신격호 씨 집 사이에 양옥을 지었어. 신격호 씨가 한편으론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했다고도 해. 6년 만에 건물이 완공됐어. 당초 8개월로 계약했는데. 4년 설계에, 짓는데 2년 걸렸지.”
그렇게 해서 고궁과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세계적 거장들까지 감탄하는 아름다운 건물이 태어났다.
전 세계 두 명 뿐인 천재 건축가
김 교수는 전 세계를 통틀어 두 명 밖에 없는 도시설계까지 하는 건축가다.
“중국도시학회 회장이며 학술원과 예술원 회원인 우량융(칭와대 교수)과 나 둘 뿐이야. 그래서 둘이 만나면 전 세계에 우리 둘 뿐이라며 서로 껄껄 웃으며 박자를 맞추기도 하지.”
실제 김 교수는 두 부문 모두 세계의 거장들이 인정하는 걸작들을 남겼다. 그에게 많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두 말 않고 여의도 도시설계와 예술의전당을 들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모시고 여의도 설계 했다고 말씀드렸지. 그게 바탕이 돼서 중동설계도 가능하게 됐다고….”
여의도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서울대 마스터플랜을 짰고 쿠웨이트 자하라 신도시, 중국 진저우 해상공단, 취푸 신도시, 베이징 경제특구, 캄보디아 프롬펜 iCBD, 아제르바이잔 바쿠 신도시 등 다수의 도시설계를 했다.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엔 경복궁에서 용산 국립박물관을 거쳐 예술의전당으로 이어지는 국가 상징가로 안을 내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 오랜 경험과 공력을 바탕으로 도시의 과거와 미래까지 생각하는 건축 작품도 숱하게 냈다. 쟁쟁한 외국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현상 공모에 당선돼 국내 독자설계와 기술로 건립한 대규모 공연장인 예술의전당을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것도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 힘은 자연과 전통을 까다롭게 지키기로 소문난 베니스 비엔날레에 1994년 마지막 남은 국가관으로 한국관을 세우게 했다.
고 이병철 회장도 찾은 실력
그는 공공건물 뿐 아니라 개인 주택도 많이 설계했다. 대통령까지 일을 맡기는 천재이니 돈 많은 재벌들이 그에게 집 설계를 맡아달라고 줄을 설 정도였다.
“내가 설계한 주택은 대개 200~300평짜리야. 재벌 총수들 치고 나한테 부탁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지. 스웨덴 대사관저를 지었는데 개관식 때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잖아. 거기에 온 B사장은 자기가 그 집을 사겠다고 했어. 박정희 대통령 별장을 짓자 이병철 씨가 그걸 사겠다는 거야. 승지원 원안을 그렇게 했지. 지금 승지원은 그걸 키운 것이야. 모든 재벌이 원했지.”
그렇지만 격무에 혹사한 몸이 망가지면서 청을 다 들어주지는 못했다.
“청이 많았는데 많이 못했어. 관악산(서울대 마스터플랜) 하고 해외에서 12년간 교수 하느라 틈이 없어 예술의전당만 했지. 이탈리아 베니스대와 중국 칭화대에서 12년 했고 8년을 삼성병원에서 살았으니…, 예술의전당 끝내고는 거의 못했다. 한샘 것도 베니스대에서 겨우 그렸어.”
자연을 최대한 살리는 건축
재벌들까지 탐내는 그의 건축엔 특징이 있다. 예술의전당이나 한샘 DBEW 디자인 센터 등 모두 빛을 잘 받아들일 뿐 아니라 안팎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조화와 연계가 뛰어나다. 김 교수는 최대한 자연을 이용한다며 말을 이었다.
“건축물은 사는 사람이 잘 쓸 수 있게 지어야 해. 용도에 맞게 지어야지.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는 만큼 에너지를 최소한 쓸 수 있게 해야 하고…. 자연으로부터 최대의 것을 받아들이는 게 최고의 건축이다. 거기엔 경관 뿐 아니라 햇빛이나 기온 바람 등도 포함돼.”
그러면서 건축에는 중요한 기능 세 가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사용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모든 건축물은 지금 사용자에게 특별한 용도가 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해야 한다. 둘째 건축물은 다중이 공동으로 소요하는 문화형식이다. 지금 서울시청 보고 잘 지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할 사람도 있지 않나. 세 번째는 앞으로 쓸 사람, 다시 말해 미래 세대에게 기여해야 한다.”
공부 안하는 건축계 질타
김 교수는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지 않은 건축계의 전통론이나 잘못된 이론에 근거한 창작론을 극렬히 비판했다.
“지금 건축계엔 해괴한 전통논리로 합리화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앞에서 얘기한 지금 사용자와 다중과 미래 세대 등 세 주체 외는 모두 문외한이다. 그런데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다. 마치 시를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이상을 천재라고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물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패당을 만들고 있다.”
저서 <만인의 건축 만인의 도시>에선 건축의 기본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전통 운운하는 것을 ‘자폐증적 전통론’이라는 극한 표현까지 써가며 비판했다.
그가 건축계 내부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은 한국 현대건축의 정통성과 전통의 문제가 너무나 유치하게 다뤄졌다는 판단에서다. 한마디로 지적으로 성숙되지 못해 견강부회와 자기미화가 심하다는 것.
그는 이 대목에서 스승인 김중업과 김수근의 작품을 거론하며 전통 운운하는 이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프랑스 대사관이나 공간 사옥이 한국적이라는데 그게 한국 전통건축과 무슨 미학적 연계가 있나. 그런 사람들이 건축언론을 장악하고 패당을 형성하며 진영논리를 펴고 있다. 프랑스 대사관 건물은 르꼬르뷔지에의 한국적 번안이며 공간 사옥은 일본 현대건축의 흐름을 따랐다. 그런데 정작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마치 아는 것처럼 얘기한다.”
프랑스 대사관은 김중업의 작품이고 공간 사옥은 김수근의 작품이다. 둘 다 그의 스승이라고 할 만큼 영향을 준 한국 건축계의 거목이다. 특히 김 교수 스스로 김중업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김중업이나 김수근의 작품조차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스승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두 건물이 자체로는 우수하지만 ‘한국적’이란 설명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다.
시대정신 살린 게 한국적인 건축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정신(Zeitgeist)을 매 순간 표현해야 한다. 한국 청동기의 수준은 중국 청동기보다 월등히 수준이 높다. 분청이 청자와 다르다고 그게 문제가 되나. 그 시대의 레토릭(Rhetoric)을 예술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한국적인 게 고려적인 것인가. 웃기는 얘기다.”
그에게 다시 건축을 정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건축은 구체적 필요에 의해, 현실적 수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건축은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시대에 서는 것이다. 왜 삼성동에 파리 뒷골목 건물이 들어서야 하나.”
한국의 전통을 오늘에 맞게 오늘의 언어로 말하는 건축물이 들어서야 한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최근 한국 건축계가 공부는 하지 않고 겉멋만 들었다고 질타했다.
“한국 현대건축은 박길룡의 계몽기적 추구 이전으로 퇴화하고 있다. 건축공학은 도태되고 뿌리 없는 사춘기적 창작 욕심만이 팽배해 있다.”
박길룡은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 청사 건립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공부하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에게 공부하라며 논어의 한 대목을 거론했다.
“공자는 행유여력이면 즉이학문(行有餘力 卽以學文 ; 논어 학이편)이라고 했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먼저 하고 힘 남으면 학문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행하지도 않고 여력도 없는데 학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술을 얘기한다. 삼류가 하는 짓이다.”
남북한 통합 마스터플랜 꿈꿔
김 교수는 지난 연말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제3기 위원장이 됐다. 병 때문에 한 시간 앉아 있기조차 버거워하는 그가 중책을 맡은 이유가 궁금했다.
“암 수술을 네 번이나 해서 사람 안 만나려고 했다. 전체 회의만 주재하겠다며 수락했는데 막상 맡아보니 그게 되나. 예산 따내야 하고, 장관도 수시로 만나야 하고…. 어머니께 국가 위해 봉사하려고 맡았다고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 말씀이 “그렇게 사람이 없나. 빨리 좋은 사람 앉혀놓고 나오라”고 하시더라. 그렇다고 은퇴하면 외롭지 않겠나. 여기 있으면 협회니 학회니 해서 외부 자극도 받고. (웃음)”
그가 힘든 와중에도 자리를 맡은 것은 목숨 걸어도 좋을 만큼 엄청난 일을 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투병 중인 사람이 그 자리를 맡은 것은 남북통합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다. 나 아니면 누가 하겠나. 나는 그런 역량이 된다. 이탈리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다. 그 사람 공산당이라 북한과도 통한다. MB 때는 김정일한테 가서 연설하자고도 했다.”
중견 건축가들에게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했다.
“지금 3000명의 건축가가 일이 없어 논다. 우리 정도 경제력에 건축가 5000명이 생업 이어나가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그들이 분발할 계기를 만들 것이다. 내가 프리츠커상 후보에 올랐는데 그걸 받으면 분발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은 그들에게 마약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국건위가 그들을 끌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을 살린 건축물을 남기는 작업도 하고 있다.
“상주에 한옥을 하나 짓고 있다. 일본엔 80%가 일본집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모두 아파트뿐이다. 어느 언론인이 한옥에 현대건축을 조합한 집을 부탁해왔다. 한옥만으로 지으면 비싸고 실용성은 떨어진다. 한옥의 멋과 실용을 겸한 집을 짓고 있다.”
그는 작은(?) 작업에 시간을 쪼개는 데 대해 평생 후회되는 것을 갚기 위해서라고 털어놨다.
“새마을 주택 할 때다. 표준설계 10개를 내겠다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서울대에서 차출되는 바람에 단 하나도 못해줬다. 그게 마음에 걸려. 일엔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김석철 교수
청출어람이다. 건축계의 두 거목 김중업과 김수근을 사사했으나 그들을 넘어 세계 건축계가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그는 원래는 수학을 하려고 했다.
“워낙 수학을 잘 했다. 고교 때 이미 대학 과정을 다 마쳤다. 그만큼 수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수학 하려던 것은 모든 학문의 왕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리철학 하려다보니 수학과 나오면 고교 선생 밖에 할 게 없는 거야. 서울대에 교수 자리가 딱 두 개 밖에 없는데, 그 교수들 죽기만 기다려야 해. 그래서 박종홍 교수께 자문을 구했다. 박 교수는 국민교육헌장 만든 인문 쪽 대통령 특보였지. 그 분이 자네같이 철학을 알고 공부가 맞는다면 건축을 하라고 해서 건축을 하게 됐다. 영원히 남을 거란 말씀이었다.”
건축을 배우러 진학한 대학에서 그는 엄청난 방황을 했다.
“학교를 2년 만에 마쳤다. 배울 게 없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길을 걸었다.”
대학을 나온 그는 김중업을 찾아가 취업을 부탁했다. 당시 날리던 김중업에겐 대학 마치고도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이 줄을 서고 있었으나 김석철의 인물됨을 알아본 김중업은 그를 받아들였다. 김석철은 4년 동안 그 밑에서 건축을 배웠다. 나중에 김포공항과 조선호텔 프로젝트를 하면서 김수근과 함께 일을 했다.
그렇지만 김석철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건축가는 이들이 아니라 프랭크 로이드 롸이트(Frank Lloyd Wright)와 로버트 벤츄리(Robert Venturi)라고 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롸이트에겐 직접 배운 게 아니라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창시자인 로버트 벤츄리에겐 실제 배웠고 많은 교류도 했다.
건축문화대상이 처음 제정됐을 때 김석철은 미술관보다도 더 미술관 같은 한샘시화공장으로 청와대 별관을 제치고 대상을 받았다. 공장이지만 예술적일 뿐 아니라 에너지 효율이 월등히 높았고 공사비도 아주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예술의전당으로 엮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소개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예술의전당 계획을 브리핑했다. 30~40분 정도 듣고는 아무 얘기도 없이 들어가던 대통령이 돌아서더니 “당신은 역사에 남을 거요”라고 하는 거야. 7년 전 초대해서 전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그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있어서 한국이 IT 강국이 됐다고 하더라. “내가 오명이를 7년 동안 장관 시켰거든.” (체신부를) 정통부로 바꾸고 전권을 맡겨 미래를 준비하도록 했다는 거야.”
학교를 나왔지만 그는 엄청난 공부로 학위라는 틀을 깨 버렸다. 하루 5시간씩 자면서 3년 정도 파고들었다고 했다. 그 양이 얼마나 될까.
“당시 법조계 다니는 사람들에게 내가 석 달 공부하면 되는 판검사 갖고 으스대지 말라고 했지. 내기하고 싶으면 하자고 했는데 아무도 응하지 않았어. 무작정 한 얘기는 아니야. 내 동생이 3개월 공부해서 법조인 됐거든.”
그의 동생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다.
그런 천재적 머리에 뛰어난 수학 실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새로운 건축 패러다임이 세계를 감동시킨 것이다. 아키반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도시와 길이 지하와 하늘로 연장되어 건축과 도시 공간이 하나로 된, 도시와 건축을 통합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병마가 그의 천재성을 가로막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1943년 함남 안변 출신. 경기고 서울대 건축학과. 서울대 응용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이탈리아 베네치아대·미국 컬럼비아대·중국 칭화대 객원교수. 현재 명지대 석좌교수, 국가건축정책위원장.
‘이탈리아문화훈장’ ‘베니스비엔날레 2004 특별상’ ‘건축문화대상’ ‘제1회 올해의 건축인상’ 등 수상.
저서 <만인의 건축 만인의 도시> <여의도에서 사대강으로> <건축과 도시의 인문학> <공간의 상형문자> <김석철의 세계 건축기행>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등.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