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 댓바람이라 했던가. 달빛 등지고 강변북로에 들어서니 부지런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시계보길 한 시간여, 어찌하여 겨우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에 들어섰지만 순서는 이미 꼴찌다. 나란히 자리한 네 명의 참석자는 이동훈 동아쏘시오홀딩스 대표이사와 윤문상 EBS 부사장,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 배양숙 삼성생명 FC 명예사업부장(상무보). 조찬모임이 뭐 대수냐는 듯 주거니 받거니 서로 담소하는 품이 오래된 친구처럼 정겹다. 네 사람은 배 상무가 자비를 들여 진행하는 ‘수요포럼 인문의 숲’에서 인연을 맺었다. 다양한 계층의 비즈니스 리더들이 모여 인문학을 경청하는 수요포럼은 지난해 2기 수료식을 마치고 올해 한국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 동양철학자이자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의 저자 신정근 교수는 한국철학 강의를, 이동훈 대표는 ‘세계경제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을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포럼의 주체가 배 상무라면, 윤문상 부사장은 자문위원을 맡았다. 서로 인문학이 좋아 만난 이들은 자고 나면 달라지는 21세기에 왜 인문학이 대세인지, 현 시대의 경영자(리더)에게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누가 경영자이고 누가 학자인지 경험과 학문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배 상무는 올해 한민족의 시원으로 알려진 러시아 바이칼에서 ‘수요포럼 인문의 숲 세계학술세미나’(8월 1일)를 개최할 계획이다. EBS도 40주년을 맞아 함께한다. 물론 이 여정에는 네 사람이 모두 동참 할 예정이다.)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네 분이 오랜 친구 같습니다. 이런 게 인연인가요.윤문상 부사장(이하 윤) ‘인문의 숲’이라는 포럼 타이틀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산뜻하잖아요. 살기 바쁘다보니 인문학을 잊고 지냈는데, 그런 친구를 만난 느낌입니다. 그래서 자문위원 제안을 받았을 때 바로 감사하다고 했어요.(웃음) 다양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매주 수요일 밤에 만나 무언가를 공부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이동훈 대표(이하 이) 2008년 즈음에 아이들과 대형서점에 갔다가 E.H.카(Edward Hallet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보게 됐는데 다시 보니 아주 조금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권씩 역사책을 보자고 원칙을 세웠어요. 그렇게 2010년까지 150여 권을 봤는데, 문제는 당시 사마천의 <사기> 완역본 6권을 본 후에 방향이 안 잡히는 거예요. 그때 후배가 수요포럼을 소개해줬습니다. 1년 동안 공부하니 해가 바뀌어서 방향이 잡히더군요. 지난해 10월에 250권을 채웠습니다. 나름의 성취인데 전혀 다른,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게 되더군요. 늘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배양숙 상무(이하 배) 신 교수님과의 인연은 제가 먼저 말해야겠어요. 수요포럼의 선생님이신데, 처음 강의를 부탁하려고 연락처를 찾아보니 휴대폰을 없더라고요. 없을 때의 여유를 누리신다는 데 연구실로 전화를 했더니 반응이 시큰둥하더군요. 연구실도 아니고 교수휴게실로 오라 길래 살짝 언짢았는데, 술술 대화하는 그 자체가 강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연구실에 책이 하도 많아서 사람 하나 앉아 있을 자리 밖에 없다더군요.
신정근 교수(이하 신) 여러 강사 분들이 많은데, 한 주제를 갖고 10번 이상 강의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단발이 전부인데, 바쁘신 분들이 모여서 1년에 30~40번씩 강의를 듣는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능력이 다양하신 분들도 많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이 많더군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니 모임이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다들 책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보입니다.윤-전 살면서 두 가지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가 강북에서 강남으로 25년간 출퇴근하면서 책을 읽은 것이에요. 처음엔 신문이나 매거진을 봤는데 다 보고 나니 아쉽더군요. 그래서 책을 집었는데 지하철이 나름 책방이 됐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했는데 과학 분야 책을 봤어요. 어찌 보면 독서는 오픈 마인드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미나를 즐겨 다녔어요. 아, 물론 세계지식포럼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죠. 책에선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이 대가들의 말 한마디에 탁 풀리더군요. 책을 많이 읽으면 저자들과 귓속 얘기를 나누는 친구가 된 것 같습니다. 100년 전 저자들과 연애하는 것 같은.
신-애인이 참 많으십니다.(웃음)
배-결국은 자양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분들이 (본인은 모르지만) 최고의 리더가 되기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 것 같네요.
윤-16년간 PD생활을 하면서 여러 명사들을 인터뷰했었는데, 성공한 분들이 가진 가장 값진 보물은 열정이더군요. 그건 에너지죠. 그게 고갈된 상태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문학 열풍이 대단합니다. 지금 이 시기에 왜 인문학일까요.이-대기업도 있고 중견기업, 중소기업도 있는데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어떤 기업이든 이젠 한 분야에 전문성이 있어요. 그런 기업들이 현재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 모임에 나가보면 ‘여기까지 정말 열심히 달려왔는데, 다음은 뭐지?’란 고민이 많더군요. 하던 대로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까지 했던 노사관계, 경영관리방식, 전략, 글로벌 진행 방식이 맞는 것인지 설왕설래 합니다. 제 경우는 인문학적 고찰이 경영자나 임원들에게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사고의 전환과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는데, 크게 보면 국민소득 2만4000달러에서 3만, 4만달러로 가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될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푸시하고 희생하자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동기를 부여해야죠. 전혀 다른 형식의 지평을 열어야 할 타이밍입니다.
신-물이 고여 있으면 썩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생각과 삶의 방식이 고여 있지 않고 흐를 수 있을까요.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전문성이 뚝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그 분야의 틀 안에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성이겠지만 만약 전혀 새로운 걸 한다면 무엇인가 배우지 않곤 틀 안에서 뱅뱅 돌게 마련입니다. 이 순간에 인문학은 그 틀을 휘휘 저어주기도 하고 사고를 전환해주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이야 인문학을 아름답고 고급스럽다고 생각하는데 굉장히 고통스럽고 부정적이죠. 왜냐하면 잘 살고 있는 이에게 시비를 걸거든요. 지금까지 해온 게 제대로 해온 것이고 과연 잘사는 것이냐고.(웃음) 행복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럼 정말 고통스럽죠. 별거 아니라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인문학은 질문을 피하지 않고 답하게 만들거든요.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윤-제게 인문학이 주는 가장 좋은 점은 소통인 것 같습니다. 험난한 세월을 경쟁관계 속에 살아 왔는데 그러다보니 깊이 들어가고 넓게 펼쳐야 될 시기가 왔어요. 소통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본질이 맞아야 이뤄지는데, 인생을 풍족하게 산다는 건 주변인들과 소통이 편하다는 것 아닐까요.
듣고 보니 경영자의 리더십과 맞닿은 부분이 많습니다.신-소통(疏通)을 말씀하셨는데, 중국에선 도랑 구(溝)를 씁니다. 나와 너 사이에 도랑이 없으면 통할 수 없다는 것이죠. 각자의 영역, 섬 속에 갇혀 있으면 통할 수가 없어요. 그럼 우린 왜 소통이냐. 빗질을 의미하죠. 머리카락이 제 갈 길을 제대로 찾아야 엉키지 않습니다. 리더십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요.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해만 쌓이게 됩니다. 인문학이라는 게 생각하고 말할 때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생각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리더십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배-아 그러고 보니 신 교수님이 새 책이 이러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면서요.
신-공자하고 손자에 대한 책인데, 손자는 현실을 만들었지만 역사는 만들지 못했고 공자는 현실에선 실패했지만 역사를 만들었다는 콘셉트입니다. 아직 제목은 잡지 못했는데, 아마도 1월 말이면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웃음)
윤-누군가 ‘내가 발견한 것은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예전에는 이 말을 굉장히 겸손하다고 생각했어요. 헌데 살면서 모래알 하나 발견하는 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의 리더십은 리더가 모든 걸 갖추고 따르란 것이었죠. 이제는 겸손한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할 것 같아요.
리더십의 덕목이 있을 법 합니다.신-과거에는 목표나 문제가 정해져 있어서 수학문제 풀듯이 해나갔는데, 지금은 해결은 해야 하는데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분들이 헷갈리고 불확실하죠. 과거의 리더십은 오직 하나였죠. 현실세계만을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들 중 하나가 현실이 됩니다. 그 다양한 세계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과연 그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에서 어떤 걸 선택할 것인가는 리더의 몫이죠. 최적의 선택은 앞으로 닥쳐올 시기에 리더가 갖게 되는 엄청난 고난 중의 하나일 겁니다.
이-비슷한 느낌인데, 현 시대의 경영자에게 필요한 건 오감이 아니라 육감이에요. 대부분 그 여섯 번째 감각을 자신의 경험에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감을 찾기 위한 노력이 굉장합니다. 우선 5년 전, 10년 전과 비교하면 조직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앞으로 5년, 10년 후도 그러한 노력이 이어지겠지요. 그런 면에서 전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일본의 미쓰비시 상사 분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자사에 뉴욕 주재원자리가 났는데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건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것인데, 나갔다오면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 조직이 정체돼 있습니다. 일본은 잘 나갈 때 리더(경영자)들의 사고 전환이 없었어요. 현재 우리가 당시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경영자들이 고민을 거듭한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죠.
그렇다면 한국의 리더들이 갖춰야 할 단 하나의 덕목은 무엇입니까.이-자신이 가장 잘 아는 무엇을 버려야 합니다. 과도한 사고의 전환, 이제는 카리스마적 리더보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배-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최상의 리더라고.(웃음)
이-그것이죠.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는 건 이제 필요 없어요. 오히려 일본처럼 될 수 있습니다.
신-종교학에선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일 처음 신은 최고신이죠. 왜냐하면 세상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데 세상을 만들어 놓기만 한다고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땅 신, 곡식 신 여러 분야를 담당하는 신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최고신 시대가 지나면 기능신 시대가 옵니다. 전문화된 세상이죠. 그러다보니 최고신은 물러나 있는, 숨어있는 신이 됩니다. 그러다 위기와 전환의 시대가 오면 다시 최고신이 판단하게 됩니다.
산업화 시대가 지나면 각각의 분야에서 약진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데, 그럴 때마다 최고신이 등장해 간섭하면 되겠습니까.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역할을 잘 조율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