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 고른 얼굴에 동그란 안경, 반듯한 이마에 홀라당 벗겨진 머리는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듯 반질반질했다. 셔츠 위에 남색 V넥 스웨터를 입고 진한 청바지에 검은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품이 지천명(知天命)과는 거리가 멀었다. 흡사 이세이 미야케의 터틀넥과 리바이스 501, 뉴발란스 스니커즈로 기억되는 스티브 잡스가 떠올랐지만 개구쟁이마냥 악의없이 웃는 표정은 사업가보다 소설가가 천진스러웠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작가,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52)가 방한했다. 신작 <제3인류>의 한국어판 출간과 데뷔작 <개미> 출간 20주년을 맞아 여섯 번째 한국행 비행에 나선 것이다. 그와 마주앉은 건 지난 11월 17일 경희대와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마련한 강연장에서였다. 행사가 시작되기 40여 분 전 짬을 낸 그에게 베스트셀러 작가란 게 때론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작품을 쓸 때마다 랭킹에 들어야 한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며 “마케팅은 발행인의 역할이 크다”고 씨익 웃었다.
“작품을 쓸 땐 제 내면세계를 담는 데 초점을 맞추죠. 전 글을 쓸 때 완성본이 최대한 예쁘고 멋지게 표현되길 바랍니다. 제 즐거움을 담고 독자들도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등장인물이 큰 고난을 당하지 않는,(웃음) 진정한 예술이 되려면 최대한 많은 이들이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수의 엘리트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수많은 대중을 만족시키는 게 사실 더 어려워요.”
어렵다고는 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내놓는 작품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5권 시리즈인 데뷔작 <개미>와 세계 체스 챔피언의 죽음을 다룬 <뇌>, 인간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나무> 등이 100만부를 넘겼고, 세계를 빚어낸 신들의 이야기 <신>은 140만부를 기록했다. 당연히 고정팬층도 두툼하다. 강연이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동양 최대 규모라는 경희대 평화의 전당이 시끌시끌한걸 보면 웬만한 한류스타 저리가라다. 그런 그도 출간이 기다려지는 작가가 있을까.
“아… 없어요.(웃음) 사실 전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읽게 되는 책이 줄어듭니다. 제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른 상상이 침투하는 걸 막기도 하죠. 만약 제가 임산부라면 더 이상 관계를 갖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겠죠. 비슷해요. 이미 제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 있거든요. 지금은 제3의 인류가 어떻게 새로운 인류로 구현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가끔 책을 읽을 때는 명상이나 영적 세계에 대한 책을 읽곤 하는데, 얼마 전에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어요. 철학적인 명상과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명상과 영적세계란 말을 반복하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상상력과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는 시발점으로 다가섰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그건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스스로 발전시키며 무엇인가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심성과 맞닿아 있었다.
“그렇죠. 제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무언가 새롭게 발견하는 입장입니다. 독자들도 스스로 발전시키면서 살아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알기에 한국의 교육 체계는 때로는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는데, 제 책이 학생들에게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하길 기대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건 이기주의와 다른 일
이날 강연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였다.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등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고유한 내면세계를 갖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이 즐거운 걸 망각하고 남의 행복을 위해 살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엔 부모님의 만족을 위해, 학교에선 선생님의 만족, 사회에선 상사의 만족, 결혼 후엔 배우자와 아이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어요. 그렇게 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은 뒤로 하고 있으니, 그게 문제죠. 평생 이렇게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건 실수이자 과오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건 자신의 영적 세계를 충족시키는 일이에요. 이기주의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강요받은 삶을 사는 게 쉬운 길일 수도 있지만 전혀 의미 없는 행위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 영매를 만났더니 제 전생이 101개였다고 해요.(웃음) 그 중 하나가 사무라이였다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그땐 주군에게 절대 복종하며 살았겠죠. 답답했을까요? 그런데 사실 복종하는 삶은 쉽게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해요. 하지만 스스로 판단해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건 가장 큰 문제죠. 가장 큰 걸 놓치는 삶은 의미가 없어요. 무조건 시키기만 하는 상사에게 아무 말 못하고 끌려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게 진정 나일까요?”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누구일까. 그는 영매의 말을 빌려 권태와 무조건적인 복종을 싫어하고, 지루할 땐 천문대를 찾아갈 만큼 별을 좋아하는 자신과 검도(막대기를 이용한 운동)를 익힌 후 결투를 즐기게 된 자신을 소개했다. 어린 시절 류머티즘을 앓아 지팡이 신세를 져야했던 베르베르는 의사가 권한 검도로 병이 호전됐다고 한다.
사람은 분명 태어난 이유가 있다
“전 책을 통해 제 생각을 전하는 작가입니다. 책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도구에요. 전 그걸 이용하는 사람이죠. 어쩌면 한국은 가장 역동적인 나라이기에 제 생각이 잘 읽히는 것 같아요. 한국에만 오면 새로운 중력의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먼 미래에 아마도 프랑스에선 잊혀진다 해도 한국에는 이러한 메시지가 남아 있을 것 같네요.”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첫째, 제대로 숨 쉬며 살아야죠.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생각보다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숨을 편하게 쉬어야 제대로 잠잘 수 있고 제대로 잘 수 있어야 건강할 수 있거든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논하다 대뜸 숨 쉬는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사람은 보통 배와 몸통, 어깨로 숨을 쉬는 데, 배로 숨 쉬는 복식 호흡이 가장 건강하고 신경이 예민해지거나 화가 나면 어깨를 들썩인다며 살짝 찡그린다.
“제대로 숨 쉴 수 있어야 뇌에 신선한 공기가 공급됩니다. 그래야 자신이 지구에서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우린 모두 무엇인가의 사명과 이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해 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물론 과정은 고통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과정을 마다한다면 평생 나비가 될 수 없어요. 전혀 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종이 위에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 10가지를 적어보라고 했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중요한 건 주변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수없이 반복했다.
“유독 아시아에선 타인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하더군요. 그런 이유로 도전하고 싶은데 주저하는 이들이 있어요. 평생 그런 시선을 신경 쓰고 산다면 삶을 포기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금 누군가에게 복종하며 살게 되겠죠. 다시 말하지만 그건 때로 쉬운 일이니까.”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죽어야 가장 완벽한 삶일까. 작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으로 ‘웃음’을 꺼내 들었다. 2년 전 출간된 작품 <웃음>에선 ‘인간은 왜 웃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꺼내놓기도 했다.
죽는 순간 웃을 수 있어야 진정한 삶
“전 죽는 순간 평온한 감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빈치의 작품이나 불상을 보면 그 미소가 온화하고 평온하지요. 어쩌면 인생에서 자신의 역량을 모두 발휘했을 때 그런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요. 우린 모두 엄청난 확률을 뚫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로또의 행운이에요. 그러니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게 좋은 방향일까요. 전 우리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인구 증가 속도를 줄이고 금속과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세상보다 자연적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부모세대에 대한 책임감과 미래세대에 대한 의무를 강조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갔을 때 과연 미래 세대들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현 세대의 삶이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곤 최근작 <제3의 인류>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소개했다.
“저는 미래세대를 위해 지구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우리가 수동적인 진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면 이젠 능동적으로 인간의 진화 방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진화에 대한 책임도 져야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은 상상력이죠. 삶이라고 다를까요.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 경지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역량의 원천 또한 상상력입니다. 누구나 상상력을 갖고 있어요. 당신의 선택이 의미있는 삶을 결정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7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61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고 국립 언론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을 발표해 오다 1991년 120여 차례 개작을 거친 <개미>를 출간했다. 데뷔작으로 전 세계 독자들이 주목하는 작가가 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후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영계 탐사단을 소재로 한 <타나토노트>, 독특한 개성으로 세계를 빚어내는 신들의 이야기 <신>, 제2의 지구를 찾아 떠난 인류의 모험 <파피용>, 웃음의 의미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낸 <웃음>, 새로운 시각과 기발한 상상력이 빛나는 단편집 <나무>, 사고를 전복시키는 지식의 향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35개 언어로 번역됐고 전 세계에 2000만부 이상 판매됐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