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산타클라라. 애플, 구글 등이 둥지를 튼 이곳에 엔비디아 본사가 자리한다. 샌토마스익스프레스웨이라는 대로를 두고 형성된 ‘엔비디아 타운’. 2017년 첫 사옥을 마련했고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2022년 두 번째 사옥을 완공했는데 사옥 이름이 각각 엔데버와 보이저다. 도전과 탐험이라는 기술 기업의 정신을 심기 위해서 두 건물 모두 우주 탐사선의 이름을 차용했다.
최태원 회장이 엔비디아를 찾은 건 2021년 5월. 첫 방문이며 젠슨 황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최 회장이 방문한 건물은 엔데버. 지붕은 삼각형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엔비디아를 있게 한 3D 그래픽의 기본 요소인 폴리곤을 형상화했다. 다들 로비에 들어서면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빌딩이 아니라 거대한 텐트, 돔과 같은 형태로 중앙이 비어 있고 외벽 쪽에 사무공간이 있는 구조다. 엔지니어들이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에 집중하기 좋은 구조다. 보이저는 거대한 텐트 안에 위치한 4층 높이의 건물. 4층 꼭대기에서 올라가면 정말 언덕 위에서 넓게 퍼진 캠퍼스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최 회장이 엔비디아를 찾았을 때는 아직 보이저 건설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당시 최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사절단으로 미국을 찾았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대미 투자를 압박해 왔고, SK그룹은 SK온을 통해 미국에 배터리 공장 건설을 발표했다. 귀국길 실리콘밸리에 들러 엔비디아 사옥을 방문한 것. <슈퍼 모멘텀>에 따르면 최 회장을 포함해 SK 측 임원 3인, 젠슨 황 CEO를 포함해 임원 세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엔비디아 한국지사에도 알리지 않은 극비의 만남이었다.
이 당시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SK하이닉스는 절치부심 끝에 HBM2E를 엔비디아에 다시 납품하지 시작했지만 아직 삼성에는 뒤처진 상황이었다. HBM 자체도 전체 D램 시장의 일부에 불과했고, 엔비디아도 지금처럼 시총 세계 1위의 기업이 아니었다. 엔비디아는 여전히 데이터센터보다 게임용 그래픽카드 매출 비중이 큰 회사였고, 매출은 지금의 13분의 1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2021년은 챗GPT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챗GPT의 기반 기술이 된 GPT-3가 막 등장해 AI 연구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긴 했지만, 그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소수에 그쳤다. 물론 황 CEO도, 최 회장도 GPT-3에 대해서는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래도 인공지능의 시대를 함께해 보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최 회장이 일찍부터 AI에 관심을 뒀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016년 알파고 쇼크를 계기로 AI에 눈을 뜬 최 회장은 그룹 내에서 AI의 가능성을 항상 강조해 왔고, SK텔레콤을 통해서 전세계 AI 트렌드의 움직임을 항상 지켜봐 왔다. 황 역시 GPU 칩 하나가 아니라 AI 생태계 전체를 보고 있었다.
황CEO를 만난 후 최 회장은 대만으로 날아가 모리스 창과 만났다. 최 회장과 모리스 창은 20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 아시아 비즈니스 리더들의 모임에서 자주 조우했다. 두 사람 간의 이때 회동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HBM이 대화 주제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고만 추측할 뿐.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인수할 때만 해도 SK하이닉스와 TSMC가 함께 하는 사업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HBM이 등장하면서 SK하이닉스의 HBM과 GPU를 함게 묶어 패키징하는 TSMC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모리스 창도 “나와 동업자가 되는 걸 환영한다”라는 메시지를 시장에 발신했다. 엔비디아-TSMC-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삼각동맹이 서서히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2023년 누구도 예상치 못한 AI 혁명이 시작됐다.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했고, 곧바로 빅테크 기업들의 AI 개발 레이스가 시작됐다. SK하이닉스가 HBM3를 공급하는 엔비디아에 GPU 주문이 쏟아졌다. SK하이닉스는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공급 능력 충만. 굳건한 삼각동맹은 2024년 HBM3E 최초 공급까지 이어졌고, SK하이닉스는 2023년과 2024년 HBM 시장에서 ‘완승’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2024년이 되면서 AI 시장의 움직임은 완전히 다르게 돌아갔다. 세상의 모든 자본과 관심이 AI에 쏠리기 시작하면서 AI는 더 이상 기술력의 싸움이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전쟁의 현장이었고, 다른 국가들도 ‘소버린 AI’를 내세우면서 독자 생존의 길을 찾았다. 기업 간 동맹도 중요해졌다.
최 회장은 이때부터 기존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2024년 4월 19일 SK하이닉스는 TSMC와 차세대 HBM 개발에 메모리·파운드리를 공조하기로 MOU를 맺는다. HBM에 대한 기술적인 요구치가 높아지면서 6세대인 HBM4부터는 TSMC와 같은 파운드리의 초미세 로직 공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TSMC와 협력관계를 강화한 것이다. 그다음 주 최 회장은 다시 미국 실리콘밸리 엔비디아 본사를 찾아 황 CEO를 만난다. 최 회장은 이를 자신의 SNS에 공개하면서 황 CEO와의 회동을 ‘혁신의 순간’이라고 적기도 했다. 그리고 6월에는 대만으로 날아가 웨이저자 TSMC 회장과 만난다.
SK하이닉스가 TSMC와 삼각동맹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개방형 협업이 가진 경쟁력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입장이 다르다. 파운드리 사업에서 TSMC의 경쟁자다. 그런데 AI 반도체에서는 삼성전자와 TSMC가 협력해야 한다. 삼성전자가 만든 HBM을 TSMC가 만든 엔비디아 GPU와 하나로 패키징해야 한다.
삼성전자의 목표는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TSMC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GPU도 만들어 주고, HBM도 만들어 주고, 이를 패키징까지 다 해주는 ‘턴키솔루션’을 추구한다. 세계에서 오직 삼성전자만 가능한 기술이다. 파운드리와 메모리 사업을 동시에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오랜 목표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TSMC는 완전히 배제된다. 삼성전자가 TSMC에게는 껄끄러운 파트너인 이유다.
이에 반해 SK하이닉스는 HBM만을 만든다. 메모리 기업이다. 베이스다이도 TSMC 것을 가져다 쓴다. 서로 경쟁하는 분야가 없다. 사실 엔비디아가 없더라도 TSMC와의 협력은 SK하이닉스에도 큰 기회다. HBM을 GPU와 하나로 묶는 패키징 기술인 CoWos(Chip on Wafer on Substrate)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은 TSMC 뿐이기 때문이다. AMD, 구글, 아마존 등 엔비디아로부터 독립해 자체 AI 반도체를 만들려는 모든 기업들도 결국에는 TSMC의 CoWoS 공정을 거쳐서 AI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
최 회장은 2025년부터 본격적으로 글로벌 행보에 나섰다. 지난해에는 4차례나 황 CEO를 만났다. 이 외에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오픈AI 의 최고위급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2025년 1월 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기자간담회에서 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SK하이닉스의 HBM 개발 속도가 엔비디아의 요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언제 가서 뒤집힐지 모르지만 ‘헤드 투 헤드’로 서로 빨리 만드는 것을 하고 있다”라고.
그해 11월 SK AI 서밋 2025 기조연설에서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SK하이닉스를 ‘메이저 서플라이어’(핵심 공급사)로 찍었다. SK하이닉스 기술력은 이미 업계에서 어느 정도 증명이 됐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우리에게 더 이상 개발 속도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충분히 준비돼 있다는 이야기”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HBM으로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AI 혁명의 핵심 기여자가 됐다.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 TSMC가 재평가받는 것처럼 SK하이닉스도 ‘빅테크’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4월 20일 종가 기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832조원에 달한다. 전 세계 기업 시가총액 21위다. 2011년 SK그룹이 3조4000억원을 들여 지분 20%를 인수할 당시 시총 13조원이었던 회사가 15년 만에 64배로 기업가치가 올랐다. SK하이닉스의 2026년 1분기 영업이익은 40조원에 육박하고 연간으로는 200조원이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미 삼성전자가 1분기 영업이익에서 57조원이란 경이로운 숫자를 만들어 냈고 연간으로 300조원을 넘보고 있다.
다음 단계는 최 회장의 말대로 SK를 ‘글로벌 중앙 무대’로 진출시키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올해 ADR를 발행해 미국 증시에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SK그룹은 올해 초 미국에 ‘AI컴퍼니(가칭 AI co.)’라는 투자회사를 세웠다. SK하이닉스로부터 100억달러, 다른 SK계열사로부터 출자까지 총 16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이 모이게 된다.
AI라는 천운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운이 있었다 한들 그 운이란 것도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따돌리고 HBM 1등 회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만의 차별화된 제품을 준비해 왔기 때문이었다.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독한 마음 먹고 10년을 견디고 대들면서 만들어 낸 영광이었다.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