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8월 초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를 지낸 고(故) 구본영 씨를 이어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된 이석채. 한 달 남짓 지난 가을 어느 날 김영삼 대통령(YS)으로부터 직통 전화가 걸려 온다. 전화를 받자 마자 육두문자가 귓전을 때렸다.
원래 다혈질인 데다 화가 나면 욕도 심하게 하는 스타일임을 잘 아는지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날은 유독 불같았다.
“야, XX야. 네가 뭔데 함부로 날뛰어. 여기(청와대)가 네 집이가.”
YS는 청와대 참모 중 누군가로부터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난 기사에 대한 보고를 받자마자 경제수석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멕시코 금융위기가 아시아 지역에도 번질 것인가를 분석한 글인데 태국 등 동남아는 어렵지만 한국은 괜찮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거 봐라. 내가 잘하지.” 그 소식에 YS는 고무됐다. 한국경제는 위기 국면이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에게 스트레스를 준 이석채가 밉게 보였던 터였다. 혼내줄 기회가 온 것이다. 이 수석도 질책을 받기 전 그 기사를 읽었지만 전화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될 것 같아 집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YS는 의자를 젖혀 뒤로 등을 한껏 누이고 발은 책상에 걸쳐 놓은 채로 이 수석을 맞았다.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고 그럴 때 흔히 나오는 자세였다.
“뭐야, 말해봐.”
대통령이 눈을 치켜뜨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 이 수석. 그에게 따라다니는 별명 중 하나가 독일 병정이었다.
“보고받는 자리로 옮기시지요. 여기서는 보고가 안 됩니다.”
YS가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옮겼다.
이 수석이 말문을 열었다.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우리나라 데이터가 옳다는 전제로 쓴 글입니다. 그런데 만약 데이터가 틀렸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강성 노조로 임금이 가파르게 올라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습니다. 그게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기업들은 마치 <삼국지> 적벽대전에 나오는 연환계처럼 몸을 묶고 있어 어디 하나가 잘못되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저는 아르헨티나를 닮아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걸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
그러고는 역사에 남고 싶어 하는 YS를 자극했다.
“대통령님은 경제를 망친 대통령으로 남고 싶습니까? 아니면 위기를 수습한 대통령으로 남고 싶습니까?”라고.
경제전문가라는 사람마다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좋다고 말할 때 경제위기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위기의 경고음을 울린 곳이 있었다. 매일경제신문이 그러했다. 발행인을 맡았던 장대환 사장은 매일 편집국 보고를 받고 매주 편집국 데스크들을 모아 회의를 주재했는데, 내용인즉, 기업은 물론 민간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체감 경제는 정부 발표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사회 누군가는 “지금은 진짜 경제위기”라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문 지면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장 사장은 편집국 간부들에게 사회 전반에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메가톤급 기획을 주문했다.
그러다가 찾은 것이 이른바 국가컨설팅. 매일경제신문이 한국경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향후 비전, 그리고 행동계획을 제시하는 대국민 보고대회를 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도출됐다. 크게 3가닥으로 틀을 짰는데 ①외국 컨설팅사에 용역을 의뢰하는 ‘21세기 액션 프로그램 도출’ ②산업정책연구원과 공동 진행하는 ‘도시경쟁력’ ③맥킨지가 수행하는 ‘한국의 생산성 분석’이었다. 이중 도시경쟁력 프로젝트는 조동성 서울대 교수가 매일경제를 찾아와 같이 하자고 제안한 거였고 ‘한국의 생산성 분석’은 글로벌 컨설팅 1위 기업인 맥킨지가 자체 비용을 들여 한국 시장에 확고한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차원에서 거시적 생산함수의 모델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MIT 대학의 로버트 솔로 교수에게 용역을 의뢰한 것이었다. ② ③번 모두 매일경제가 미디어 파워를 통해 홍보를 잘해줬으면 하는 부탁이었다.
핵심은 ①번이었다. 이건 외국 컨설팅사에 우리가 용역을 의뢰하고 직접 리소스도 투입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용역비를 지불해야 했고 매일경제도 취재 및 프로젝트 보조 인력을 별도로 차출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매일경제신문의 기획에 동참한 글로벌 컨설팅사는 부즈앨런 & 해밀턴(한국대표 장종현 파트너)이었다. 장종현 대표는 그러나 고액의 자문료를 요구했다.
“한국 컨설턴트만으로는 어림없다. 본사 소속 전문 컨설턴트 2명을 풀타임으로 투입하고 자료 확보 등을 위해 글로벌 리소스를 동원하겠다.”
매일경제에 제시한 컨설팅 요금은 150만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12억원이 넘는 금액으로 감히 상상하지 못할 액수였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상협 기획특집부 기자(현 글로벌녹생성장기구(GGGI) 사무총장)의 회고.
“장종현 대표가 부즈앨런의 정책이라며 신문사를 상대로 상당액을 요구해 실무진들이 다들 놀랐지요. 그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실무진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게다가 부즈앨런에 지급할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환율을 골라 계약일을 잡기까지 했습니다.”
매일경제와 부즈앨런 간 협상이 이뤄지기 몇 주 전 장대환 사장과 장종현 대표의 골프 회동이 있었다. 1996년 늦가을 장 사장이 장 대표, 지금은 고인이 된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과 또 다른 지인 한 분을 안양 베네스트 CC로 초대했다. 장종현 대표는 당시 장대환 사장이 이런 생각을 자신에게 털어 놓았다고 한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다. 약 1년이 좀 더 남았는데 지금 한국경제가 매우 중차대한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액션플랜을 민간 차원에서 만들어 새 정부에 제시해 보는 게 어떻겠냐?”
장종현 대표는 무릎을 쳤다. 장 대표도 한국경제에 대해 나름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던 터였다.
“본사 컨설턴트 등과 수시로 논의를 하는데 크게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는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 모델이 끝났다는 것. 둘째는 한국은 당시 홍콩, 싱가포르, 대만과 더불어 아시아의 4룡(龍)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이때 중국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매일경제 장 사장이 경제진단을 하자고 운을 떼니 통 크게 일을 벌여 보자고 한 것입니다.”
장 대표는 “당시 우리가 제시한 150만달러가 큰 금액인 줄은 안다”라면서도 “매일경제 장 사장이 단칼에 자르지 않고 고민 좀 해보겠다고 했는데 그 당시 나는 설마 이 금액을 우리한테 다 줄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이 있었다”라고 토로한다.
매일경제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금액을 우리가 지불하기엔 벅차다. 민간 기업에게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겠지만 누가 선뜻 그런 거액을 내놓겠는가. 그래서 아예 정면 돌파하자. 국가컨설팅을 해주겠다는데 국가가 용역비를 지불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정부를 설득해 보자고 덤벼들었다. 이 때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석채였다.
유독 을씨년스러운 가을날이었다. 경제는 좀처럼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뭔가 중병에 걸린 듯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매일경제신문 강영철 부장이 이 수석에게 면담 요청을 하고 미팅 날짜를 잡았다. 김상협 기자가 동행했다.
이 수석은 매일경제의 제안을 반겼다. 그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제안을 매일경제가 들고 갔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 병정이란 별명답게 옳다고 생각하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강골 관료였다. 곁가지 정무적 판단에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참모진들이 반대했다. 구체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매일경제가 사세도 그렇게 확고하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영향력이 정상에 속하는 신문사가 아닌데 거기다가 정부 예산을 집어넣으면 다른 언론사가 가만히 있겠느냐는 반론. 둘째, 우리도 한국개발연구원(KDI) 같은 연구기관이 있고 거기엔 최고급 인재들이 포진해 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외국 컨설팅사에게 거액을 주고 맡기면 국회를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 이렇게 두 가지가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반론은 과연 그런 대한민국 경제에 대한 진단 및 비전 제시 프로젝트가 필요한가였다.
이 수석이 특유의 근엄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왜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하냐고 따지면 그건 내가 답하겠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고 비난도 내가 받겠다. 그리고 당신들이 지적한 두 가지. 첫째, 왜 매일경제에 돈을 주느냐? 다른 언론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면 그리하라 해라. 그런데 다른 언론사가 아이디어 내더냐? 그런 제안을 한 적이 있느냐? 매일경제가 한 거 아니냐. 그럼 매일경제에게 맡기는 거지. 뭐가 잘못됐나? 내가 매일경제와 특수관계도 아닌데.
또 나머지 한 가지. KDI 같은 국내 연구기관 얘기했지. 그들이 언제 한국경제가 위기라고 말한 적이 있더냐. 늘 정부 입맛에 맞게 경제 잘된다고만 했지. 외국 컨설팅사를 통해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진단하겠다는데 고마운 거 아니냐?”
그렇게 해서 매일경제는 민간에선 처음으로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나라 밖에서 예를 찾자면 1995년 홍콩경제 전문가연합회가 실시한 ‘홍콩 21’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참고로 이 당시 정부 예산은 5억원이 KDI를 통해서 집행됐고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를 설득해 나머지 예산을 조달했고 부족한 부분은 매일경제신문이 자체적으로 커버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6호 (2026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