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본래 귀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왕이나 귀족, 사제나 학자 같은 소수만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지식의 정수인 책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권력자들은 신의 비밀을 알려주고 통치의 비결을 담은 책을 한 장소에 모아 독점하려 했다. 10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인쇄 혁명이 일어나고, 15세기에 활판 인쇄술이 서양에 전해져서 누구나 책을 쉽게 손에 쥘 수 있을 때까지, 지식은 소수의 손에만 머물러 있었다. 오늘날 지식은 너무나 흔해져 버렸다. 네모난 창을 열고 적절한 질문을 적어 넣으면, 언제 어디서나 무슨 답이든 곧바로 쏟아내는 기계들 덕분이다. 특히, 인공지능은 지식과 정보를 특권 삼아 살아가는 이들을 크나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기계는 세상 모든 지식을 두루 섭렵한 다음, 적당한 형태로 가공하고 정리해 최적의 답을 내려준다. 이제 머릿속의 앎을 남 앞에서 자랑하는 건 바보로 보이기 딱 좋은 일이 되었다.
바둑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프로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바둑돌을 놓을 때마다, 인공지능이 그 유불리를 즉각 계산해서 결과를 알려준다.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딱 절반씩 나누어졌던 흑백 영역이 한 수 한 수에 따라 미세하게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걸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복잡한 상황에서 다음에 어떤 수를 두는 게 최선일지도, 그 변화가 어떠한지도 명확히 알려준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바둑을 두거나 보는 재미가 크게 줄어든 건 아니다. 모든 게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길을 찾아내는 데 익숙하다.
일찍이 붓다는 세상 모든 게 영원하지 않고, 모든 존재가 불완전함을 알았다. 이것은 궁극의 앎으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법칙이었다. 실망하고 좌절했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히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끝에 그는 집착을 끊고,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깨달아 끝내 해탈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끝이 아니다. 모든 앎은 다른 앎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뜻할 뿐이다.
지식과 정보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우리 삶을 멈추게 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모든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를 좌절시키진 않는다. 오히려 한 번뿐인 이 삶을 순간순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열렬히 삶을 살아갈 이유를 제공해 줄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유명한 서양 속담은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에 더욱더 충실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좋지만, 아무리 많은 앎도 그 자체로는 별것이 아니다. 그 앎을 어떻게 다루어 내 삶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게 달라진다.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싱긋)에서 디자이너 박찬휘는 앎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독일어에는 ‘알다’라는 뜻이 있는 단어가 두 가지 있다. 케넨(kennen)과 비센(wissen)이다. ‘케넨’은 몸으로 직접 겪어서 깨닫는 것이고, 비센(wissen)은 책이나 강의로 배워서 아는 것이다. ‘케넨’은 우리말의 지혜에, ‘비센’은 우리말의 지식에 대응한다. 인공지능과 문답을 거쳐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비센’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앎을 착각한다. 우리말에서는 두 가지 모두 ‘알다’라는 동사 하나로 통용되는 까닭이다.
박찬휘에 따르면, 지식은 ‘답변’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정해진 답이다. 지식은 ‘○○이란 ○○○○이다’의 형식, 즉 “완성된 질문의 끝에 답이 있는 선형적 텍스트 형태”를 띤다. 어떤 사람이 지식을 얻는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자기 안에 어떤 질문이 생기고,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 그와 관련한 답을 찾는 과정, 적절한 답을 찾아 이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지식의 가장 큰 장점은 시행착오를 줄여준다는 점이다. 이미 정해진 답을 향해 직선으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지식엔 여러 단점이 있다. 특히,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에 함몰되는 순간, 창의적 사고도, ‘나’라는 주체도 사라져 버린다.” 어떤 질문이 생기고, 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걸 고민하고 또 깨닫는다. 그 고뇌의 와중에 다른 질문이 생겨나면서 사고가 여러 갈래로 분기한다. 때로는 처음에 자신이 품은 질문이 허깨비 같은 ‘가짜 질문’임을 알기도 한다. 이 과정 자체가 공부의 진짜 모습이다.
옛날에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적이고, 멀리까지 스승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들어서 답을 알아내곤 했다. 이럴 땐 무언가를 아는 일이 그 자체로 피어린 고투의 과정이고, 하나의 풍부한 경험이 되었다. 그렇게 얻은 지식에는 저절로 자신만의 통찰과 지혜가 깃들었다. 그런데 정제된 답을 찾아서 곧바로 나아가면, ‘사고의 외주화’가 일어나면서 다른 질문들, 다른 답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인공지능의 검색 창은 다른 사고, 다른 대답의 존재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런 지식에 길들면, 창의성은 갈수록 고갈된다.
요즘, 인공지능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다룬 글들이 무수하다. 그 모든 글에서 공통으로 권하는 게 하나 있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란 말이다. 이를 ‘프롬프트 디자인’이라고 한다. 이 그럴듯한 말이 바로 함정이다. 그렇게 질문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이미 정해둔 답, 바라는 답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질문을 좁힐수록, 답도 좁아지는 까닭이다. 그러면 “두루뭉술한 대답이나 내가 예상한 답이 아니면 쉽게 배척해 버린다.” 공부는 파편적 지식의 기계적 습득으로, 탐구는 굳어진 신념의 반복적 확인으로 바뀐다. 이는 지식을 “가능성의 시야를 넓히는 쪽이 아니라 좁히는 쪽으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다른 길이 있다. 명확한 답을 찾는 대신 시도와 탐구를 거듭하면서 느리게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단순히 지식을 빨리 습득하는 걸 목표 삼지 않는다. 지혜는 어떤 지식을 삶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적용하고 실현하려고 할 때 생겨난다.
아는 게 없으면 지혜로울 수 없기에 우리는 끝없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식의 양이 지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책상물림은 현장에서는 무능력하기 십상이다. 지식은 고정된 게 아니다. 지식을 절대화해서 아무 생각 없이 추종하기보다 내 몸과 마음에 맞추고, 상황과 장소에 맞게 이용하며, 삶의 방향과 목적에 따라 자유롭고 용기 있게 변형하는 일에서 비로소 경험을 품은 지식, 즉 지혜가 생겨난다.
요리의 명인들은 책이나 유튜브를 좇아 요리하지 않는다. 먹는 사람에 따라, 그날그날 재료의 상태 따라, 극도로 단련한 손끝의 감각으로 다르게 요리한다. 정해진 지식에 갇히지 않는 사람만이 창의성을 얻는다. 박찬휘는 말한다. “지혜는 옳은 길을 따라 걷는 게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다 만나는 일이다.” 지식이 흔해진 시대, 빠르고 쉽게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품어야 말이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