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국제 금 값은 30% 가까이 올라 2010년 이후 최고의 실적을 냈다. 중동 지정학 리스크와 더불어 주요국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중앙은행들의 금 매수세에 힘입은 결과다.
2024년 한국 공모 펀드 중에서는 인공지능(AI)과 금융주를 비롯해 ‘안전자산’ 금 테마가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수익률 3위를 기록한 ETF는 금 펀드였다. 금 펀드는 2024년 1월부터 12월 중순까지 25% 가까이 올라 AI와 금융 ETF 수익률을 이었다. 일례로 ‘iM에셋월드골드증권자투자신탁(주식-재간접형)(UH)(C-Rpe)’은 지난 12월 중순까지를 기준으로 35.52% 올랐다. ‘IBK골드마이닝증권자투자신탁1[주식]종류C-Re’는 27.42%, ‘미래에셋골드특별자산자투자신탁(금-재간접형)종류C-e’는 26.69% 상승했다.
에프앤가이드의 금 펀드 테마에선 제외됐으나 ‘ACE KRX금현물’은 같은 기간 45.91% 오르며 금 펀드 평균 수익률을 20%포인트 이상 웃도는 성적을 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되는 금 선물과 런던금속거래소(LME) 에서 거래되는 금 현물 시세가 한 해 동안 각각 30% 넘나드는 상승률을 기록한 결과다.
새해 한국 투자자들의 금 수요를 자극하는 변수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 금리 인하 사이클, 두번째는 중국발 금 수요 재개, 세번째는 한국 정치 혼란에 따른 안전자산 수요다.
2024년 12월 중순 국제 금 값은 5주 새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정학적 긴장감이 다시 커지고 연준이 추가로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예상이 금 수요를 끌어올린 결과다. 당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2025년 2월물 금 선물 가격은 전거래일보다 1.2% 올라 1트로이온스당 2718.40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종가 기준 2024년 11월 5일 이후 5주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종가 기준 2700달러 선을 다시 탈환한 것도 같은 해 11월 22일 이후 약 3주 만이다.
우선 지정학 리스크를 보면, 중동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안전 자산’으로서의 금 매수세를 자극하는 부분이다. 이스라엘군은 이란과 레바논에 이어 시리아 정부군의 전략 무기가 남아있는 군사시설을 대규모로 공습하는 등 중동 갈등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이스라엘 해군 미상리함이 시리아 해군 함정 15척이 정박해 있는 알바이다항과 라타키아항 두 곳을 타격해 사거리 80∼190㎞의 미사일 수십기를 파괴하고, 이스라엘군 전투기도 시리아 영공에 진입해 다마스쿠스와 홈스, 타르투스, 라타키아, 팔미라 등 주요 지역 소재 시리아군의 대공포대와 공군 비행장, 무기 생산시설 등을 350여 차례 폭격하는 식이다.
미국 연준이 ‘금리 인하 속도 조절론’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해에 어쨌든 금리 인하를 할 것이라는 예상도 금 선호도를 키우는 부분이다. 제러미 시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경영대학 재무학 교수는 “모든 것이 연준 바람대로 흘러가고 있다”며 “미국 경제가 탄탄하게 흘러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새해 금리 인하 횟수는 2~3차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원자재·금속 거래 중개업체인 재너 메탈스의 피터 그랜트 부사장 겸 수석 금속 전략가는 “휴전 합의 등 소식에도 불구하고 중동 지역 내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안전 자산으로서 금 매수를 자극하고 있다”며 “또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국 기준 금리 완화 추세도 주목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통상 금은 보관에 따른 이자가 없기 때문에 시중 금리가 높을 때는 금 투자 수요가 줄어들고 금리가 떨어질 때는 수요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2025년 1월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하면 트럼프의 고율 관세 정책에 따라 미국 내 수입 물가가 오르고 이로 인해 전반적으로 물가 상승 압박이 커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연준이 금리 인하를 더 늦출 수 있지만, 금은 인플레이션 헤지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수요가 꾸준할 것이라는 전망도 따른다.
2024년 금 값 급등 사태의 배경이 됐던 중국이 다시 금 매수에 나서는 것 같다는 소식도 금 값을 다시 끌어올리는 배경이다. 중국 중앙은행 격인 중국인민은행은 미국 달러화에 맞선다는 취지로 금을 사들인 결과 세계 최대 금 매수국으로 올라섰지만 2024년 5월을 기점으로 18개월 간의 매수 행진을 중단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파와드 라자크라다 포렉스닷컴 연구원은 “중국은 최대 금 소비국인데 특히 선물용 보석 수요가 증가하는 춘절 연휴를 앞두고 금값이 강세를 보일 여지가 있다”고 전망했다. 춘절은 한국으로 치면 설 명절과 비슷한 연휴로 통상 매년 1월 혹은 2월에 걸쳐 있다.
스위스계 투자은행인 UBS의 지오바니 스토보노 연구원은 “미국의 기준 금리 인하 추세와 세계 중앙은행들의 지속적이고 견고한 금 매수세가 금 값을 떠받치는 변수”라며 “중국인민은행이 2024년 11월부로 금 매수를 재개한 것이 확실한 호재로 주목받고 있지만 다른 주요국 중앙 은행들도 대량 매수를 이어왔다”고 말했다. 2024년 12월 7일 중국인민은행은 “2024년 11월부로 금 매수를 재개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중국인민은행에 따르면 2024년 11월에 사들인 금은 16만 트로이온스에 해당하며 이에 따라 전체 금 보유량은 총 7296만 트로이온스로 늘어났다. 싱가포르계 OCBC은행은 “미국 2024년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중국 매수세를 자극한 직접적인 변수로 보인다”면서 “중국이 미국 대선 이후 금 매수에 나선 것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지키려는 취지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는 정국 불안이 금 수요를 자극한다는 분석이 따른다. 2024년 12월 3일 있었던 사상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와 이에 따른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인해 국내 증권·외환 등 자본시장이 요동친 여파다.
실제로 국내 은행을 통한 골드바 판매액도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5대 시중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취급하는 골드바는 12월 4일 하루에만 15억원 넘게 팔렸다. 이는 5대 은행의 골드바 하루 평균 판매액이 7억~8억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두 배 가까이 급증한 셈이다. 이어 대통령 탄핵정국이 본격화된 지난 12월 5일 골드바 하루 평균 판매액은 9억8900만원, 6일 13억3500만원에 이어 9일엔 16억1700만원어치의 골드바가 팔렸다. 골드바 같은 금 실물은 거래 시 부가가치세·수수료(약 15%)가 발생한다. 보관 비용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늘어난 데 대해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골드바는 ‘보유’ 목적이 강한데 계엄 이후 탄핵정국과 금융시장 불안정 때문에 실물 금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히 골드바는 정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장년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급증했는데 보유 성격이 강한 골드바보다 투자 성격이 있는 골드뱅킹이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골드뱅킹을 취급하는 시중은행 3곳(KB국민·신한·우리은행)의 2024년 12월 9일 기준 골드뱅킹 잔액은 7539억원으로 집계됐다. 계엄 선포가 있기 전인 11월 초 골드뱅킹 잔액(7448억원)과 비교해 91억원 늘었다. 골드뱅킹이란 실물 금을 직접 들이지 않고 은행 계좌를 통해 금을 0.01g 단위로 매입할 수 있는 투자상품이다.
2024년 금 값이 이미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금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정치적 불안정과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내에서 금 값은 2024년 초 1그램(g)당 8만원 선이었다가 12월 비상 계엄 후 12만원대까지 올랐다. 앞서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 때도 국내 금값이 오른 바 있다.
탄핵 정국 혼란이 더 이어지는 경우 특히 국내에서 금 값 추가 상승 여지가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금융권에서는 새해 2분기까지 정국 불안이 이어진다면 골드바나 골드뱅킹 외에 금 상장지수펀드(ETF) 등 수요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
월가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중국인민은행이 위안화 약세 시기에 금 수요를 더 늘릴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중국의 금 매입 확대는 금값 상승을 뒷받침할 만한 요인이다. 골드만삭스는 새해 초 금 값이 29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봤다. 글로벌 금리 인하와 지정학적 위험, 중앙은행의 수요 확대 등에 금값의 점진적 상승이 근거다.
씨티그룹은 “중동 지역의 긴장이 지속하고,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금을 사들이고 있어 금값 상승세가 이어질 것”이라며 6~12개월 안에 금 값이 3000달러를 기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네덜란드계 투자은행 ING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트럼프 2기 정부는 궁극적으로는 금값 상승 압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인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