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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 잃고 뱃살 늘면, 폐도 ‘헐떡’ 기능 저하 최대 4배
입력 : 2025.05.21 1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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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단 몇 층만 올라가도 가슴이 콱 막혀요.” 50대 직장인 김모 씨는 검진 결과 ‘근감소성 비만’을 진단받았다. 근육은 빠지고 뱃속 내장지방이 늘어난 상태다. 서울아산병원 건강의학과 연구팀이 발표한 대규모 분석에 따르면, 이런 몸 상태는 단순히 복부 비만이나 혈당 문제를 넘어 ‘폐 나이’까지 앞당긴다. 연구진은 “근육량이 부족하고 내장지방이 많은 사람은 폐기능 저하 위험이 최대 4배”라고 경고한다. 흡연하지 않아도 매일 느끼는 숨 가쁨의 배후가 근감소성 비만일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2012년 1월~2013년 12월 서울아산병원 건강증진센터에서 검진받은 성인 1만 5827명(남 9237명·여 6590명)의 복부 CT와 폐활량 검사 자료를 정밀 비교했다. CT로 허리에 얇게 한 컷 슬라이스를 찍어 ‘지방이 거의 없는 건강한 골격근’과 ‘장기 주변 내장지방 면적’을 각각 계량화했다. 이후 나이·체질량지수(BMI)를 바로잡아 근육·지방을 상·하 25%씩 네 등급으로 분류했다. 동시에 노력성 폐활량(FVC)과 1초간 노력성 호기량(FEV1)을 측정해 ‘사진’과 ‘숨소리’를 포개 본 것이다. 같은 장면을 CT와 폐활량으로 동시에 들여다본 국내 최대 규모 연구라는 평가가 나온다.
근육은 방패, 지방은 족쇄결과는 예상보다 극명했다. 남성 그룹의 근감소성 비만(근육↓·지방↑) 그룹의 폐기능 저하율은 19.1%. 근육↑·지방↓ 그룹(4.4%)보다 4.3배 높았다. 여성은 각각 9.7% vs 3.1%로 3.1배 차이가 났다. 반대로 근육 상위 25% + 내장지방 하위 25% 조합은 성별 불문 폐활량 지표가 ▲FVC 3~4% ▲FEV1 3% 이상 높았다. 연구팀은 “횡격막·늑간근 같은 호흡근이 탄탄하면 흉곽이 활짝 열리고, 반대로 내장지방이 많으면 장기들이 횡격막을 밀어 올려 폐 팽창 공간이 줄어든다”라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체중계 숫자가 ‘정상’이어도 내장지방이 많으면 폐활량이 3~5% 낮았다는 점이다. 이른바 ‘마른 비만’이다. 근육량이 적고 내장지방이 숨어 있으면 가늘고 긴 체형이라도 흉곽 용적이 줄고, 만성 저강도 염증이 폐포를 자극해 호흡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초기에는 증상이 가볍다 보니 “살 안 찌는데도 숨이 차다”는 호소가 잘못된 진단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근육 1kg이 만드는 ‘깊은 호흡’근육은 단순한 힘줄 덩어리가 아니다. 연구진은 “건강한 근육 1㎏ 증가는 울대 아래 ‘호흡 펌프’를 강화하는 작은 발전소와 같다”라고 비유한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줄면 휴식 시에도 호흡근 수축‑이완이 둔해지고, 심호흡 시 흉곽 확장이 제한된다. 근육이 빠지는 속도가 폐활량 감소 곡선과 거의 평행을 이룬다는 해외 추적 연구도 있다. 결국 “근력 + 유산소를 조합하면 노년 폐활량이 가파르게 꺾이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내장지방이 부르는 염증의 ‘숨 막힘’왜 지방은 폐를 쪼일까. 첫째, 기계적 압박이다. 복강 내 지방이 늘어 장기가 앞으로 밀리면 횡격막이 위로 올라가 흉강이 납작해진다. 둘째, 비만 관련 전신 염증이다. 만성 저강도 염증은 기도 과민성을 높이고, 가벼운 감염에도 과도한 염증 반응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폐 기능을 줄인다. 폐 건강 수칙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금연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금연 다음 단계’로 체성분 관리에 확실히 이름표를 붙였다.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에 따르면 국내 COPD 환자는 2024년 기준 1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치료비와 생산성 손실을 합하면 연 1조원을 웃돈다. 이번 연구가 시사하듯 근감소성 비만 조기 관리만으로도 미래 COPD 부담을 줄일 가능성이 크다.
예방의 관점에서 “폐활량 검사는 주로 흡연자에게만 권했지만, 앞으로는 40대 이상·좌식 생활·복부 비만인 사람에게도 정기 검사를 권해야 한다”라는 보건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구 대상이 건강검진 수검자라 중증 호흡기 질환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 횡단 연구라 ‘인과’ 대신 ‘연관’만을 보여 준다는 점은 한계로 꼽힌다. 그러나 연구를 책임진 정영주 교수는 “2025년 하반기부터 운동·식이 개입을 병행한 장기 추적 연구에 착수할 예정”이라며 “근육·지방 변화가 실제 폐 기능 경사도를 얼마나 바꾸는지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202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호흡기학회(ERS) 발표 뒤, 호주·캐나다 연구진이 참여 의사를 밝혀 다국적 공동연구로 확대될 전망이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