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형 기자의 트렌드가 된 브랜드] 로저드뷔 | 스물여덟살 청년 브랜드의 승승장구 명품시계 공식 뒤흔든 후발주자의 뒷심

    입력 : 2023.08.17 11:20:40

  •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로저드뷔(Roger Dubuis)는 화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싸다. 최근 영국에서 열린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공개된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의 가격은 1억4300만원. 3억~4억원을 호가하는 모델도 여럿이다. 그럼에도 잘 팔린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품 시계들이 마치 공식처럼 200~300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헤리티지를 강조한다면, 올해 스물여덟살이 된 이 청년 브랜드는 마치 실력으로 겨뤄보겠다는 듯 온갖 신기술로 강점을 갈고닦아 정면 승부한다. 그런데 이 방식, 통했다.

    잠시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코로나19 영향에 소비가 위축되며 일상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시기, 하지만 명품시장은 호황을 맞고 있었다. 특히 VIP 고객을 대상으로 개별 마케팅에 나서는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는 전화로 예약하고 구매하는 방식이라 꼭 매장에 가야만 살 수 있는 여타 브랜드에 비해 팬데믹의 영향을 덜 받았다. 로저드뷔도 마찬가지. 이 시기, 로저드뷔는 이러한 방식으로 가격이 3억4000만원인 ‘엑스칼리버 원탁의 기사’와 4억원인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피렐리 더블 플라잉 투르비용’을 판매했다. 각각 전세계 28개, 8개만 한정 생산된 제품이다. 구매자는 이미 로저드뷔 시계를 여러 개 소유한 마니아로만 알려졌다.

    1995년 설립된 후발주자
    사진설명

    로저드뷔란 브랜드명은 설립자의 이름이다. 1995년 자신의 이름과 동명의 워치메이커를 설립한 로저 드뷔(~2017년 10월)는 20여 년이란 짧은 기간에 브랜드를 업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수백 년의 역사가 즐비한 스위스 시계업계에서 이례적인 성공 사례다. 그만큼 로저드뷔란 이름이 갖는 의미가 특별했다. 브랜드 설립 이전에 ‘파텍필립’에서 14년간 컴플리케이션 시계 개발을 이끌던 그는 당시에도 존경받는 마스터 워치메이커였다. 그런 그가 ‘프랭크 뮬러’로 유명세를 탄 디자이너 카를로스 디아스와 의기투합해 브랜드를 내놓자 한동안 업계의 화두는 당연히 로저드뷔였다. 특히 파격에 가까운 디자인과 최고급 시계제조기술이 결합된 ‘라 모네가스크(La Monegasque)’ ‘엑스칼리버(Excalibur)’ ‘펄션(Pulsion)’ ‘벨벳(Velvet)’ 등의 컬렉션은 빠른 시간에 컬렉터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야구선수 추신수의 시계로 유명세를 탄 로저드뷔의 컬렉션은 엔트리급이 2000만원대, 앞서 나열했듯 고가의 모델은 3억~4억원대에 이른다. 여기서 잠깐, 도대체 왜 이리 비싼 걸까. 설립자 로저 드뷔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마침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손목시계가 수억원을 호가하는 이유가 뭐냐”고 나름 당돌하게 물었더니, 그런 말 수도 없이 들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직접 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떤 분들은 로저드뷔의 시계가 왜 그리 비싸냐고 묻습니다. 그럼 일단 공방에 와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딱 한 가지 부품만 직접 조립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런 분들 중에 똑같은 질문을 하신 분들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린 하나의 시계를 만들기 위해 짧게는 1000시간, 길게는 2000시간 이상 공을 들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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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스위스 브베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엔 구두 제조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마을 교회의 괘종시계를 보곤 방향이 달라졌다. 16세에 스위스 시계학교에 입학하며 인연을 맺게 된 시침과 분침은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로 모습을 달리하며 그의 인생을 채워갔다. 로저 드뷔는 퍼페추얼 캘린더, 라트라팡트 크로노그래프, 미닛 리피터 등 이름도 생소한 기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하며 기술을 습득했다. 그의 이름이 업계에 각인될 무렵엔 파텍필립 경영진이 경매에 나설 역사적인 시계의 복원을 제안할 만큼 신뢰를 얻기도 했다. 그의 시계에 대한 열정은 브랜드 설립 당시 58세였던 나이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시기에 40여 년의 시계 인생을 건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커리어란 인생의 경험이 쌓여 완성되는 것이지요. 적지않은 나이라 결정이 쉽진 않았지만 그동안 축적한 경험이라면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1995년 5월 19일에 회사를 정식 등록했는데, 그 날짜는 제 결혼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운영의 원칙이 있었어요. 모든 무브먼트는 자체 제작하고 제네바 실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원칙은 확신에 가까운 신념이었습니다. 저는 이 신념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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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내세운 원칙은 현재 로저드뷔의 상징이 됐다. 전 세계에서 한 해 생산되는 시계는 약 10억 개 이상. 스위스 내에서만 약 2000만 개가 생산되는데 단 2만4000개만이 바로 이 제네바 실 인증을 받는다. 시계에 탑재된 기계식 무브먼트가 제네바 내에서 일일이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실제로 로저드뷔의 생산과정은 고성능의 기술력과 장인정신으로 압축된다. 로저드뷔는 무브먼트를 구성하는 수백 개의 요소를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한다. 일부 무브먼트는 600개가 넘는 부품으로 만들어질 만큼 정교하고 복잡하다.

    ▶ 제네바 실 인증
    로저드뷔나 바쉐론 콘스탄틴 등 하이엔드급 시계는 부품 하나하나까지 공들여 제작한 후 마지막으로 ‘제네바 실(Geneve Seal·Geneva Hallmark)’ 인증을 받는다. 최정상급 브랜드만 받을 수 있다는 이 인증은 이후 마케팅에 활용되며 제품의 공신력을 뒷받침한다. 프랑스어로 ‘프엥송 드 제네브(Poincon de Geneve)’라 불리기도 하는데, 1886년 이른바 짝퉁을 예방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처음 시행됐다. 워치메이커라 해서 모두 인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매뉴팩처가 제네바 칸톤 지역에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조립된 무브먼트가 대상이다. 스위스 정부에서 임명한 7명의 위원들이 4년 임기로 인증을 책임지는데, 모델에 따라 800개 이상의 부품이 승인과정을 거친다.

    기획부터 생산까지 한곳에서

    로저드뷔는 2001년 스위스 제네바주 메이린 지역에 둥지를 틀고 행정 서비스부터 생산라인까지 통합된 제조방식을 구축했다. 이곳에서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신기술이 탄생한다. 로저드뷔는 세계 최초 기록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다. 2013년에 중력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4개의 스프링 밸런스를 장착한 세계 최초의 무브먼트 ‘콰토르(Quatuor) RD101’을 개발했고, 2015년엔 메탈 소재 베젤의 고무 몰딩에 다이아몬드를 결합한 시계를 내놓기도 했다. 2016년엔 카본 소재에 희귀 보석을 장식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대표 제품은 스켈레톤 워치인 ‘엑스칼리버’. 피렐리, 람보르기니 등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관련 슈퍼 브랜드와 협업해 꾸준히 한정판 엑스칼리버 시계를 선보이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슈퍼카의 엔진을 닮은 무브먼트, F1 대회에 사용하는 피렐리 타이어로 시곗줄을 만드는 등 과감한 시도를 지속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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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치몬트그룹 합류, 매출↑ 기부↓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로저드뷔는 브랜드를 지원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 구조가 필요했다. 2008년 시계, 보석 등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리치몬트그룹’에 합류한 로저드뷔는 이듬해 한국에 진출하며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섰다. 올 초엔 한국 공식 온라인 부티크를 열었다. 국내 전 지역에서 접근성과 편의성을 보장하기 위한 선택이다. 특히 온라인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익스클루시브 라인도 새롭게 선보였다. 온라인 익스클루시브 모델인 ‘엑스칼리버 블랙라이트 3종’은 낮 동안에는 메커니즘을 통해 발산하는 광선처럼 배치된 유색의 마이크로 빔이 칼리버 안에서 확산되고, UV 광선 아래에서는 마이크로 빔이 네온 튜브처럼 발광하여 이중적 매력이 빛나는 제품이다.

    엑스칼리버 원탁의 기사
    엑스칼리버 원탁의 기사

    활발한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여타 명품처럼 매출이나 수익 등이 베일에 가려진 폐쇄성은 여전하다는 평가다. 특히 로저드뷔를 비롯해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바쉐론 콘스탄틴, IWC, 예거 르쿨트르, 피아제, 파네라이, 몽블랑, 부첼라티 등을 수입, 판매하는 리치몬트그룹의 한국법인 리치몬트코리아의 행보가 아쉽다는 지적이다. 최근 공개된 2023년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리치몬트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7.9% 증가한 1조3979억원, 영업이익은 28.2% 늘어난 1250억원이었다. 리치몬트코리아는 2020년 회계연도 매출 1조원을 달성한 뒤 이듬해 8639억원으로 줄었지만 팬데믹 이후 다시 1조원대 매출을 회복했다. 2년 연속 호실적이 이어졌지만 기부금은 오히려 줄었다. 지난해 리치몬트코리아가 낸 기부금은 2억5264만원. 2021년 3억2250만원보다 21.6% 감소했다. 본사 배당금은 약 486억원으로 전년 대비 3.9% 증가했다.

    [안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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