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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도 새해 ‘제2 인플레법’ 제정 나서… EU도 자국산 보호, 韓 수출 제품 ‘타격’
입력 : 2023.01.13 1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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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도 미국 같은 ‘제2 인플레이션 방지법(IRA)’ 제정 전운이 감돌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주요 광물 원자재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가칭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CRMA)’ 입법을 추진하면서 2022년 11월 25일(현지시간) 해당 법안에 대한 각국 기업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에 이틀 뒤 유럽한국기업연합회(KBA유럽)와 그 사무국 역할을 하는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는 공동 명의로 EU 집행위원회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맞는다고 밝혔다. 이들은 해당 의견서에서 “CRMA는 EU의 근본적인 무역 규칙인 자유무역 원칙을 지원해야 한다”며 “자국 기업에만 유리하도록 하는 차별적인 법·규제를 도입한 일부 국가에 의해 보호무역주의 추세가 촉발된다면 이는 우려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유럽의회는 지난 2021년 11월 주요 원자재에 대한 전략 수립을 EU 내 각국에 요청했으며 EU 의사회 역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사태 후 2022년 3월 경제 안보를 위한 주요 원자재 공급 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에 EU 집행위는 9월 연례 정책연설에서 주요 원자재에 대한 역외 의존도를 줄이고 역내 공급망 강화를 골자로 하는 CRMA 입법을 전격 예고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당시 해당 연설에서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금속인 희토류와 리튬 등의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경고하며 전략적 매장량 구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 주권 기금 신설 등을 언급하며 역내 원자재 공급망 구축에 필요한 자금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2월 14일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불공정 경쟁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사진 연합뉴스> 특히 유럽은 재시행 중인 역내 공동 관심 분야 주요 프로젝트인 IPCEI(Important Projects of Common European Interest)를 통해서도 역내 원자재 공급망 구축을 지원할 방침이다. IPCEI는 역외 의존도를 줄이고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위해 주요 산업 분야를 지정한 뒤 프로젝트를 선별해 예외적으로 국가별 보조금 지급을 허용하는 제도다. 그 선정 분야별 금액을 보면 인프라스트럭처(2015년 제정)의 경우 87억유로(89억달러·일부는 EU 기금 통해 지원), 반도체(2018년)는 17억5000만유로(18억달러), 배터리 1차(2019년)는 32억유로(33억달러), 배터리 2차(2021년)는 29억유로(28억달러), 수소 1차(2022년)는 54억유로(55억달러), 수소 2차(2022년)는 52억유로(53억달러)다.
현재 EU는 화학·자동차 등 역내 주요 산업에서 역외 원자재와 에너지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차질과 러·우 사태로 인한 에너지 위기를 겪으며 주요 원자재의 자국 내 생산·개발 제품에 한해서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CRMA를 입법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CRMA의 구체적 틀은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 9월 30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업계와 이해당사자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했다. 이를 검토해 입법 영향 평가를 거쳐 올 1분기 안에 CRMA 초안을 만들 방침이다.
현대차, 유럽에도 전기차 공장 필요CRMA는 미국 IRA처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요 원자재 역내 공급을 강화하고 이들 자재를 사용한 제품에만 혜택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중요한 전략 원자재를 식별하기 위한 기준을 정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와 목표에 대한 규정을 담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기존에 EU가 관리하던 핵심 원자재 목록과 산업별로 대외 의존도가 높거나 공급망 위기에 노출된 물질들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EU 핵심 원자재(CRM) 목록은 역내 핵심 원자재 관리를 위해 지난 2008년 처음 지정됐으며 2011년부터 3년마다 역내 경제적 중요도와 공급 위기를 기준으로 재지정되고 있다.
현재 핵심 원자재는 지난 2020년 재지정된 30개 물질이다. 이들 중 마그네슘, 희토류를 포함 19개 물질 주요 수입국이 바로 중국이다. 또 EU는 주요 원자재 공급망의 모니터링과 위험 관리를 위한 거버넌스 수립을 위해 회원국 간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티에리 브르통 EU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회원국과 관련 기관 간 긴밀한 네트워크를 통해 공급망의 물량 부족과 가격 인상 등의 위기를 예측하고 비축, 투자, 수급 다양화를 통한 대응 조치를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CRMA는 역내 주요 원자재의 공급망 구축을 위해 공급망 분야(채굴, 정제, 가공, 재활용 등)별로 전략적 프로젝트를 식별하고 자금 조달 확대와 허가 절차 간소화를 통해 생산 역량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통해 기존 주민 반대와 행정 장벽에 부딪혀 지연되던 프로젝트들에 재조명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이는 앞서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연례 정책 연설에서 언급한 EU 공동 관심 분야 주요 프로젝트 IPCEI와 유럽 주권 기금 조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EU는 IPCEI를 통해 주요 산업 분야를 지정한 후 프로젝트를 선별해 예외적으로 국별 보조금 지급을 허용하고 있다. 또 유럽 주권 기금 역시 배터리, 수소, 반도체, 원자재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위해 파트너십 구축, 투자 확대, 규제 해결 등의 결과를 창출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다. 아울러 EU는 역내외 공정한 경쟁 보장을 위한 장치도 마련할 것으로 전망된다. EU는 원자재 공급망 구축 과정에서 회원국 간 격차로 인해 역내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주요 원자재의 전략적 비축량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EU와 국제 기술 표준 설정을 통한 기술 혁신, ESG 요건 등을 강조하며 역내외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할 예정이다.
집행위는 의견 수렴 요청서에서 현재 EU에서 별도로 입법 중인 배터리법의 환경 요건과 유사한 재활용 의무와 생산 공정의 탄소 발자국 공개 의무를 예로 들며 설명한다. 이는 공급망 강화뿐 아니라 EU에서 추진 중인 친환경·순환경제 활성화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CRMA에도 이와 같은 요건이 도입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국내 기업을 대표해 한국무역협회는 CRMA가 미국 인플레이션 방지법과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협회는 EU 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CRMA는 최소한의 행정적 부담과 과도하지 않은 자료 요구로 EU와 비(非)EU 기업 모두 지나친 영향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급망 안정 강화와 지속가능성을 위해 모니터링 구축과 위기 관리 틀 마련의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이는 규제 개입이나 기업 활동 제한이 부과되지 않을 때에만 효과적일 것”이라며 “법안 설계 시 이런 사안을 고려해 달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CRMA 도입으로 인해 EU 배터리 법안 등 이미 현존하는 규제와 중복을 피하는 한편 같은 맥락에서 규제 일관성을 유지해 달라는 입장도 표명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관계자는 “현재 EU 그린딜 전략이 탄소 중립을 위해 오는 2050년까지 분야·회원국별 탄소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것처럼 CRMA도 2030년까지 EU 정제 리튬 수요의 최소 30% 역내 조달, 재활용을 통한 희토류의 최소 20% 회수 등의 공동 목표를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CRM 목록 30개 원자재 중 상당량을 차지하는 리튬이나 흑연은 전기차용 배터리에 많이 투입된다는 사실이다. 이러면 현대자동차·기아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도 전기차 공장을 신설해야 할 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는 체코, 기아는 슬로바키아에 각각 완성차 공장을 두고 20년 가까이 가동해 오고 있다”며 “향후 여기에 전기차 전용 생산 라인을 설치하고 역내 전기차 생산·출시를 단행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무역협회뿐 아니라 정부도 EU집행위원회에 의견서를 별도로 전달했다. 정부는 아직 원자재법 초안이 나오지 않아 구체적인 피해 발생 여부는 단언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조항이 기업들 부담을 가중할 소지가 있고 세계무역기구(WTO) 내국민대우 원칙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 요건 금지 규정을 위반할 소지도 있어 이에 대해 주시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명백하게 우리 업계에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법안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면서도 “원자재법 안에 원자재 개발 프로젝트 지원과 원자재 재활용 의무화 등의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여 정부도 의견서를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EU는 해당 법안 초안을 마련하기에 앞서 기업 등 각국 이해당사자들의 의견 수렴을 위해 다지선다형 설문지를 만들어 답변을 받았다. 이 질문지로부터 한국 기업들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내용들이 발견된 것이다. 또 단답식으로는 업계와 정부의 의견을 제대로 표할 수 없어 정부와 업계의 우려를 담은 의견서를 전달하게 된 것이다.
터키 이즈미트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터키 공장에서 현지 직원들이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中 희토류·리튬에 견제 포석가령 CRMA에는 원자재 공급망 안정성을 확대하기 위해 EU 역내 원자재 개발 프로젝트, 제3국 원자재 개발 프로젝트 등에 대한 개발 자금과 인·허가 절차 지원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EU 기업들만 지원한다는 표현이 명시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기업이 해당 지원 방안에서 소외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WTO 협정이나 한-EU FTA를 고려해 우리 기업이 차별받지 않아야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원자재 재활용 의무 부담과 관련한 내용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환경보호 측면에서 폐배터리 내 리튬 등 사용된 원자재에 대한 재활용 의무화 내용이 법안에 담길 수 있다”며 “재활용 의무 조항이 기업들에게 과도한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앞서 2022년 11월 16일 정부는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과 EU가 최근 추진 중인 CRMA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마련에 따른 영향을 점검하기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간담회 당시 업계 측에서 EU집행위원회에 원자재법 마련과 관련해 한국 측 우려를 담은 의견서 제출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산업부도 정부 차원의 의견을 전달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다른 나라들의 동향도 파악해보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법안이 구체화되면 의견을 내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파악됐다”며 “EU의 법안 제정 동향을 업계를 비롯해 무역협회 해외 지부 KOTRA 등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계기 때마다 EU에 의견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서진우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