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인, 하지만 럭셔리한… GT카의 화려한 질주 | 벤틀리·애스턴 마틴·벤츠 인기에 BMW 라인업 강화

    입력 : 2020.07.06 15:56:30

  • 17세기 유럽에는 그랜드 투어(The Grand Tour), 또는 이탈리아어로 그란 투리스모(Gran Tourismo)라고도 하는 여행이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의 상류층 자제들이 대학 공부를 마친 뒤 몇 달이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도는 일종의 교양수업이다. 여행에 오른 상류층 자제들은 유럽 문명의 정수를 눈으로 보고, 학교에서 배운 프랑스·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갈고 닦았다.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부은 이들 젊은이는 최고급 마차에 올라 전속 요리사까지 거느리고 안락한 장거리 여행을 즐겼다.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 혹은 그란투리스모(Gran Turismo)로 불리는 GT카는 그랜드 투어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자동차다. GT는 일반적으로 장거리를 편안하게 달리면서도 고성능을 발휘하는 쿠페를 가리킨다. 차량의 운동능력이 핵심인 스포츠카와 닮았지만 지향점이 다르다.

    스포츠카는 경주에서 이기기 위한 코너링·브레이킹·힘·조향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고성능은 GT에서도 똑같이 중요하지만 GT는 편안한 주행환경도 갖춰야 한다. 람보르기니나 페라리의 슈퍼카들은 최고의 주행성능을 내지만 장거리를 달리기 적합하지 않기에 GT가 될 수 없다. GT는 여유 있으면서도 고성능이어야 한다. 그래서 GT는 이기적이다.

    GT는 아메리칸 자동차의 대표 격인 머슬카와도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르다. 머슬카처럼, GT도 2인승이 많고 대배기량 엔진을 실어 출력이 빵빵하다. 하지만 머슬카는 폭발적인 단거리 주행 성능에 중점을 두고 설계한 반면, GT는 편안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주행이 핵심이다.

    BMW 6시리즈 GT
    BMW 6시리즈 GT
    GT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GT카이기 위한 공통의 조건은 있다. 우선 2명 이상의 사람과 수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어야 한다. 엔진은 강력한 힘을 내면서도 고속에서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실내는 편안하고, 고급스러우며 운전자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사가 딸리는 쇼퍼드리븐카보다는 직접 운전하는 오너드리븐카라는 뜻이다. 이런 안락함과 고성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만큼 GT는 차체 중간에 엔진을 얹어 소음·진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미드십(Midship engine Rear drive system·MR) 구조보다는 엔진을 앞쪽에 배치하고 샤프트로 연결해 뒷바퀴를 돌리는 전방엔진 후륜구동(Front-engine Rear-wheel drive system·FR) 방식을 택한다. 물론, 크고 비싼 것도 GT의 당연한 특징이다.

    GT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GT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차는 1929년 나온 알파 로메오 6C 1750 GT다. 경주용과 장거리 주행용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만족하는 스포티한 섀시와 엔진을 갖췄다. 본격적으로 GT카 모델이 쏟아진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50년대부터로 피아트와 마세라티, 페라리,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등이 GT 개발에 뛰어들었다. 1950년 DB2로 GT 시장에 데뷔한 영국의 애스턴 마틴처럼 거의 GT만 만드는 브랜드도 나왔다.

    1990년대 들어 럭셔리보다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며 GT는 쇠퇴기를 맞았다. 많은 고급차 브랜드가 GT 모델을 단종시켰다. BMW는 1989년부터 만들어온 8시리즈를 1999년 접었다. 포르쉐도 1977~1995년 생산한 928 모델을 단종시켰다. 캐딜락과 링컨, 애스턴 마틴 등도 GT 라인업을 대폭 축소해야 했다. 이랬던 GT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인 강세를 보이며 럭셔리카 시장의 한 축을 떠받치는 모양새다. BMW 8시리즈가 2018년 화려하게 돌아왔고 포르쉐 928의 부활은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의 단골 떡밥이 됐다. 특히 요즘은 스포츠·슈퍼카들도 극강의 주행성과 함께 안락한 착좌감을 추구하면서 GT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브랜드가 GT라고 이름붙인 차를 업계에서 패스트백 세단, 스포츠 세단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거꾸로 브랜드가 명명하지 않았지만 GT로 분류되는 모델도 많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GT는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오남용이 심한 단어”라 할 정도다.

    벤틀리 3세대 컨티넨탈 GT
    벤틀리 3세대 컨티넨탈 GT
    ▶북유럽 프리미엄 GT

    벤틀리·벤츠·애스턴 마틴

    2020년 현재 전 세계 GT카 중 전형적이면서도 유명한 모델로 3종을 꼽을 수 있다. 영국 벤틀리의 컨티넨탈 GT, 애스턴 마틴 DB11, 벤츠의 AMG GT 쿠페다. GT카로서 벤틀리 컨티넨탈의 역사는 2003년 본격 시작됐다. 현재 나온 컨티넨탈 GT는 2017년 첫 선을 보인 3세대 모델. 기본가격 2억4000만원에서 시작하는 럭셔리 GT의 전형이다. 컨티넨탈 GT는 4.0ℓ 트윈터보 32밸브 8기통(V8)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다. 최고 출력 550마력, 최대 토크 78.5㎏f·m에 이른다. 최고 속도는 시속 318㎞에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이르는 데(제로백) 4.0초가 걸린다.

    롤스로이스와 대결하는 럭셔리 브랜드답게 컨티넨탈 GT는 20가지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는 고급 가죽 시트, 부드럽고 편안한 드라이빙부터 정교한 스포츠 모드 핸들링까지 가능한 조향 시스템 등 GT에 걸맞은 승차감과 핸들링을 제공한다.

    컨티넨탈 GT에 대한 벤츠의 답은 고성능 라인업 AMG 로고를 단 GT 모델들이다. 2도어 쿠페인 AMG GT는 2014년 첫 출시됐다. AMG GT와 AMG GT S의 두 가지로 나뉘며 AMG GT는 최고 출력 476마력, 제로백 4초의 주행 성능을 보인다. 고성능인 AMG GT S는 522마력, 제로백 3.8초에 이른다. 최고 출력 612마력, 제로백 3.5초를 자랑하는 AMG S 63 2도어 쿠페도 GT라는 이름이 붙지는 않았지만 GT로 분류되는 차다.

    현재 국내에서는 AMG GT 4도어 쿠페(AMG GT 43 4MATIC, AMG GT 63 S 4MATIC)가 판매되고 있다. GT카이면서도 패스트백 세단의 구성을 활용한 모델이다.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4도어 쿠페 이미지를 강화해 벤츠는 “도로 위의 레이스카”로 부르고 있다. 벤츠 AMG GT 63 S 4MATIC 4도어 쿠페는 AMG 4.0ℓ V8 바이터보 엔진(M177)을 탑재해 최고 출력 639마력, 최대 토크 91.7㎏.m, 제로백 3.2초의 성능을 낸다. V6 엔진이 장착된 AMG GT 43 4MATIC 4도어 쿠페는 최고 출력 367마력과 최대 토크 51.0㎏.m의 주행성능을 갖췄다. 여기에 48볼트(V) 전기 시스템인 EQ 부스트를 장착해 22마력의 출력과 25.5㎏.m의 토크를 더하고 있다. 1억3000만원부터 시작하는 AMG GT 43 4도어 쿠페와 약 2억5000만원에 달하는 AMG GT 63 4도어 쿠페는 후륜구동과 4륜구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능형 4륜구동 시스템 AMG 퍼포먼스 4MATIC 기술이 적용됐다. 엔진에 따라 슬리퍼리, 컴포트, 스포츠, 스포츠+, 레이스, 인디비주얼 등 총 6가지 주행 프로그램이 제공돼 주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클래식한 쿠페 디자인에 넉넉한 뒷좌석을 추가해 4인승은 물론 5인승까지 가능한 안락한 실내 공간도 특징이다.

    영국 애스턴 마틴의 DB11도 프리미엄 북유럽 GT의 정수를 담아낸 작품이다. 다임러 AG와 기술 제휴로 탄생한 럭셔리 GT인 DB11(국내 판매가 약 2억6000만원)은 새로 개발한 5.2ℓ V12 트윈터보 엔진과 AMG V8 트윈터보 엔진을 장착했다. V12 엔진 기준 최대 출력 715마력, 제로백 3.4초, 최대 시속 340㎞에 이른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그랜드투어러”라는 찬사를 해외에서 쏟아지는 DB11은 한동안 도태된 애스턴 마틴이 재기하는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다만 기존 애스턴 마틴의 감성이 조금 옅어져 아쉬워하는 올드 팬들도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AMG GT 63 S 4MATIC 4도어 쿠페
    메르세데스-벤츠 AMG GT 63 S 4MATIC 4도어 쿠페
    ▶GT인 듯 패스트백인 듯…

    BMW 3·6·8시리즈

    또 다른 프리미엄 독일차 BMW도 GT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다. BMW의 GT 라인업은 전형적 GT라기보다 패스트백 세단의 구성을 적극 취한 게 특징이다. 또 BMW 8시리즈는 이 브랜드의 공식 GT는 아니지만 GT카로 분류되는 등 BMW GT 모델은 차급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들이 많다. BMW는 준중형 3시리즈부터 GT 라인업이 있다. BMW 3시리즈 GT는 휠베이스(축간거리)가 3시리즈 세단보다 110㎜ 긴 2920㎜로 한 체급 높은 5시리즈와 비교해도 불과 48㎜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트렁크 용량은 520ℓ 3시리즈 세단보다 40ℓ 넓다. BMW의 2.0ℓ 트윈파워 터보 디젤엔진을 탑재한 3시리즈 GT는 최고 출력 190마력, 최대 토크 40.8㎏·m의 성능을 발휘한다. 5시리즈 GT로 출발한 BMW 6시리즈 GT는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좋다. 올해 1~5월 BMW 6시리즈 GT의 한국 내 누적 판매량은 1278대로 세계 2위다. BMW가 올해 한국에서 4세대 6시리즈 GT 페이스리프트(부분 변경) 모델을 처음 공개한 것도 한국 시장의 위상을 감안한 행보다. 7시리즈와 동일한 플랫폼을 사용해 BMW 세단 라인업 중 적재 공간이 가장 넓은 6시리즈 GT는 총 610ℓ로 뒷좌석 시트를 접지 않고도 46인치 골프백 4개를 실을 수 있다. 또 최신 V6 가솔린과 디젤 엔진을 장착해 최고 출력 340마력(가솔린 기준), 제로백 5.3초의 힘을 낸다. 디젤 모델은 최고 출력 320마력, 제로백 6.0초에 이른다.

    정식 GT 라인업은 아니지만 BMW가 1999년 단종시켰다가 2019년 부활시킨 8시리즈도 GT카로 불린다. 8시리즈는 2도어 쿠페와 4도어 그란쿠페 모델이 함께 등장했다. 약 1억3000만원부터 시작하는 BMW 8시리즈는 3.0ℓ 직렬 6기통(I6) 싱글 터보 가솔린 모델(840i xDrive)과 4.4ℓ V8 트윈터보 가솔린 M 모델(M850i xDrive), 3.0ℓ I6 싱글 터보 디젤 모델(840d xDrive) 등 세 종류로 출시됐다. 디젤과 I6 가솔린 모델은 각각 320마력, 340마력의 최고 출력을 내며 제로백은 각각 4.9초다. 고성능 M 모델은 530마력, 제로백 3.7초의 힘을 낸다. BMW는 벤틀리 컨티넨탈 GT, 벤츠 AMG GT와 8시리즈가 맞수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애스턴 마틴 GT카 DB11
    애스턴 마틴 GT카 DB11
    ▶디자인 쇼크 렉서스 LC 7…

    이탈리아 GT 감성 페라리·마세라티

    GT카의 본고장 이탈리아도 라인업 강화에 나서는 중이다. 슈퍼카의 대명사 페라리는 2도어(4인승) 컨버터블 모델인 포르토피노, 2도어(4인승) GTC4 루쏘T, 2도어(4인승) 로마를 최신 GT 모델로 내세우고 있다. 포르토피노와 로마가 3억원대에 가격이 형성돼 있고 GTC4 루쏘는 4억원대다.

    이탈리아의 인기 여행지이기도 한 항구도시 포르토피노에서 이름을 딴 페라리 포르토피노는 최대 출력 600마력, 제로백 3.5초로 페라리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한 컨버터블 GT다. 이밖에 접이식 하드톱, 트렁크 용량 250ℓ로 기존 페라리 모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넓은 적재공간을 갖췄다. 페라리 GT카 중 최초로 전자식 파워 스티어링(EPS)을 적용해 조향 성능도 높였다.

    페라리가 “가장 실용적인 페라리”로 자평한 GTC4 루쏘T는 사륜구동에 후륜 스티어링을 추가해 조향성을 높였다. V12 6.3ℓ 자연흡기 엔진과 V8 3.8ℓ 터보엔진을 얹은 모델로 출시하며 V12 엔진 기준 최대 출력 670마력, 제로백 3.4초의 힘을 낸다. 기본 적재공간 450ℓ로 4인이 안락한 장거리 주행을 즐길 수 있다고 페라리는 적극 강조하고 있다.

    마세라티 신형 GT카 MC20
    마세라티 신형 GT카 MC20
    올해 한국 시장에 나온 페라리 로마는 스포츠카이자 데일리카로 탈 수 있는 실용적 주행에 초점을 맞췄다. 페라리의 V8 터보 엔진을 기반으로 620마력의 최고 출력과 제로백 3.4초의 주행 성능을 발휘한다. 1950년대 페라리의 GT 모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이 이전 페라리 GT와 차별화된 지점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럭셔리카 마세라티는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와 그란투리스모의 카브리올레 모델인 그란카브리오를 GT 라인업으로 갖추고 있다. 두 모델 모두 V8 4.7ℓ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을 얹어 최대 출력 460마력, 제로백 4.7초의 힘을 낸다. 가격은 2억3000만~2억5000만원 선이다.

    마세라티는 이르면 올해 말 신형 스포츠카이자 그란투리스모의 후속작인 MC20을 내놓을 예정이다. 201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한 알피에리의 양산형인 MC20은 마세라티 최초로 V6 트윈터보 엔진을 실어 주행성능을 확 끌어올릴 것이란 기대가 높다. 마세라티는 하이브리드(HEV)를 비롯한 MC20의 전동화 버전까지 출시해 GT와 슈퍼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는다는 목표다.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고급 브랜드 렉서스 LC를 GT 모델로 내세우고 있다. 렉서스 LC는 2017년 출시한 후륜구동 스포츠 쿠페로 출시 당시 미래지향적 디자인으로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온 모델이기도 하다. 국내 판매 가격 1억7000만원대로 책정돼 있으며 가솔린 모델인 LC500과 하이브리드 모델인 LC500h로 나뉜다. LC500은 고회전형 V8 5.0ℓ 엔진을 탑재해 최대 출력 477마력의 힘을 낸다. 특히 10단 자동변속기를 렉서스 최초로 탑재해 부드럽고 신속한 변속이 가능해졌다. HEV 모델인 LC500h는 V6 3.5ℓ 엔진과 전기 모터가 맞물려 있다. 최대 출력은 359마력에 이른다.

    [이종혁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8호 (2020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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