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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드레스 다운으로 거듭나다
입력 : 2014.09.19 15: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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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일꼬르소 코튼 저지 재킷
하지만 여전히 본질은 예복이고 컬러나 소재, 입을 수 있는 시간마저 제한적이었던 턱시도에서 그 구성 뼈대와 착장 법칙들을 아주 유연하게 변형시킨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슈트인 것이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슈트는 비즈니스맨들이 거의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대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레저와 휴식을 즐기는 남자들에게 단조로움과 보수성을 넘은 새로운 복식으로 재킷이 등장한다.
슈트란 나보다 먼저 상대를 생각해야 하는 사회적인 복장이지만, 개인적이거나 캐주얼한 순간에 입는 재킷은 그보다는 입는 즐거움이 우선인 옷이다. 재킷은 계절에 맞춰 소재를 다르게 매치하고 여름에 어울리는 밝은 컬러와 시원한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맞는 따뜻한 컬러를 구별하는 재미가 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여유로운 스트라이프나 과감한 체크 패턴을 선택할 수도 있고, 넥타이를 말끔히 잊고 셔츠의 버튼을 두 개쯤 풀어버리면서 남성다움을 과시해도 괜찮다.
재킷을 골랐다면 거기에 맞는 셔츠의 각도와 구두의 색상도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다. 휴양지의 바다처럼 상의의 표현 방법이 화려해지니 당연히 바지나 구두도 그에 부합하는 컬러풀한 느낌으로 진화된다. 여성들의 전유물이라고 눈길도 주지 않았던 그린, 옐로, 라벤더 컬러의 바지가 차츰 눈에 들어오게 되고, 옷차림에 어느 정도의 자유를 부여하는 기분도 알게 된다. 그래서 재킷 차림에 점점 익숙해진다는 건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늘어간다는 행복한 사인이다.
마모트 지온 재킷
아웃도어 의류는 애초에 주로 등산을 즐기던 마니아들이 입는 기능성 옷이었지만, 이제는 등산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 레저, 여행, 등교 및 가벼운 외출까지 모든 경우에 간택되는 다재다능한 일상 복장이 돼버린 느낌이다.
게다가 요즘의 아웃도어는 가히 총천연색의 향연으로 한때 온 나라에 불었던 컬러풀한 골프웨어의 유행이 재림한 것 같다. 시대가 흐르며 많이 달라지곤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비즈니스맨이 출근하는 옷차림은 어두운 계열의 슈트나 보수적인 재킷에 갇혀 있는데, 아웃도어 의류는 어떤 묵계처럼 지켜지는 남성들의 주중 옷차림을 과감하게 탈피시키고 컬러라는 포인트를 화끈하게 넣은 것이다. 그래서 옷차림에 관심이 없거나, 죽어도 내 평생 컬러풀한 옷은 입지 못한다는 남성들도 레드, 블루, 그린 등 자유로운 색채의 아웃도어 복장만은 순순히 허용하고 있다.
아웃도어의 융성은 물론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 치솟는 물가, 여기에 소득 양극화라는 복잡한 함수 관계가 여전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삶에 이렇게라도 여유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야외 스포츠란 개인의 건강을 지키는 생산적인 활동인 동시에 일상의 탈출구가 되어주기도 했으니 고마운 도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장소에서 통용되는 만능의 옷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예컨대 세계인들이 오가는 인천 공항에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앞에서, 홍콩의 IFC 쇼핑몰에서, 그리고 서울시청 앞에서 모두 아웃도어를 입을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원래 캐주얼은 파트너들과의 미팅과 일상 업무가 공존하는 비즈니스 캐주얼, 주말이나 휴가 등 완전히 개인적인 시간에 자유롭게 입는 위크엔드 캐주얼, 그리고 레저, 아웃도어 등에 통용되는 스포츠웨어로 구별된다.
지금 산에서 내려와 거리와 공항, 백화점과 사무실로 진출한 아웃도어 의류들은 고유한 스포츠웨어의 영역을 넘어 다른 캐주얼까지 너무 포괄해버린 것이다. 아웃도어 스포츠웨어의 확산은 별문제가 아니지만, 거기에만 집중하게 되면 비즈니스에 필요한 점잖은 캐주얼이 점점 흐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가벼운 등산 중심의 한국 아웃도어 시장에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전문가들이 입어야 할 듯한 고가의 옷이 유행하는 건 가격 상승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아웃도어 의류는 과감한 컬러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가벼워 몸의 부담을 줄여 주고 땀을 배출하는 기능이 뛰어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든 연령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스포츠와 캐주얼의 구분이 너무 모호해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옷이란 언제나 때와 장소에 맞게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렇듯 포멀과 캐주얼의 중간 느낌을 내는 재킷에 로퍼를 신은, 비즈니스가 아닌 레저용으로는 아웃도어나 골프웨어를 입은 비즈니스맨들이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슈트는 여전히 저력 있고 중요한 의미를 담은 복장이다. ‘슈트는 슈트로만 입어야 한다’는 영국식 전통을 존중하는 신사들은 밝고 경량화되는 패션 트렌드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은 네이비 슈트에 다크 그레이 타이와 블랙 옥스퍼드 구두를 일관되게 신는다. 다만 이런 공식에서 벗어나 포멀한 슈트를 캐주얼 아이템과 믹스하는 시도도 슈트의 재해석이란 측면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예컨대 슈트에 셔츠와 타이 대신에 니트 혹은 티셔츠를 매치해서 전혀 다른 느낌의 비즈니스 룩으로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포멀뿐만 아니라 캐주얼 아이템까지 포용할 만큼 강력한 아우라를 가진 슈트라면 슈트 고유의 진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위트있게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밸런스를 가질 수 있다.
이스트쿤스트 데님셔츠
남훈 2005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제일모직
‘란스미어’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현재 패션전략컨설팅회사 ‘더 알란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종로 GS타워몰에 액세서리 편집숍
‘알란스(ALAN’S)’를 오픈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8호(2014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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