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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CS OF CURRENCY | 환율전쟁 재점화… 한국경제 향방을 묻다
입력 : 2013.12.12 13: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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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나타났던 전 세계 환율전쟁의 2라운드가 열릴 기세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최근 환율방어를 위해(겉으로는 디스인플레이션 탈출을 내세웠지만) 기준금리를 전격 인하했다. 미국 재무부는 한국에 대해 원화가 저평가됐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20개월 연속 쌓이고 외국인들이 우리 증시에 뭉칫돈을 투자함에 따라 원화값이 지난달 한때 급격하게 치솟았다. 정부와 한은의 공동 구두개입으로 원화값은 다시 1070원대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환율 급변동 우려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60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되는 경상수지 흑자를 감안하면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000원대 초반까지 낮아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테이퍼링 시점과 규모, 중국의 구조개혁 성패, 일본의 아베노믹스 추이와 같은 대외변수가 급변할 가능성이 커 원화값이 들썩일 여지는 여전히 크다.
한때 달러당 1500원대까지 떨어지던 원화 가치는 2011년 이후 1000원~1100원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내년에는 환율이 세 자리 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원화값 상승의 마지노선이라 불리는 달러당 1050원 선이 연내에 또 깨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 회장(고려대 교수)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환당국의 개입 없이는 올해 안에도 달러당 1000원대 환율이 깨질 수 있는 상황이다”라며 “원고를 그냥 방치할 경우 수출타격과 경상수지 흑자감소, 외환보유액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원·달러 환율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당장 미국이 양적완화 규모를 언제 축소할 것인지에 크게 달려있는 것 같다. 현재 미국은 매달 850억달러의 자금을 시중에 푸는 양적완화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연준은 양적완화에 적용하는 금리를 사실상 제로상태인 0~0.25%로 유지하고 있다. 양적완화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공급되는 돈이 달러이므로 달러가 풀린 만큼 가치가 하락하는 게 정상이다.
올해 3월부터 미국에서는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장은 양적완화 축소를 지금까지 연준이 정책적으로 낮게 유지한 금리가 점차 상승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이 여파로 미국 달러화의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선 그동안 유동성이 대거 유입되었던 신흥국에서는 대규모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오기도 했다. 특히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에서는 환율이 급등(자국통화 가치 하락)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원화값이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했지만 8월부터 한국 금융시장이 신흥국 중에선 가장 안전하다는 시각이 확산되며 오히려 원화값은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후 시장에서 확신했던 9월 양적완화 축소가 예상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세계의 환율은 그동안 일어났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흥국 통화가치가 안정되고 전 세계 시장에서 투자자산 가치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원화값 상승과 함께 주식 시장에 외국인 투자 자금이 빠르게 유입돼 주가가 소폭 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화값이 지나치게 빠르게 상승한다고 판단한 정부가 시장개입을 통해 11월 8일 달러당 1060원대에 묶어놓았다. 11월 들어 외국인 주식 매수는 줄어들었지만 경상수지 흑자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원화 강세 방향을 돌리려면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와 같은 큰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게 다수의 생각이다.
현재 전문가들은 한동안 달러화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물론 미국 경제가 생각보다 빠르게 좋아져서 양적완화 축소가 조기에 이뤄질 경우 원화값은 하락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환율이 딱히 어느 쪽으로 움직인다고 단언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환율에는 당사자 양국은 물론이고 그 외의 대외관계가 종합적으로 녹아든 데다, 시장 밖에서 정부의 개입이 이뤄질 소지도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화 저평가(환율 상승)가 한국경제 성장에 보탬이 되는지에 대해선 극명하게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딱히 환율이 어느 쪽으로 갈 것이라고 장담하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다. 환율관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처지에선 원화가 고평가 되면 수출 경쟁력이 낮아지면서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외환보유액이 줄면서 외환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3저(유가, 금리, 원화값) 바람을 타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정부와 학계 중추세력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이들은 달러화 환율 못지않게 엔화 환율을 중시하면서 환율이야 말로 한국 제조업과 수출경쟁력을 지탱하는 핵심이라고 여긴다.
반면 신진 학자들과 관료들을 중심으로 환율관리 무용론도 점차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경제의 수출경쟁력이 더 이상 환율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김중수 한은 총재조차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환율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고 강조할 정도다. 실제 달러 대비 평균 원화값이 비교적 높게 유지됐던 올해 한국의 경상수지는 사상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들은 우리의 수출 대표상품인 스마트폰과 반도체, 자동차 등이 가격을 뛰어넘은 품질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고 말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원화 약세로 수출을 늘리더라도 그게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 저축이 투자를 앞지르거나, 내수가 부진할 때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과도하게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상황에서 내수를 억누르면서까지 경상수지 흑자를 늘리는 게 효율적이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이익을 보는 대기업(수출업체)들이 투자나 고용에 미온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의 환율안정화 정책이 어떤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환율전쟁에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어찌됐든 정부는 단기적으로 급격한 환율변동을 막을 선제적 개입 정책과, 넉넉한 외환보유액 유지 정책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기재부와 한은은 급격한 원화 절상 상황에서 공동구두개입을 통해 원화값 꺾기에 성공한 바 있다. 최근 국내에 유입되는 외화자금이 미국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시작 이전까지 투자자금을 한시적으로 운용할 목적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외환당국의 개입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서 출구전략의 첫 발걸음을 뗄 때 썰물처럼 빠져나갈 돈이란 분석에서다.
권구훈 골드만삭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과거처럼 원화값 하락을 유도하면서 수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는 건 무리”라면서도 “최근 외환당국의 환율개입은 조만간 빠져나갈 돈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변동성을 줄였다는데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10월 3432억달러까지 늘어난 외환보유액을 더 늘리는 방안에 대해서도 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적절한 외환보유액 수준에 대해선 여러 가지 기준이 제기되고 있는데 현재 수준이 충분하다는 쪽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 기준을, 늘려야 한다는 쪽에선 중국 대만 등 이웃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중을 근거로 대고 있다.
실제 지난 10월 한국과 태국 대만 인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신흥국들은 외환보유액을 적게는 0.6%에서 많게는 2.8%까지 늘리면서 외환유출 방어벽을 높게 쌓는데 주력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환 당국 관계자는 “한국을 포함해 최근 신흥국 국가들이 외환보유액을 사상최대 규모로 늘리고 있는 것은 환율개입의 흔적으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며 “한은은 외환보유액을 지난달 63억달러 늘렸는데 스팟으로 매수한 것과 외환 스와프 연장규모를 고려하면 개입규모가 더 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한은 보유 외환보유액 중 30% 가까이가 모기지 채권과 위험가능성 있는 회사채들로 보인다”며 “테이퍼링 이후 외환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을 대비해서 한은은 지금 규모에 안주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외환보유액을 늘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전문가의 다수 의견은 한국의 외환보유액 자체가 부족하지 않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정부 보유 외환의 보험적 성격을 감안하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식의 접근은 효용 대비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을 내는 측에선 장기적으로 한국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려면 한국의 대표 산업이 가격경쟁력을 넘어서는 질적 개선을 이뤄야 한다고 제기한다.
올해 평균 원화값은 낮지 않았지만 600억달러를 넘어서는 경상수지 흑자를 낸 것도 우리 수출 품목이 어느 정도 비가격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해외 적재적소에 생산시설을 늘려 환율 영향을 피해간 효과도 크다고 한다. 장정석 한국은행 국제무역팀장은 “올해 9월까지 한국은 중국과 동남아에서만 900억달러 가까운 순수출을 이뤄냈다”며 “국내 기업들이 신흥국 지역에서 적극적인 현지 생산을 하고 있고 국내 부품의 질이 크게 개선되면서 비가격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게 큰 요인이다”라고 분석했다.
[전범주 매일경제 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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