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박 대통령의 행복기금을 망쳤나

    입력 : 2013.05.30 10:46:21

  • “저는 금융회사와 민간 자산관리회사(AMC)가 보유하고 있는 연체채권을 ‘국민행복기금’에서 매입한 후, 신청자에 한해 장기분할 상환을 하도록 채무조정을 하겠습니다. 현재 180여만명의 금융채무불이행자와 민간자산관리회사 등이 보유하고 있는 140여만명의 금융채무불이행자 등 약 322만명이 혜택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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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 2012년 11월 11일 발표한 가계부채 대책의 핵심 내용이다. 당시 박 후보는 선거가 임박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인 이날 다른 일정을 제쳐놓고 이 대책을 발표하는 데 주력했다.

    이 대책 하나가 사실 나머지 전체 공약과 맞먹을 정도의 무게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해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정책 입안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공약이 제대로 이행된다면 320만명에게 고금리의 사슬을 끊어줄 뿐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가계부채에 묶여 제대로 돌지 않는 시중자금까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기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는 정책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감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정치부 기자들은 이 공약의 파괴력을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국내의 주요 신문조차 이날 발표한 공약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한 뒤 나온 정책은 공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이상한 형태였다. 당초 공약 초안을 마련하는 데 참여했던 한 인사는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고 허탈해 했다. 국민행복기금 설립 목적이나 정책 방향이나 온전하게 남은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무슨 까닭일까.

    은행행복기금으로 변질? 지난 4월 22일 오전 강남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옥 앞에는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의 대표 공약이었던 국민행복기금이 변질되고 퇴보했다며 이를 ‘국민행복기금 사기사건’이라고 몰아붙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추진 중인 국민행복기금은 말만 국민을 위한 것이지 실제는 ‘은행행복기금’이라고 비판했다.

    도대체 행복기금에 어떤 문제가 있고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대책 발표 현장에서 가계부채 문제는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 실현가능성 등 다양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을 가지고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며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접근하겠다고 선언했다.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채무자 지원은 ‘자활의지’가 있는 경우로 한정한다. 모든 채무자를 무원칙하게 지원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지를 갖고 자구계획을 이행할 용의가 있는 채무자만 선별해 적극 지원한다. 둘째, 금융회사도 손실을 분담하도록 한다. 대출 부실화는 부실대출을 해준 금융기관도 책임이 있는 만큼 부실화된 대출의 손실을 채무자와 금융기관이 함께 분담하도록 한다. 셋째, 선제적 대응으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인다. 대출이 완전히 부실화되어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이 심각한 타격을 입기 전에 금융위기에 미리 대비한다. 여기서 두드러진 점은 ‘금융기관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금융권에선 대출거래와 관련 채무자 책임을 강조하는 게 일반적 관행이었는데 최고 통치권자가 되려는 박 후보가 공약으로 ‘채권자 책임’을 명시한 것이다. 이게 금융권의 반발을 샀기 때문일까. 박 대통령의 행복기금에 대해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 일부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가계부채의 연착륙을 위한 일관성 있는 정책만 강조하던 김 전 위원장은 퇴임하면서까지 ‘정공법’을 거론하며 그런 시각을 우회적으로 드러냈고 부실채권정리기금 사용에도 이견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난 3월 25일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 측이 국민행복기금 주요 내용과 추진 계획을 발표하자마자 거의 모든 언론은 정부가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준다는 내용을 주요 기사로 실었다. 일부 언론은 사설까지 동원해 국민행복기금 때문에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행복기금이 정식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모럴해저드를 부추기는 부도덕한 정책으로 매도해 버린 것이다. 철저히 은행 시각이 반영된 기사였다.

    언론이 이런 식으로 기사를 다룬 데는 금융위의 책임이 적지 않다. 당시 금융위가 ‘원금감면’을 주요내용 중 하나로 하는 보도자료를 뿌렸을 뿐 아니라 브리핑에 나선 정은보 당시 금융위 사무처장까지 부주의하게 ‘원리금 탕감’이란 단어를 여러 번에 걸쳐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약에 채무감면 내용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채무감면은 금융기관에 지고 있는 채무를 깎아준다는 게 아니라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싸게 인수한 행복기금이 채권을 싸게 인수한 만큼 채무조정 과정에서 열심히 빚을 갚는 채무자에게 차후에 부담을 완화시켜 줄 수 있다는 취지였다.

    절대적으로 부실채권 인수가 먼저고 채무감면은 그 이후의 부수적인 것인데 사전적 채무조정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처럼 금융위가 ‘탕감’을 강조한 나머지 이날 브리핑의 주요 내용은 완전히 빛이 바랬다.

    그런데 금융위 브리핑 날짜보다 훨씬 전부터 금융권 내에선 ‘국민행복기금=탕감’이란 내용의 루머가 떠돌았다.

    지난해 박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일부 기자들이 국민행복기금을 거론하면서 기사의 방향을 ‘탕감’과 ‘모럴해저드’로 몰고 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누군가 고의로 대통령을 흠집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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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대통령에 도전했나 공약 초안을 마련했던 인사들은 이에 대해 정부와 금융당국을 의심하고 있다. 행복기금을 가계부채 컨트롤 타워로 삼을 수도 있다는 여당의 의도에 반발해 고의로 훼손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초 여권에서 공약을 만들 때는 행복기금을 설립해 신용대출과 하우스푸어를 포함한 가계대출 부실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 서민금융지원 시스템을 통합하는 수준까지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부실여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잉여금이 남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 자금을 서민금융 지원에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행복기금의 위상이 이처럼 커질 경우 금융위나 금융감독원의 영역을 일부 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선 이 때문에 금융당국에서 박 대통령의 정책을 의도적으로 축소한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1순위 담보를 쥐고 있는 은행들이 지속적으로 고금리를 챙기기 위해 언론 플레이를 하며 방해를 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행복기금은 2, 3금융권까지 얽혀 있는 채무자들의 다중채무를 풀어주려 하지만 은행권 입장에선 담보를 잡고 고금리까지 받는 현재의 상황을 즐기려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부실채권을 처리하며 쏠쏠히 재미를 보는 측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우스푸어 대책 손못대 어찌됐든 행복기금은 취지가 손상됐을 뿐 아니라 내용까지 초라할 정도로 왜소하게 만들어졌다. 또 극히 일부의 가계부채만 정리할 수 있게 됐을 뿐 하우스푸어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한 상태로 남게 됐다. 특히 집값 하락을 막아 가계부실과 경제를 연착륙시키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은 처음부터 수렁에 빠지게 됐다.

    당초 박 대통령은 ‘부실채권정리기금 잉여금 배당액’ 3000억원을 출자하고 한국자산관리공사 고유계정에서 7000억원을 차입하고 신용회복기금 잔여재원 8700억원을 더해 1조8700억원을 기초자산으로 삼아 이를 바탕으로 10배의 채권을 발행해 18조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해 가계대출 부실을 일거에 정리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공약 입안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이 기금의 일부를 신용보증기금 등에 출연해 보증한도를 늘리는 것까지 이용할 경우 50조원 이상도 지원이 가능해 고금리 대출을 막을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 예상됐다”며 “그러기 위해선 행복기금은 특별법에 의한 정부 기금으로 출범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특히 “행복기금은 가계부채에 직접 자금을 투입하기보다는 신용공여 등 간접적 지원에 주력해 유동성 유출을 최소화하며 효과를 극대화할 방침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금융당국은 국민행복기금을 빨리 출범시킨다는 명목 하에 기존의 신용회복기금을 전환하는 것으로 대체해버렸다. 그것도 정부 기금이 아니라 주식회사로 만들었다. 게다가 당초 박 대통령이 의도했던 자금계획마저 갈래갈래 나눠 힘을 쓰기 어려운 구조로 축소시켰다.

    특히 지분 구조마저 이상하게 변질시켜 은행권의 이익창출 기구처럼 만들었다. 신용회복기금은 당초 8700억원의 자산이 있었는데 이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국민행복기금의 자본금은 6670억3400만원으로 줄었다. 신용회복기금에 출자했던 21개 금융기관의 지분율은 31.72%로 하는 대신 출자금을 그대로 인정해 6969억8400만원으로 정한 반면 캠코엔 68.28%의 지분율을 주는 대신 출자액은 5000만원만 인정키로 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행복기금의 사업이익을 지분율 아닌 출자비율로 나누기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행복기금에서 이익이 생기면 정부(68.28%의 캠코)가 아닌 은행들이 나눠먹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캠코 측은 자신들은 금융위에서 시키는 대로 업무를 대행할 뿐 아무 권한도 없다며 지분율이나 출자액에 따른 배당 기준 역시 금융위에서 정해서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국민행복연금을 ‘은행행복기금’이라고 공격하는 게 나름 이유가 있는 셈이다. 부실여신 정리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의도했던 ‘금융기관 책임’이 쏙 빠져버린 점도 행복기금이 ‘은행행복기금’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공약 초안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당초 공약에서 제시한 18조원은 고리대금의 피해를 보는 금융소비자들의 대출을 일거에 정리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었다”며 “금융위 주도의 현 행복기금은 금융기관의 골칫거리 부실여신만 정리할 뿐 고리대금의 사슬을 끊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특히 공약 입안 땐 (정부기관인) 행복기금이 채권을 발행해 금융기관에 넘기는 방식으로 금융기관의 남아도는 자금을 끌어 모아 고리대금을 청산하려고 했는데 기구 자체가 쪼그라들어 당초 취지를 살리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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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대금업자에 기회줘 금융위는 행복기금이 당초 공약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데 대해 우선 출범시킨 뒤 시급한 채무조정을 먼저 하고 진행 과정을 보아가며 추가로 필요한 부분에 대해 지원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전문가들은 이미 자금이 흩어지고 기구마저 변질돼 추가 확대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행복기금의 증자가 필요한 상황이 닥쳐도 현재 지분구조로는 추가 출자가 쉽지 않을 것이란 게 첫 번째 이유다. 외국인 주주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배임 소지가 있는 자금집행을 민간은행에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들 역시 설령 주식회사로 출범한 행복기금이 차후에 채권을 발행하거나 ABS를 발행한다고 하더라도 정부 기구가 아니므로 훨씬 높은 금리를 물어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현재 구조로는 어떻게 보아도 행복기금에 일반은행 이상의 신용등급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평가다.

    이와 관련해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현재 발표된 국민행복기금 대책은 기존에 실패한 정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햇살론처럼 금융기관에 던져놓고 제대로 관리조차 하지 않은 정책들의 공과를 분석조차 하지 않은 채 다시 두루뭉술한 정책을 던진 셈이 됐다”고 비판했다.

    중립적 위치 또는 국익 차원에서 개별 은행의 희생까지 요구해야 할 국민행복기금 이사장 자리에 은행의 이익 대변자라고 할 박병원 은행연합회장이 앉은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현 체제로는 박 대통령이 의도한 ‘대출자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를 주축으로 발족한 국민행복기금 감시단은 박 이사장에 대해 “우리금융지주 회장 출신에, 현재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 가계부채 급증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박 대통령이 원대한 구상을 갖고 내놨던 행복기금은 이처럼 대폭 위축된 상태다.

    문제는 지금 이 단계에서 고금리 구조를 끊어내지 못하면 고리대금은 독버섯처럼 살아나 한국경제를 두고두고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란 점이다.

    국제경쟁력이라곤 형편없이 뒤지는 은행들은 지금 국내에서 수익을 챙기려고 지속적으로 고금리 대출처를 찾고 있다. 이 바람을 타고 대부업체나 저축은행에 일본계 자금이 밀려들고 있다. 세계적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고리대금업자들의 각축장으로 남은 셈이다.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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