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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대책은 제2의 8.3조치
입력 : 2013.05.30 10: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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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내놓은 가계부채 대책의 기본 방향은 고리대금의 사슬을 끊어준다는 점에서 선친인 故 박정희 대통령이 40년 전인 1972년 8월 3일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단행한 8.3조치와 맥을 같이 한다. 금융 소비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고리대금은 사회악이라는 박 대통령 부녀의 의지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에서 ‘약탈적 대출’이니 ‘불법추심’ 같은 강도 높은 용어를 쓴 것은 물론이고 ‘금융기관의 책임’을 묻겠다고 한 데서도 이를 읽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발표한 가계부채 대책 서두에 “가계소득은 늘지 않는데 가계부채는 계속 증가하면서 많은 가정이 높은 이자와 원리금 상환 부담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특히 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비은행권 가계대출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까지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한 대목은 사실 이를 완곡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전·현직 부녀 대통령의 정책에 차이가 있다면 8.3조치 때는 긴급명령의 수혜를 주로 대기업이 보았는데 이번 가계부채 대책의 혜택은 일반 서민이 주로 본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은 8.3조치 당시 고리대금의 상당 부분은 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었지만 이번 가계부채 대책의 경우 정부의 인가를 받은 대부업자는 물론이고 특허 성격의 인가를 받아 영업을 하고 있는 은행까지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가계부채 대책엔 사회적 정의에 반하는 금융기관에 대한 대통령의 불신이 상당 부분 내재돼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책 집행상의 차이점도 발견된다. 긴급명령 당시는 명령으로 고리를 저리로 전환하는 게 골자였지만 이번 대책은 고금리 때문에 부실여신이 된 것을 정부가 사들이는 방식으로 금융기관들의 부실을 털어주면서 서민들의 부담까지 완화시킨다는 것이다.
고금리 해소는 정의 구현 방편 편협한 시각을 가진 일부 인사들은 8.3조치에 대해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침해니 사회주의적 강제니 하며 무조건적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실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3조치가 단행된 지 3년이 지난 1975년 당시 명동에선 삼성그룹 계열사의 어음을 할인하려도 2부5리의 이자를 떼어야 했다. 월 0.25%이니 연 30%의 고금리다. 당시 새마을운동 바람을 타고 한국의 손꼽히는 기업 중 하나로 부상한 한국건업(현 벽산건설)의 기업어음 할인 금리가 3부 정도였고 이름이 덜 알려진 기업의 어음은 4부에서 5부를 제하더라도 할인만 해주면 감지덕지해야 할 정도였다. 유통을 시켜 자금을 돌릴 수 있는 상거래 어음에 붙는 금리가 이 정도였으니 일반 사채 대출 금리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고금리 세상에선 전주들의 힘이 막강했다. ‘백 할머니’니 ‘광화문 곰’이니 하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던 큰손들의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전해질 정도다.
8.3조치는 기업들의 금리부담을 낮춰줬을 뿐 아니라 사금융을 공금융으로 전환하거나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면서 전체 자금흐름을 개선하는 데도 일조했다.
당시 무진회사라는 이름으로 활개 치던 사채업자의 상당수가 상호신용금고로 전환했다. 물론 8.3조치 전 다수의 무진회사가 모여 은행을 만들기도 했는데 국민은행이 대표적이다.
금리인하로 기업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고 지하경제가 양성화되자 주가가 폭등하기도 했다. 8.3조치 후 사흘간의 휴장 후 열린 첫 증시에선 전종목이 상한가로 뛰기도 했다.
형식이 어찌됐던 고금리 대출 제한은 경제력의 이동을 수반한다. 8.3조치 이후 삼성이나 현대 등 민간 기업이 급격히 성장한 게 대표적이다.
중앙은행의 실질 재할인금리가 사실상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터무니없는 고금리를 챙기던 금융기관들의 위상은 이번 조치로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8.3조치 주요 내용 - 8월 2일 기준으로 신고된 사채는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새로운 채권채무관계로 전환한다. 이자는 1개월마다 지급하되 이자율은 월 1.35%(연 16.2%)로 당초 이자율이 월 1.35% 미만인 경우에는 종래 이자율을 적용한다.
- 2000억원 범위 내 기업 단기대출금 잔액의 30%를 연리 8%,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장기저리대출로 전환한다. 대환에 필요한 자금은 한국은행이 지원한다.
- 신용보증기금을 설치해 담보 능력이 약한 중소기업 신용대출을 촉진한다.
- 한국산업은행에 산업합리화기금을 설치, 기업에 장기저리자금을 공급한다.
기업의 특별감가상각률을 종전 30%에서 40~80%로 올리는 등으로 투자를 촉진한다.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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