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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the Money & Run
입력 : 2013.05.30 10: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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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이 용이한 5만원권의 유통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금괴와 금고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Part Ⅰ 안방으로 들어간 돈
주식이나 부동산 등 아직까지 불확실성이 가득 찬 투자처에 뚜렷한 자금유입은 눈에 띄지 않는다. 경기가 어려운 시기 ‘피난처’ 역할을 하던 은행에서마저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은행권 예금이탈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됐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과세구간이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조정되며 지난해 12월에만 은행에서 9조4000억여원이 이탈했다.
이후 은행 예금은 올 1월 1조8000억원이 늘어난 이후 2월부터 순차적으로 약 2조원씩 줄어들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4월 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552조2746억원으로 1월 말 558조2907억원에서 6조161억원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속적인 금리인하에 대한 실망과 금융소득노출에 대한 부담은 현금보유 증가로 나타났다.
같은 맥락에서 보관이 용이한 5만원권 유통은 급격하게 줄었다. 지난 설 연휴 며칠 전부터 많은 은행들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는 ‘5만원권 없음’이라는 안내장이 붙어 있었다. 창구에서도 5만원권 인출이 가능한 곳을 한정해 놓는 지점들이 많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5만원권 총 발행액은 5조7593억원이었으나 환수액은 3조3735억원에 그쳤다. 환수율로 보면 58.6%에 불과해 지난해 4분기 86.7%에 비해 눈에 띄게 감소했다. 고액자산가들이 5만원권 뭉치를 대량 인출해 보관하면서 품귀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지난 4월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국세청이 지하경제 양성화 차원에서 대대적인 세원 발굴에 나서자 고액자산가들이 5만원권을 현금다발로 인출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5만원권이 부자들의 탈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동시에 환금성이 높고 금융소득노출을 피할 수 있는 금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백화점에서 잇달아 선보이고 있는 금괴는 출시하자마자 매진되고 있다.
2010년부터 골드바를 판매하는 신한은행은 올해부터 월평균 판매량이 100% 이상 증가해 한 달에 500kg(약 280억원) 정도를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부터 골드바를 판매하는 국민은행의 경우에도 한 달 동안 약 350kg(약 200억원)이 팔려나갔다.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금값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괴 매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덩달아 돈이나 금괴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개인금고의 판매량도 늘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올 1~3월 금고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0~100%가량 증가했다. 한 금고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국산 금고에 대한 판매도 늘어났지만 특히 외산 특수 금고에 대한 수요가 많다”며 “이들은 일반적인 국내 가정용 금고에 비해 내구성이 높지만 가격은 5~10배까지 비싸 고액자산가들이 주로 구매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시중의 돈이 지하로 숨어드는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돈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이쯤 되면 천재수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인간의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The most powerful force on earth)이라 극찬한 ‘복리(Compound interest)’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가 2.3%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금리에서 이자 소득세와 물가상승분을 제할 경우 실질금리는 ‘제로’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향후 추가적인 금리인하를 검토하고 있어 정기예금의 투자매력은 더욱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전문가들은 올해부터 바뀐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예금감소와 현금보유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입을 모은다. 김일수 국민은행 강남스타PB센터 팀장은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전체 자산에서 예금비중이 높은 고액자산가들의 경우 주식이나 현금·현물 쪽으로 포트폴리오 비중을 늘리는 고객들이 상당수”라고 귀띔했다.
Situation Ⅱ 이자는 줄고 돈되는 곳은 없고 지난달 서울머니쇼에 참가한 이정주(64) 씨는 8억여원 자산을 지닌 소위 이자생활자다. 몇 년간 차곡차곡 부어온 적금과 남편이 남기고 간 퇴직금과 생명보험금을 합친 돈에서 나온 이자로 생활하고 있다. 이씨가 지난해까지 받은 이자는 연간 2000만원이 조금 넘어 월 170만원 정도다. 가끔씩 보내오는 자녀들의 용돈과 합치면 크게 넉넉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생활하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금리추락에 이씨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한 달 생활비가 30만원 이상 줄어든 것 같다”며 “몇 년을 더 살지도 모르는 마당에 매달 돈 나오는 안정적인 곳(투자처) 찾기도 힘들고…”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비단 이씨 같은 이자생활자들의 고민만은 아니다. 고액자산가들 역시 대안투자처를 찾기란 마땅치 않은 환경이다. 박스권에 갇혀 버린 주식시장이나 좀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부동산에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금융사들은 ‘중위험 중수익’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환차익에 대해 비과세 혜택이 있는 브라질 국채 등의 절세상품이나 해외 채권·펀드가 대안이라는 의견이 많다. 허나 지난해 수익률이 바닥이었던 브라질 국채나 과거 수익률이 폭락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해외 펀드에 대한 악몽은 쉽게 가시지 않기에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형국이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현재의 투자시장을 “예금 금리로는 재테크 자체가 어렵고 부동산이나 주식 등으로 재테크를 하기에는 여건이 안 좋아 자산을 불리기는커녕 지키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이라 평했다.
강남에서 사업을 하는 50대 A씨는 올 초 자신의 두 자녀 명의계좌에 3억원씩을 넣어 놓으려는 생각을 접었다. 세법개정으로 종합과세에 합산되는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배우자, 자녀 및 친인척에게 계좌분산을 시킬 경우에 대비해 차명계좌 증여추정 규정이 신설됐기 때문이다. A씨는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인지라 자칫 세무조사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느꼈다. 결국 계좌 대신 현금으로 보관하기로 결심했다.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확대하고 차명계좌를 이용한 증여세, 양도세 탈루 등의 조사를 강화하면서 각 금융권 PB센터에는 세금 관련 문의가 급격히 늘었다. 이들은 주로 과거 배우자나 자녀 명의로 증여 신고를 하지 않고 계좌를 만든 경우 문제가 되는지 여부를 묻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상도 우리은행 투체어스 대치중앙센터 부지점장은 “차명계좌의 경우 과거에 행위도 문제가 될 수 있고 당장 감춰지더라도 향후에 폭탄 과세의 우려가 있어 불안해하는 고객이 많다”고 설명했다.
차명계좌를 실명으로 원위치 시킬 경우 계좌이체 거래내역 때문에 국세청의 조사를 받게 될 우려가 있다. 차명계좌의 돈을 되돌리는 과정이 증여가 되면서 과세가 발생하는 것이다. 반대로 차명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불법 차명계좌를 보유한 셈이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많은 자산가들은 과세 당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강남권에서 활동하는 한 재무설계사(FP)는 “세무조사 공포감을 떨치려 아예 현금으로 인출해 개인 금고에 보관하는 고객들이 상당수”라며 “얼마 안 되는 계좌를 유지하느니 그냥 원금만 보존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SituationⅣ 내 돈을 왜 감시당해야 하나 개인의 금융거래는 물론 금융실명제법과 신용정보보호법에 따라서 원칙적으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의심거래’와 ‘고액현금거래’의 경우 FIU라는 금융정보분석원에 보고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는 은행뿐 아니라 보험, 카드사, 캐피탈 등 모든 금융회사에 해당되는 의무다. 의심거래는 은행이나 보험사 카드사 등 창구 직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 옷을 입고 온 사람이 수천만원을 송금한다거나 불량스러운 청소년이 고액을 입금할 때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반면 고액현금거래의 경우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 수상하다거나 의심스럽다거나 하는 주관적 판단의 개입 없이 하루 2000만원 이상 현금거래를 할 경우 무조건 FIU에 보고된다. 현금을 입금하거나 출금하거나 송금하는 것이나 수표를 바꾸거나 소액권을 고액권으로 또는 고액권을 소액권으로 바꾸는 것도 현금거래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고된 자료는 국세청에서 조세범처벌법 위반혐의(3조)에 따른 ‘사기 또는 기타 부정한 행위’, 즉 고의적인 탈세혐의가 명백할 경우 FIU에 관련 금융정보를 요청한 뒤 내부 위원회 결정에 따라 열람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국세청이 조세법처벌법상의 범칙혐의 외에도 내부 과세자료 등 분석을 통해 탈세혐의가 의심될 경우 FIU에 관련 금융정보 열람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에 있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국세청은 이를 활용해 더욱 적극적으로 세수 확보에 나서겠다고 하니 고액현금거래가 많은 자산가들의 입장에서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 증권사 PB는 “FIU에 대해 숙지하고 있는 경우 항상 일정정도 이상의 현금을 들고 계신 고객들이 많다”며 “금액이 크지 않은 계약 같은 경우 은행거래를 피하고 공증을 받는 형태로 진행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한다”고 밝혔다.
[안재형·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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