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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 l]막히고 얽힌 한국의 자금흐름
입력 : 2012.08.06 1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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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주요 금융기관들이 앞을 다퉈가며 리스크 관리에 나섰다. 몸을 사리겠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곳엔 대출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융기관들이 움츠러드니 불황기일수록 투자를 하면서 경제를 선도해야 할 대기업들도 움츠리고 있다.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낸 삼성전자가 위기경영에 돌입했고 돈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롯데그룹마저 비상경영을 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돈은 은행에 쌓이고 있다. 주가마저 게걸음을 하니 증시에서 빠져 나온 돈까지 은행으로 몰리고 있다. 그 돈이 돌지 않아 곰팡이가 필 지경이다. 한국경제의 혈맥에 동맥경화가 생긴 것이다.
돈은 은행에만 쌓인다한국은행
이에 앞서 7일물만 나왔던 7월 5일과 6월 28일 RP 매각엔
각각 12조6900억원과 12조
6100억원의 자금이 몰렸고 21일물을 함께 팔았던 지난 6월 21일엔 금융기관들이 20조원이 넘는 돈을 싸들고 와 RP를 사려고 했다.
금융기관들이 돈을 싸들고 한은으로 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은이 이번에 기준금리를 내리기 직전과 직후 RP 매각금리는 7일물이 3.25%와 3.0%에 불과했다. 같은 시점의 7일물 MMF 금리가 모두 3.36%였고 91일물 CD금리는 금리인하 전 3.54%에서 인하 후 3.25%가 됐다. 금융기관들이 상대적으로 싼 MMF와 CD가 있는데도 굳이 비싼 값(저금리)을 내면서 한은으로 몰려든 것은 은행권의 돈이 그만큼 남아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독당국의 가계대출 통제에도 불구하고 각 은행이 돈을 쓰지 않겠다는 우량한 개인들을 찾아다니며 대출세일을 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대조적으로 일부 수출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과 영세 상공인들은 돈가뭄에 허덕이고 있다.
정부의 규제에 묶여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고 있는 건설업체들 사이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구조조정 얘기가 쏟아져 나오고 하청업체의 도산이 이어지고 있다. 7월 초 삼환기업마저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업계에선 제2, 제3의 후보가 누가 될 것이라는 등의 루머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금융가에선 건설 업종에 이어 수주가 급감한 조선 업종과 장기 적자가 이어지고 있는 디스플레이 업종 등으로 구조조정 바람이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세 중소기업이나 소상인들은 자금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박 모씨는 “여기 막으면 저기가 터지고 저기 막으면 여기서 터진다. 언제까지 자금을 끌어다 메울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SC제일은행의 기업금융 담당자는 “돈 빌리러 오는 기업들은 많으나 최근 손실이 늘어나는 추세라 선별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며 “대기업인 P사의 협력업체들까지 자금이 원활치 않다는 얘기가 나와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놨다.
돈이 돌지 않아 건설경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기업도산이 이어지면서 세수가 줄어든 지방자치단체들까지 자금난을 겪고 있다. 이미 돈을 꾸어 임금을 지불했던 인천시는 송도신도시 등의 토지를 담보로 차입을 하거나 아예 일부 부동산을 팔려고 나섰다. 경전철 사업 실패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는 용인시도 공무원 봉급 인상분을 동결한 데 이어 추가자금 확보를 위해 부동산 매각에 나서고 있다.
돈이 돌지 않아 주택거래가 끊기면서 개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박탈당할 상황에 처했다. 일산의 임 모씨는 집을 팔고 시골로 가고 싶어도 팔리지 않아 옮길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오래전 집을 내놓았지만 문의마저 끊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금융기관엔 돈이 남아도는데 시중자금이 필요한 곳으로 흐르지 않아 급전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연체 급증, 금융기관 졸라매기 지속 그렇지만 돈줄이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금융감독원의 5월 말 국내은행 대출채권 연체율 통계에 따르면 가계대출 연체율이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2008년 금융위기 수준보다도 악화됐다.
2008년 말 0.6%에 불과했던 가계대출 연체율은 지난 5월 말엔 0.97%로 치솟았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 역시 5월 기준 0.85%로 2008년 말의 0.67%보다 훨씬 높고 2006년 10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금융감독원은 국내은행의 연체율이 부동산 경기 둔화에 따른 건설업과 부동산 PF, 주택담보대출의 신규연체 증가 및 계절적 요인 등으로 인해 상승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은행권의 대출통제가 강화돼 새로운 부실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특히 가격이 급락한 아파트 담보대출에서 이 조짐이 보인다.
수도권에선 최근 집값이 급락하면서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기준치 이하로 떨어지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리스크 관리에 나서고 있어 이들 지역에선 만기가 됐을 때 대출을 연장해주지 않고 바로 회수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이 최근 조사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전망에서도 이런 기미가 뚜렷이 보인다.
“2012년 3·4분기 중 국내은행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태도는 완화기조가 약화될 전망이다. 대내외 불확실성 증대로 중소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될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은행들은 우량업체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완화기조를 유지할 방침이다. 대기업의 경우 유로지역 재정위기에 따른 불확실성의 영향으로 역시 완화세가 둔화될 전망이다. 가계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에 대해서는 정부의 가계부채 억제대책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자금운용처가 없어 중립적인 태도를 보일 전망이다. 일반자금 대출은 가계의 채무상환능력 저하 등으로 신중한 태도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행은 7월 초 이렇게 금융기관의 3분기 대출행태를 전망하면서 경제 전반에 걸쳐 신용위험이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중소기업의 신용위험은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내수경기 둔화로 수익성 악화가 예상되는 음식숙박업이나 도소매업, 건설업, 부동산임대업 등 경기에 민감한 업종뿐만 아니라 수출여건 악화로 제조업체의 신용위험도 상승할 우려가 있다. 대기업의 경우 유로지역 재정위기와 글로벌 경기회복세 약화에 따른 수출둔화 우려 등으로 신용위험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계의 신용위험도 큰 폭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가계부채 누증과 소득여건 악화 등의 영향으로 소득을 통한 채무상환 능력이 저하되고 있는 데다 주택가격 하락으로 담보력도 저하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최근 행보도 은행들을 움츠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6월 말 주요 은행 CRO(리스크 관리 담당 최고임원)를 소집한 회의에서 “가계대출 연체율이 지속 상승하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가계대출에 대한 리스크 관리를 강화해 줄 것을 당부했다”면서 “가계대출 연체율 상승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집단대출과 관련해 대출취급 시 개인 차주에 대한 적절한 신용평가가 이뤄지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적절한(평가)’이 ‘엄격한’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늑장대응으로 실기한 감독당국 문제는 이 같은 뒤늦은 대응이 국가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금감위는 지난 2011년 6월 6개월에 걸친 다각적 검토를 거쳐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근본적인 연착륙 종합대책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당시 금감위는 은행권의 가계대출은 문제가 없으나 제2금융권의 가계대출 증가세가 2007년부터 은행권을 추월하는 등으로 건전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상호금융과 보험사 등 제2금융권 금융회사의 가계대출을 관리하겠다고 했다.
금융감독원도 지난해 6월 서민층의 대출수요 증가로 상호금융 등 비 은행권의 가계대출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양상이라며 ‘가계대출의 구조개선 및 무분별한 확대 방지’ 대책을 국회에 보고했다. 금감원은 이후 서민금융회사의 가계대출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농·수·산림조합 중 위험조합에 대한 점검 및 권역 외 대출, 공동대출에 대한 통제를 시작했다. 또 서민금융회사의 대손충당금 적립비율을 상향 조정하고 조합별로 과당경쟁을 자제토록 했다.
같은 시기 카드사에 대해서도 금감원은 카드남발과 카드대출 급증 등 과도한 외형 확대로 인한 위험을 막겠다며 나섰다. 이후 카드자산과 신규 카드발급, 마케팅 비용(율) 등의 새로운 감독지표와 레버리지 규제를 도입했고 이어 카드사의 대손충당금 적립비율을 대폭 높여 카드대출 통제를 시작했다. 또 12월엔 미성년자에 대한 카드 발급을 규제하는 신용카드종합대책을 내놓았고 지난 5월엔 카드 불법모집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는 동시에 같은 사태가 추가로 발생할 경우 카드사 임직원을 징계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후 이어지는 금감위나 금감원의 정책은 지속적으로 가계대출을 통제하고 카드사용을 억제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런 감독원의 신용통제는 현장 경기를 급랭시켜 자영업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올해 초 잠실에 식당을 개업했던 박 모씨는 관공서 주변인데도 손님이 없어 6개월여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인위적인 통제는 금융기관들이 새로운 대출처를 찾아 나서도록 하는 풍선효과를 낳았다. 실제 금융당국의 규제로 은행이나 저축은행의 가계대출은 어느 정도 억제되고 있으나 개인사업자 대출이 급증하고 있고 보험·상호금융의 대출이 크게 늘어나는 변화가 또렷이 보인다. 구체적으로 개인사업자 대출이 지난해 12조8000억원 늘어난 데 이어 올해 들어서 5월 말까지 다시 6조3000억원이 늘어났으니 알 만하다.
상황이 이렇게 번지자 금감원은 지난 7월 6일 개인사업자 대출을 통제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부동산·임대업이나 도·소매업, 숙박·음식업 등 대출 집중 업종을 중심으로 관리해 나가겠다고 했다.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안이 번질 때마다 임시변통으로 막고 있는 셈이다.
감독당국이 우왕좌왕하자 연초 움츠렸던 은행권도 믿을 것은 직장인이나 주택담보대출이라며 대출 세일에 나설 정도다. 실제로 하나은행이나 SC제일은행 등 여러 은행이 고정금리 모기지론 판매나 직장인 대출을 홍보하는 전단을 배포하고 나섰다.
결국 감독당국의 근시안적 규제는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한 채 현장경기 특히 일부 업종의 경기를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특히 대응이 늦어 역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감독당국이 가계부채 대책을 내놓은 지난해 6월은 이미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찍은 뒤 조정에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게다가 곧이어 유럽 위기가 고조돼 경기가 냉각됐다. 대책이 늦었을 뿐 아니라 수정이 필요했는 데도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금융기관 살리는 게 금융감독?금융위를 주재하는 김중수 한은 총재
당시 감독원은 “상호금융의 저신용자(7~10등급) 대출비중이 높아 경기악화 시 한계차주의 부실화 등 잠재리스크가 우려된다”고 밝혔다. 금융기관을 걱정하는 내용이다.
실제 대책도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출 취급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LTV·DTI 규제, 예대율 규제 등을 통해 금융회사의 과도한 대출확대를 억제하는 게 주 내용이다.
금감원이 지난 6월 말 내놓은 ‘국내은행의 대출채권 연체율 현황’은 제목부터 은행을 걱정한다는 느낌이 배어나온다.
실제 이 자료의 마지막은 ‘향후에도 취약 부문의 부실화 가능성을 지속 점검하고 경기민감 업종에 대한 익스포저 관리 및 부실여신의 조기정리 등을 통해 건전한 자산성장을 유도’하는 것으로 돼 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역시 지난 7월 4일 금융경영인 조찬간담회에서 “가계부채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금융당국, 금융회사 간 공조가 필요하다”는 말로 금융기관을 걱정하는 뜻을 내비쳤다. 부동산 가격 하락과 관련해 권 원장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추가 손실 가능성에 대비하고 주택담보대출 건전성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으로 금융회사들의 건전성 관리를 강조했다.
공급자에 초점을 맞춘 정책은 현장에선 신용경색을 불러 금융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추가 부실을 일으키고 있다. 폴 크루그먼이 지적한 ‘위축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석동 금감위원장 역시 이런 맹점을 우려했으나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월 28일 가계대출 종합대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대출을 급격히 줄이거나 기존 대출을 회수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규대출 중심으로 시행하고 시기나 건전성 강화 수준도 단계적으로 적용하도록 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대출 통제 때문에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의 자금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통령이 그렇게 우려했는데도 ‘비올 때 우산 빼앗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엇박자 통화정책여의도 증권가
한은은 특히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터지며 금융위기가 본격화됐던 지난 2008년 8월엔 오히려 기준금리를 올려 경기를 급랭시켰다. 자던 개가 일어나 웃을 노릇이었다.
이후 경기가 곤두박질을 치고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한은은 두 달 뒤인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여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5.25%였던 기준금리를 2.0%까지 떨어뜨렸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얼마나 엉성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런 오류는 한은이 되지도 않을 물가안정 목표에 집착하고 있는 데다 통화량을 조절하는 수단으로서 금리의 효능을 과신하는 데서 생기는 것 같다.
그렇지만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특성상 국내 물가의 금리 연관성이 그리 크지 않다. 그 보다는 수입물가나 공공요금이 오히려 더 영향을 미치곤 한다. 음식점 주인이 자장면 값 올릴 때 금리 보고 올리는 게 아니라 밀가루 값이나 전기요금을 보고 올린다는 얘기다. 한은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임금인상도 물가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도 중앙은행이 공공요금에 어떤 언급을 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금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론상으론 금리가 통화량을 움직이는 수단이나 최근엔 금리와 통화량이 따로 노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 한국의 통화증가율 그래프는 기준금리 움직임과 거의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금리와 통화량을 함께 관리하던 과거의 통화정책이 보다 실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은은 외환위기 이후 통화량 목표를 포기하고 금리만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통화정책이 퇴보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통화량을 늘린다며 금리를 내린 뒤 공개시장조작에선 오히려 통화를 환수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7월 금통위 발표 직후 한은은 RP 매각규모를 직전 두 주보다 오히려 크게 늘렸다. 한은의 RP매각은 시중자금을 흡수하는 효과가 있기에 통화량을 풀어야 할 한은이 오히려 금리라는 잣대에 매여 거꾸로 된 선택을 한 셈이다. 이런 한은의 엇박자 때문에 시중자금은 필요로 하는 중소기업이나 가계로 흐르지 못하고 금융기관과 한은 사이에서 맴돌고 있다.
한국엔 금융이 없다 한국의 금융정책이 얼마나 낙후됐는지는 세계적 전문가가 “금융이 아니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정부 주도의 여신 회수로 카드대란이 극에 달했던 지난 2002년 12월 기자는 뉴욕대의 에드워드 알트만(Edward I. Altman) 교수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알트만 교수는 “돈이 많이 풀렸다고 한꺼번에 회수하는 것은 금융이 아니다”라고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다.
알트만 교수는 12년간 뉴욕대 스턴 MBA스쿨의 학장을 역임한 세계적 부도예측 권위자다.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사용하고 있는 ‘Z-Score 부도예측 공식’을 개발한 인물로 중국이나 브라질 등 각국을 돌며 컨설팅을 하는 세계적 금융 전문가이기도 하다.
알트만 교수는 당시 “(한국 정부가) 자금을 한꺼번에 회수하면 신용경색으로 대부분의 기업이 도산에 이르게 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2002년 11월 19일 ‘신용카드회사 건전성 감독강화 대책’을 감행해 신용경색이 극에 달하게 했다. 당시 정부 지시로 카드회사 대출을 한꺼번에 회수하는 바람에 수많은 자영업자가 도산했고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때 정부는 85조원이 넘던 카드회사 여신을 불과 몇 달 만에 50조원 선으로 축소했다. 운영자금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할 정도다. 이 때문에 자금난에 몰린 여러 카드사의 주인이 바뀌었고 신용경색으로 경기는 침체에 빠졌다. 알트만 교수가 “금융이 아니다”라고 진단한 지 10년이 됐지만 한국에선 아직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사실상 분식회계인 PF라는 수단으로 건설업체에 자금을 퍼줄 때 수수방관하던 당국은 이후 대출통제에 들어가 수많은 업체를 부도로 몰아넣었다. 대상이 카드사에서 건설사로 바뀐 것뿐이다.
은행들은 여유자금을 빌려줬던 저축은행에서도 예금을 한꺼번에 빼내 이들을 고사위기로 몰아넣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 1·4분기 예금취급기관의 산업별 대출현황에 따르면 은행의 금융기관 대출은 3조1000억원 줄었고 서비스업 전체의 운전자금 대출은 8조9000억원이나 줄었다. 특히 예금은행의 금융업 대출은 6조원 이상 줄었다. 그나마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이 2조9000억원 정도를 충당해줬다. 쉽게 말해 은행들이 서민금융기관의 돈줄을 죄는 것으로 서민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지금 돈줄이 말라 손을 든 저축은행들을 온갖 비리의 주범처럼 도마에 올려놓았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금융을 분석해 보기도 전에 정치인과의 연관성을 들먹이며 난도질을 하고 있다. 정치인에게 돈을 준 기업인은 단지 그들뿐인 것처럼….
마녀사냥 같은 단죄로 이 땅에서 저축은행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서민들은 은행을 찾아갈까. 천만에 서민이 갈 곳은 고리대금업자들이다. 그것을 아는 일부 은행들은 계열로 캐피탈이나 대부업체를 두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이 고리대금업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금융의 현실이다.
DTI는 손대지 않는다 경기위축이 장기화하면서 시장에선 정부가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이 규제만큼은 풀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김석동 금감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DTI 제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동산 시장과 관련돼 이것이 정책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제가 우선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DTI 제도가 차주(借主), 다시 말해 대출받는 사람을 보호하는 장치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원리금을 갚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대출을 받아야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대출한 금융회사가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란 점도 부인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제도는 금융시장의 안전판 가운데 하나란 게 그의 논리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경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DTI 제도를 조정하는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DTI 규제를 도입한 시점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사후에 고친 외양간 문이 너무 좁아 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린스펀이 M3를 없앤 이유는?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통화증가율이 급증했다면 시중자금이 넘쳐야 하는데 왜 반대로 경제 위기가 생기고 주가는 급락할까. 이 점이 중앙은행을 속이는 핵심 포인트다.
한국은행조차 M2나 Lf 증가율이 늘어났다는 것만 단편적으로 설명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이 금융기관 사이에서만 돌 때 통화증가율 그래프가 급격히 상승한다. 금융기관끼리 단기로 돈을 돌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기업이나 가계는 돈에 목마를 때는 아닐까.
지난 연말부터 연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코노미스트나 펀드매니저들에게 올해 자금 사정을 어떻게 보는가를 물었다. 이들 그래프의 움직임이 위기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금사정을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올해 상반기 저조한 펀드 성과로 나타났다. 리스크를 피할 시점에 떠안았기 때문이다. 이는 통화량 그래프를 투자에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미국에선 M2보다 너 넓은 의미의 M3가 자금흐름의 왜곡을 나타내는 지표로 유용하게 쓰였다. 미국의 M3는 한국의 Lf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앨런 그린스펀은 FRB 의장 자리를 내놓고 나가면서 M3지표를 없애 버렸다. 그린스펀이 왜 M3를 없앴을까. 시장의 전문가들이 이 지표로 그린스펀의 실수를 비판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3호(2012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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