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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들의 비밀투자노트 … 슈퍼리치 다들 어디 숨은 거예요?
입력 : 2012.06.01 17: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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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도대체 슈퍼리치들이 다들 어디 숨은 거예요?” 한 고액자산가(HNW) 전문 증권사 임원의 농담이 마치 진담처럼 들릴 정도다. 5월 중순의 불온한 증시 조짐을 미리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슈퍼리치, 시장 흐름과 박자 척척
그들의 발은 빨랐다. 연초 랠리가 시작될 때 삼성전자, 애플 등 글로벌 톱 기업들을 포트폴리오에 담고 절세 상품에 눈독을 들였던 그들은 지난 2월부터는 포트폴리오에서 펀드, 랩, 주식 등 이른바 위험자산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대신 3월부터 글로벌 하이일드 펀드를 포함한 채권형 펀드와 공모주 펀드, ELS 등 예금 금리+α의 수익을 누리면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같은 사실은 삼성증권 SNI센터의 고객 상품 판매 변화를 보면 확연하다.
삼성증권 SNI센터는 삼성증권이 2010년부터 운용 중인 초고액자산가 전문 PB센터로, 서울 강남파이낸스센터 등 7개 지점을 통해 금융자산 10억원이 넘는 고객 800여 명의 8조6000억원 규모 자산을 위탁 운용하고 있다. 슈퍼리치 PB 시장에서 삼성증권 SNI센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시장 점유율의 과반을 차지한다.
우선 지난 연말 기준으로 삼성 SNI센터 금융상품 판매는 자문형 랩 52.0%, 채권 18.3%, ELS 등 장외파생상품 15.6%, 주식형을 중심으로 한 펀드 9.8%, 방카슈랑스 4.3% 순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지난 4월 말 기준으로는 채권 42%, ELS 등 장외파생상품 24.20%, 자문형 랩 21.70%, 주식형 펀드 등 투신상품 10.50%, 방카슈랑스 1.70%였다.
주식을 공격적으로 편입하는 자문형 랩 상품이 지난해 슈퍼리치들의 인기를 끌었다면, 올해는 브라질 채권 등 채권과 변동성 장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익을 보장하는 ELS(주가연계증권)로 슈퍼리치들의 관심이 옮겨간 셈이다. 채권 투자 비중은 지난 2월엔 34.5%, 3월엔 55.8%에 달할 정도다.
채권 중에서도 물가연동국채와 브라질 채권이 관심의 초점이다. 브라질 채권의 높은 금리 쿠폰과 함께 물가 상승 위험을 헤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분리 과세 혜택도 있다.
강남과 강북에 2개의 초고액자산가 전담 점포를 운영하는 우리투자증권의 경우엔 1월 펀드 판매 비중이 75.9%에 달할 정도로 높았지만 2월 40.3%, 3월 58.6%, 4월 43.1%로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대신 ELS 투자비중이 1월 19.1%, 2월 23.5%, 3월 22.3%, 4월 26.0%로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한국투자증권의 경우에는 MMF(머니마켓펀드) 등 초단기 자금으로 슈퍼리치들의 자금이 대거 옮겨갔다. 3월과 4월 상품 판매의 절반 이상이 단기성 금융상품 판매로 채워졌다.
미래에셋의 경우엔 지난 연말을 기준으로 ELS(25.7%), 채권(23.7%), 펀드(12.5%), 자문형 랩(12.1%), 방카슈랑스(5.3%) 순으로 상품 판매 구성을 유지했고, 4월 말 기준으로는 ELS(31.3%), 채권(26.2%), 펀드(11.3%), 자문형 랩(11.2%), 방카슈랑스(6.2%) 등의 순이었다.
슈퍼리치들은 갈수록 스마트해지고 있다. 노력의 결과다.
증권사 등 금융회사들이 주최하는 새벽 조찬 자산관리 세미나에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최근 트렌드를 학습한다. 그들의 질문은 총선, 대선 등 단발성 이벤트에 머물지 않는다.
이선욱 삼성증권 서울파이낸스센터 SNI지점장은 “고객들이 지난 4월 총선과 같은 단발성 이벤트보다 미국과 중국의 경기 움직임이나 글로벌 유동성 등 세계 경제 전반에 대한 거시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다”고 귀띔했다. 머릿속에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단기 테마에 연연하지 않고 전문 PB들의 도움을 받아 자산을 대거 분산 투자해뒀기 때문이다. 지난 1997년 IMF사태 이후 수차례 정치·경제적 위기를 거치면서 순간의 악재에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오랜 노하우도 쌓았다.
절세는 영원한 테마
이 때문에 1월에 가장 돋보인 투자 상품은 절세용 펀드 상품이다. 연초 증시 상승 여파로 주식형 펀드를 중심으로 일부 환매가 있었지만 유전펀드, 해외자원개발펀드로 돈이 몰렸다.
유전펀드는 조세특례제한법상 주식 배당소득에 대한 과세 특례가 2014년까지 적용되는 절세 펀드라는 점이 매력으로 부각됐다. 분리과세 혜택이 주어지는 장기 채권에도 돈이 몰렸다. 브라질과의 조세 협약에 따라 채권 이자수익과 환차익에 대해 비과세되는 브라질 국채, 표면이자 수익만 과세하고 환차익에 대해선 비과세 혜택이 주어지는 딤섬신탁 등에 돈이 몰렸다. 이와 함께 10년 이상 장기 가입 시 완전 비과세 혜택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가입 한도 제한도 없는 방카슈랑스 상품에 대해선 슈퍼리치들의 관심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삼성 SNI센터의 경우 방카슈랑스 상품이 지난해 12월에는 91억6000만원대 판매에 그쳤으나, 1월엔 슈퍼리치들은 244억원어치를 구매했고, 3월까지 쭉 방카슈랑스 상품에 대한 슈퍼리치들의 애정이 이어졌다.
우용하 삼성증권 SNI센터 반포지점장은 “즉시 지급식 연금 상품은 연간 수익률이 4.5~5%대 초반으로 은행 정기예금보다도 훨씬 수익률이 높으면서도 비과세라는 장점이 있다”며 “고객 수요에 따라 중도 부분 인출 가능 상품, 상속형 상품 등 다양한 방카슈랑스 상품이 출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3월에는 뭉칫돈이 즉시 지급식 연금 상품으로 몰리는 쏠림 현상이 관측되기도 했다.
증권사 한 지점장은 “현재는 분리과세 혜택이 개인 한도 제한은 없지만 앞으로 금융소득종합과세 한도가 낮춰지는 과정에서 분리과세 혜택에도 1인당 한도가 생겨날 것이란 입소문이 돌면서 슈퍼리치들이 즉시 지급식 연금 상품을 찾았지만 지금은 소강상태”라고 말했다.
손실이 난 계좌부터 정리
변주열 미래에셋증권 WM강남파이낸스센터 상무는 “슈퍼리치들은 최근 주식이나 펀드 투자를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는 단계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라며 “주식 등 위험자산에서 당분간 관심이 떠나 있다”고 진단했다.
자문형 랩도 공격적 성향의 투자로 변동성이 높은 박건영의 브레인투자자문 계열에선 슈퍼리치 자금이 연초부터 상당 수준 이탈했다. 대신 시장 급등락 과정에서 차분하게 수익을 올려주는 권남학의 케이원 투자자문으로 슈퍼리치 자금이 쏠리는 상황이다.
목표수익률 낮아져 슈퍼리치들의 눈높이, 다시 말해 목표수익률도 크게 낮아졌다. 예전에는 기대수익률이 최소 10% 이상이 되는 금융상품에 슈퍼리치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이제는 연 수익률 7~8%대로 방망이를 짧게 잡는 슈퍼리치들이 늘었다.
조원희 대우증권 PB클래스 서울파이낸스 센터장은 “주식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는 만큼 장이 나쁘더라도 실적으로 버틸 수 있는 종목 위주로 투자한다”며 “종목 투자에도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이라고 밝혔다.
슈퍼리치 고객 50여 명의 1조7000억원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는 이선욱 삼성증권 서울파이낸스센터 SNI지점장은 “요즈음 초고액 자산가들도 투자할 만한 상품을 못 찾고 있다”며 “한마디로 꽂힐 만한 상품이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포트폴리오 분산에 대한 욕구를 ‘본능’처럼 갖고 있는 부자들이 지난해 상반기 자문형 랩과 같은 ‘거액을 맡길 만한 상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올 들어 유전펀드나 선박펀드, 한국형 헤지펀드, ELS 등 여러 가지 상품들이 이슈가 됐지만 부자들의 구미를 당기지는 못했다”며 “뉴 트렌드 상품에 테스트머니를 넣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부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분산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장은 “이런 움직임은 주식 시장의 방향성이 잡힐 때까지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최소투자금액이 5억원 이상인 한국형 헤지펀드 1호 상품에 대한 슈퍼리치들의 관심 역시 높았다. 삼성증권은 삼성자산운용과 동양자산운용이 운용하는 헤지펀드를 팔았는데, 증권사 고유계정 수준으로 철저하게 돈을 굴린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액이 조기 매진됐다는 후문이다.
결국 연간 4%대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과 저금리 기조의 고착화, 여기에다 정치권의 부자 증세 움직임에 화들짝 놀란 슈퍼리치들이 은행 예금 위주의 보수적인 포트폴리오 운용 기조를 점차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융투자상품 쪽으로 바꾸는 기조가 확연하게 나타난 셈이다.
해외자산에도 관심 가져 국내 경제가 성숙단계에 접어들고 저금리와 고령화가 추세적으로 굳어지면서 좀 더 성장가능성이 높거나 위험이 덜한 해외 자산에 대한 슈퍼리치들의 관심이 늘고 있다. 한국판 와타나베 부인들의 등장인 셈이다. 자녀들이 해외 유학길에 올랐거나 아예 일가친척들이 해외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 슈퍼리치들의 입장에선 굳이 재산 포트폴리오를 우리나라 돈으로만 가져갈 이유가 없다.
국내 PB들 가운데 해외물 투자에 가장 정통한 PB는 김진곤 우리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강북센터 이사다. 그는 한국메릴린치증권 프라이빗뱅킹(PB) 사업부문 대표를 지내기도 했지만 다시 PB 일선에서 뛰고 있다.
김 이사가 주목하는 종목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브랜드’ 가치를 가진 명품 주식들이다. 애플, 스타벅스, 염브랜즈 등 글로벌 명품 주식들을 직접 고객들의 포트폴리오에 담았다.
김 이사는 “채권보다 주식이 좋을 것 같지만 부자들에게 올해는 방어적인 투자를 권하고 있다”며 “석유 가스 제약 유틸리티 쪽으로 방어가 돼 있고, 주식을 선호한다면 미국, 유럽, 호주, 한국 기업 가운데 수익률 6% 이상의 고배당주 위주로 추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근우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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