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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기 들어선 K-스타트업, 10곳 중 6곳 “작년보다 경영 여건 악화됐다”
입력 : 2022.10.17 10: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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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리 인상과 경기 불황 등 벤처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흔들리고 있다. 이른바 돈맥경화가 심화되면서 자금줄이 막힌 스타트업들 중에는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심할 경우 폐업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자 미래가 불확실한 스타트업 대신 채권 등 안전자산으로 투자가 몰리고 있는 탓이다. 기업공개(IPO)를 예고한 스타트업들의 상장 일정이 줄줄이 뒤로 밀릴 만큼 부진한 증시도 이들을 암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2013년 창업한 모바일 행동분석 솔루션 ‘유저해빗’은 지난 8월 아예 폐업신고를 했다. 9월 초엔 직원들에게 밀린 퇴직금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저해빗은 사용자의 행동을 데이터화해 행동패턴을 시각화하며 주목받은 스타트업이다. 프라이머, 매쉬업엔젤스, 스파크랩, 스틱벤처스 등의 투자를 이끌어냈지만 후속투자가 불발되며 문을 닫게 됐다. 2016년 설립된 국내 1호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도 설립 6년 만인 지난 6월 폐업했다. 2주 만에 10만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눈길을 끌었던 뷰티숍, 피트니스센터 예약·결제 플랫폼 ‘라이픽’도 올 7월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이처럼 최근 국내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는 지난해와 비교해 급격히 성장세가 꺾였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집계한 조사를 살펴보면 국내 스타트업 투자 유치 금액은 올 7월 8368억원, 8월 8628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7월 3조659억원, 8월 1조668억원과 비교하면 각각 82.7%, 19.1%나 감소한 수치다.
한 투자사 대표는 “1년 전만 해도 매출이 높은 스타트업은 투자 유치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출이 높더라도 적자 성장하는 기업의 가치가 재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엔 투자 유치가 더 힘들 수 있다고 전망한다. 지난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하며 미국의 기준금리가 3.00~3.25%로 올랐고, 원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한국은행 역시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전선에서 느끼는 투자환경에 대한 현실도 ‘꽁꽁 얼어붙었다’는 답이 이어졌다. 정보기술 스타트업 A사 대표는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투자하겠다는 러브콜을 많이 받았는데 올 들어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며 “투자자들도 알짜 스타트업 위주의 옥석 가리기를 본격화하면서 스타트업 업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공작기계 공유 서비스를 운영하는 B사 대표는 “여러 곳에 투자를 문의했지만 돌아온 답이 없다”며 “은행 문턱도 높아 대출도 요원하다. 눈앞에 할 일은 쌓여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하소연했다. 설문에 참여한 스타트업들 중 84%는 최근 급격한 금리 인상 등 대내외적인 경제 불안으로 작년에 비해 투자가 감소했거나 비슷하다고 답했다. 특히 감소했다고 답한 기업 중 절반가량(47.8%)은 투자금액이 전년 대비 50% 이상 줄었다고 답했다.
그런가 하면 경제가 회복돼 사업이 언제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인지 묻는 질문엔 ‘내년 하반기’라는 답변이 31.2%로 가장 높아 당분간은 경기 회복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주를 이뤘다. ‘내년 상반기(24.8%)’ ‘올 하반기(20%)’ ‘2024년 이후(14%)’ 등의 의견이 그 뒤를 이었고, 10곳 중 1곳은 ‘기약 없음(10%)’이라고 답했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일반제조, 도소매 및 숙박음식, 정보통신, 기타서비스 등의 업종은 ‘내년 하반기’가 가장 높았고, 금융보험 및 부동산 업종은 ‘올 하반기’가 66.7%나 됐다. 교육서비스 업종은 ‘올 하반기’와 ‘내년 하반기’가 40%로 동일했고, 보건 및 사회복지 업종은 ‘내년 상반기’가 57.1%로 가장 높았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는 선진국처럼 민간이 주도하는 창업생태계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제도가 원활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상의 측은 “CVC는 대기업이 투자 목적으로 설립 가능한 벤처캐피털로 지난해 말 허용됐지만 아직 기업들의 ‘눈치 보기’가 진행 중”이라며 “CVC 제도가 신속히 안착될 수 있도록 CVC 설립 시 100% 완전자회사, 200% 이하 부채 비율, 40% 이하 외부자금 출자 제한 등 까다로운 설립 기준과 해외 투자 및 차입 규모 제한 등 선진국 대비 과도한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육성을 담당하고 있는 글로벌 VC의 한 임원은 “스타트업이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과 서비스를 갖고 있더라도 시장 진입의 벽은 매우 높다”며 “스타트업 입장에선 대기업과 협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확실한 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로 인한 피해와 고통은 국민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많은 스타트업들이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며 “역량 있는 스타트업들이 일시적 자금난으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5호 (202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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