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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걸 기자의 Blue House Diary] 쏟아지는 ‘관계자’… 그들은 과연 누구
입력 : 2015.07.06 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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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은 정부 비판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시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한 의사(메르스 감염 35번째 환자)가 수천명을 만나며 서울시를 활보하고 다녔다며 전 국민을 메르스의 공포로 몰아넣었었다.(박 시장의 이 발표는 나중에 ‘허위사실 유포 논란’으로 고소를 당해 검찰의 수사 대상에까지 오른다.) 한밤중에 뒤통수를 맞은 정부는 발끈해 밤 12시께 간략한 대응자료를 냈지만 “내일 두고보자”는 여운을 남기고 밤을 지새웠다. 결국 날이 밝자 청와대가 직접 대응에 나섰다.
A씨는 춘추관 브리핑장에 섰다. 그는 “박 시장의 발표 내용을 둘러싸고 관계되는 사람들의 말이 다르다”며 “(청와대는) 불안감과 혼란이 커지는 상황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박 시장을 겨냥했다. A씨가 굳은 표정으로 브리핑하는 동안 사진기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고 방송사 카메라도 영상을 떴다.
청와대의 대응은 곧 뉴스를 탔고, 인터넷과 방송에선 이미 ‘청와대 A참모, 박 시장 발표에 우려 표명’이란 자막이 실명으로 나오고 있었다. 일부 방송은 브리핑하는 A씨 얼굴까지 내보냈다.
그러나 1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청와대는 “관계자로 보도해 달라”고 뒤늦게 부탁했다. 기자들은 이미 다 보도된 이름을 익명으로 바꿔달라는 부탁에 실소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의 간절한 호소에 일단 기자단은 ‘관계자’로 보도하기로 했다.
#장면2 2년여 전인 2013년 4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여가 지난 때였다. 김행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오전에 황급히 기자실을 찾았다. 김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며 A4용지를 한 장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청와대 관계자 명의로 확인이 안 된 기사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청와대가 논의한 적도 없고 심지어는 대통령 생각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이런 명의로 자주 나오는데 이는 청와대는 물론 해당 언론사 신뢰마저 손상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는 “청와대는 관계자 명의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이런 기사는 청와대와 무관함을 명백히 밝히며 당연히 책임질 수도 없다”고 했다.
김 대변인은 ‘청와대 핵심관계자’, ‘청와대 고위관계자’, ‘청와대 관계자’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같은 날 이정현 당시 정무수석 역시 “앞으로 기사 쓸 때 나를 관계자로 하지 말고 ‘이정현 정무수석’이라고 정상적으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이는 당시 언론에 온갖 추측보도와 오보가 쏟아지자 박 대통령이 “도대체 어떤 청와대 직원이 얘기를 하고 다니느냐”고 지적해 홍보수석실이 부랴부랴 조치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런 청와대의 부탁은 단 30분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청와대의 공식발표는 자화자찬이 대부분이어서 기사거리는 거의 없었다. 반면 언론이 원하는 기사는 모두 익명의 ‘관계자’들에게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MB정부 이동관 ‘핵심관계자’ 논란도
최고 권력의 주변을 보도하는 청와대 기사의 특성상 익명보도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이명박(MB)정부 때도 똑같은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2007년 당시 정권 초반 익명보도가 쏟아지자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나뿐”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한마디로 자기 외엔 ‘핵심관계자’를 인용하지 말라는 얘기다. 실제 당시 꽤 많은 기사들은 ‘청와대 핵심관계자’를 인용해 쏟아졌고 기사들의 대부분은 이동관 대변인이 취재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야당인 민주당에선 “청와대 핵심관계자(이동관 대변인)는 참 바쁘다”는 식으로 논평을 자주 내기도 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동관 대변인이라는 의미를 괄호를 사용해 아예 논평의 제목으로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대변인은 홍보수석으로 승진한 후에도 ‘핵심관계자’라는 인용보도가 계속되자 단단히 뿔이 나기도 했다. 아래는 MB정권이 출범한 지 3년이 돼 가는 2009년 10월 30일자 매일경제의 기사다.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이 최근 청와대 핵심관계자를 인용한 보도가 이어지자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앞으로 실명브리핑만 하기로 했다. 이 수석은 최근 몇 번의 기사에서 청와대 핵심관계자를 인용한 데 대해, 자신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오늘을 기점으로 홍보수석은 물론 두 대변인 모두 실명으로만 브리핑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간 이 수석은 기자들의 취재 편의를 위해 핵심관계자란 명칭으로 비실명 브리핑을 해 왔으며, 일명 ‘이핵관’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중략)”
▶언론의 익명보도는 취재원 보호 장치
왜 언제는 ‘관계자로 써 달라’고 하고 또 언제는 ‘관계자로 쓰지 말아 달라’고 할까. 정권 초 ‘청와대 관계자’보도가 쏟아질 땐 마치 언론의 병폐인 양 거세게 비판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관계자로 써 달라’고 부탁하는 아이러니가 청와대에선 일어나고 있다. 기사에 등장하는 ‘관계자’는 일종의 ‘방패막’이다. 일단 취재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로선 취재원의 실명보도는 불변의 대원칙이다. 그러나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방책이 불가피하고 이것이 바로 ‘관계자’를 통한 익명보도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를 한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즈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무려 30년간 ‘관계자’였던 취재원을 밝히지 않았다. 두 기자는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밴 브래들리 등과 내부 회의를 할 때도 그 취재원을 지칭할 땐 별명을 불렀다. 이들이 사용했던 ‘딥 쓰로트’란 별명은 당시 인기 있던 포르노 영화의 제목이었다. 살아있는 최고의 권력인 미국 대통령을 결국 퇴임하게까지 만들었던 역사적인 보도를 하고도 30년간 취재원을 철저하게 함구한 두 기자는 언론의 취재원보호라는 대원칙을 잘 보여줬다.(결국 30년이 흐른 뒤 지난 2005년에 당시 91세가 된 FBI의 마크 펠트 전 부국장 본인이 스스로 ‘딥 쓰로트’임을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밥 우즈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는 딥 쓰로트가 죽기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 절대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돈과 권력, 시스템과 인적자원을 모두 갖춘 권력과 대결하려면 항상 열세인 기자들은 마지막 무기인 익명보도를 활용하지 않고는 힘들다.
그러나 청와대와 같은 권력기관이나 정당 혹은 정부가 스스로 ‘관계자’로 써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언론이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익명보도를 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익명의 뒤에 숨어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개인의 책임을 덜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실제 청와대처럼 눈길이 집중되는 조직에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경우도 많다. 윤두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사례가 바로 그런 경우다. 지난해(2014년) 10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중국 상하이 출장 중 개헌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해 박 대통령과 대놓고 반대 입장을 취한 적이 있다. 며칠 후 청와대 측 한 관계자가 춘추관을 찾아와 기자들을 모아놓고 “저희는 당 대표 되시는 분이 실수로 언급했다고 생각 안 한다”고 김무성 대표를 공개 질책했다. 청와대 기자단은 당시 이 ‘관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국회에서였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며칠 뒤 국회에 나와 질의를 받다가 청와대 발언을 누가 했냐는 윤후덕 새정치연합 의원의 질문에 “홍보수석이 한 말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하루아침에 윤 전 수석이 발언자라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이어 발언의 배경을 묻자 김 전 실장은 “윤두현 홍보수석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명실공히 여당 대표다. 청와대 참모가 감히 공개비난한 데 대해 기분이 많이 상했던 듯했다.
김 대표는 청와대에서 자신을 겨냥한 반응이 나오자 “청와대 누구냐”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후 김 대표는 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뜬금없이 “청와대의 홍보에 문제가 있다”고 사실상 윤 수석의 경질을 요구했다.
당시 나름대로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 윤 전 수석이 몇 달 뒤 전격 경질된 데는 이런 점이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당과의 관계 개선이 시급했던 당시 청와대로선 당대표와 껄끄러운 참모를 안고가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윤 전 수석은 그래도 역할을 할 만큼 한 케이스다. 대통령 임기 종료가 가까워질수록, 권력의 끈이 얇아질수록 청와대나 권력 주변의 참모들은 익명을 선호한다. 구심력은 약해지고 원심력은 강해질 때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다.
※ 57호에서 계속... [글 김선걸 기자 / 사진 김재훈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8호 (2015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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