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방송 시장에 부는 태풍, 한국도 영향권 진입

    입력 : 2015.03.06 16: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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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5. 드론, 로봇, 3D프린터, 스마트카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예전엔 TV와 가전이 CES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는 신기술(Emerging Technology)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CES2015에서 ‘미국’ 언론이 가장 주목한 회사는 위성방송 사업자 디시네트워크 ‘슬링TV(Sling TV)’였다. 수많은 신기술이 앞으로 3~5년 후 상용화되거나 미래 시점에서 구매할 만한 제품이 대부분이었지만 슬링TV는 가장 현실에 와 닿는 혁신 제품(서비스)이었기 때문이다.

    슬링TV는 별도의 앱을 내려 받으면 ESPN, CNN, TBS, TNT, 푸드 네트워크, HGTV, 카툰 네트워크, 디즈니 채널 등 12개 채널을 유료 방송으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케이블이나 위성 TV를 이용하지 않고도 스마트폰과 아이패드 등 스마트 기기를 통해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다. 슬링 TV는 로쿠, 아마존 파이어TV(애플 TV는 제외)를 포함한 스트리밍 박스에서 볼 수 있다. MS의 엑스박스원, 그리고 삼성 및 LG전자의 스마트TV에서도 사용이 가능하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및 애플 아이폰, 태블릿, PC, 맥 컴퓨터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2015년 2월 말 정식 출시했는데 CES에서 발표했을 때보다 채널이 더 늘었다. ‘워킹데드’를 만든 방송사 AMC와 BBC 아메리카, BBC 월드뉴스, 선댄스TV가 슬링TV에 합류했다. 이렇게 보면 “기존 방송사 앱과 다른 게 무엇일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슬링TV가 CES2015 최고 혁신상을 휩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슬링TV는 미국에서 ‘케이블 없이 TV(유료방송) 보는 법’을 정착시킨 주인공이 될 서비스로 꼽힌다. 슬링TV의 이용요금은 한 달에 20달러(약 2만2000원)다. 컴캐스트나 타임워너케이블 등 주요 케이블을 통해 TV를 시청하게 되면 시청료가 한 달 평균 64달러(약 7만원) 이상 나온다.

    기존 케이블TV나 위성방송을 해지하고 슬링TV만 가입해도 주요 방송을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이번에 슬링TV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ESPN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미국 프로풋볼(NFL) 같은 스포츠 방송권을 독점하는 ESPN은 그동안 케이블TV를 가입해야만 볼 수 있었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미식축구, 프로야구는 케이블TV 중에서도 고가 요금제에 가입된 이용자들만 볼 수 있었다. ESPN은 케이블방송에 가입한 이용자 외에는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았다.

    로저 린치 슬링TV 최고경영자(CEO)는 CES 기자회견에서 “소비자들은 보고 싶은 방송을 선호하는 기기를 이용해 볼 수 있게 된다. 한 달에 20달러를 내고 ESPN 등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다는 슬링TV는 게임 체인저(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라고 말했다.

    이어 “제공되는 채널은 모두 12개인데 일반 케이블 상품과 비교해 적지만 젊은 소비자층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채널들로 구성돼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기존 케이블 서비스 매출을 갉아먹겠지만 전체 매출은 크게 줄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슬링TV는 5달러를 더 지불하면 채널을 추가할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다. 슬링TV를 서비스하는 디시네트워크(Dish Network)는 위성방송 사업자다. 한국의 스카이라이프와 같은 업체. 디시네트워크도 케이블TV와 마찬가지로 유료방송 사업자로 월정액을 기반으로 서비스한다.

    슬링TV를 가입하게 되면 디시네트워크를 해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훨씬 저렴하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기 잠식(카니발라이제이션)’을 각오하고 서비스를 내놓은 이유는 ‘모바일 스트리밍 비디오’가 미국에서 이미 대세가 됐기 때문이다. 모바일 스트리밍 비디오는 음악이나 동영상 등을 실시간으로 온라인 재생하는 방식인데 셋톱박스 없이 스마트폰이나 노트북PC 등으로 인터넷이 연결되는 곳에서 어디든 시청 가능하다.

    시청자들은 이제 모바일에서 보는 동영상을 집에서도 볼 수 있거나 집에서 보던 영화를 모바일에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 같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업자는 ‘넷플릭스’뿐이었다. 이 때문에 넷플릭스는 전체 5000만명(미국만 약 30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넷플릭스는 이미 2013년에 미국 최대 케이블사 HBO의 가입자 수를 넘어섰다. 컴케스트 등 기존 케이블TV 업체는 ‘셋톱박스’ 비즈니스에 의존한 나머지 이 같은 ‘모바일 스트리밍 비디오’ 서비스를 등한시 해왔다. 이 때문에 슬링TV는 미국 방송 시장의 주도권이 케이블에서 스트리밍으로 넘어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미국 내 시장조사 전문기관(노무라 리서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1월 미국 케이블 TV 시청률은 전년 대비 12.7% 감소했다. 이번에 슬링TV에 영상을 공급하기로 한 AMC도 역시 시청률이 19% 정도 떨어졌으며 비아콤도 23% 하락했다. 물론 슬링TV가 케이블TV의 완벽한 대안은 아니다. 슬링TV 서비스 계약에 포함된 콘텐츠 제공사들이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지상파 TV 네트워크 등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지상파 방송사들도 ‘스트리밍’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조만간 슬링TV에 조인하거나 슬링TV와 같은 독자적인 서비스를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미국 3대 공중파 방송인 CBS도 지난 2014년 10월, 한 달에 6달러의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출시했으며 HBO도 조만간 스트리밍 서비스를 개시할 예정이다. HBO의 행보로 미국에서 700만명 정도가 케이블 서비스를 해지할 것으로 추산된다. 제조사인 소니도 ‘플레이스테이션3·4’를 셋톱박스 삼아 영상 콘텐츠를 스트리밍으로 제공하는 ‘플레이스테이션 뷰’를 선보인다고 발표했다.

    케이블TV 업체들도 이 같은 ‘스트리밍’ 전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들이 선택권을 갖게 되며 정확하게 지불한 사용료만큼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링TV는 장기 계약 할인, 통신사 번들링과 같은 서비스가 없다. 소비자들은 서비스 해지 시 귀찮은 일도 겪지 않는다. 소비자들 유인 요소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결국 슬링TV는 넷플릭스와 함께 기존 셋톱박스 중심의 유료방송이 점차 설자리를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서비스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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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 세대 ‘제로 TV’ 선호 지금까지는 ‘미국’얘기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슬링TV나 넷플릭스 등의 인터넷 앱 기반 스트리밍 서비스가 정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 유료방송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모양새다. 현재(2014년 11월 말 기준) 케이블TV 가입자는 1478만명이며 통신사업자의 IPTV 가입자(대수 기준)는 1070만명에 달한다. 한국은 대부분 가구가 케이블TV, IPTV,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으로 TV를 시청한다.

    이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유료방송 가입비가 매우 저렴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료방송 시청료가 평균 64달러일 정도로 높아서 넷플릭스나 슬링TV가 7~20달러에 내놓으면 당장 가입 유인 효과가 있지만 한국은 달러 기준으로 봐도 월 10~15달러 수준에 지상파를 포함, 영화,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콘텐츠를 제한 없이 볼 수 있다. 미국처럼 스포츠 방송도 고가의 유료방송을 통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킬러 콘텐츠’에 대한 욕구도 적은 편이다. 한국은 킬러 콘텐츠를 모두 지상파 방송사가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저가’방송이 정착된 한국은 ‘모바일 스트리밍 비디오’열풍을 비켜나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도 ‘모바일 세대’를 중심으로 가정에서 케이블TV, IPTV, 위성방송 등 유료방송을 시청하지 않는 가구가 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처럼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TV 시청 가구에 해당하지 않는 ‘제로 TV’ 가구가 늘고 있는 것. 제로 TV란 TV 보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유료방송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고 지상파 방송도 수신하지 않고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가구를 말한다. 시청률에 잡히지 않아서 제로 TV로 불린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유료방송 서비스 가입 비율은 2011년 85.9%에서 2014년 91.7%로 늘었지만 가구주 연령이 25세 미만일 때는 달랐다.

    25세 미만 가구주 37%는 최근 4년간(2011~2014년) 유료방송 서비스에 가입한 적이 없거나 해지했다고 답했다. 특히 25세 미만이며 유료방송에 가입하지 않은 가구 중 약 55%는 지난 4년간 한 번도 유료방송에 가입한 적이 없었다. 젊은 가구주일수록 유료방송에 가입하지 않고 모바일로 방송 콘텐츠를 해결하는 트렌드가 확인된 것이다.

    한국미디어패널 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 중 4% 정도를 제로 TV 가구로 분석하고 있다. 앞으로 최소한 제로 TV 가구 비율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을 네이버, 다음 등에서도 시청할 수 있고, 유튜브, 판도라, 아프리카TV 등 동영상 시청 행태가 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한국도 방송 시장의 격변이 올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다.

    슬링TV가 한국에 진출하긴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이미 한국은 ‘모바일 스트리밍 비디오’ 태풍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손재권 매일경제 모바일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3호(2015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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