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직장인 두서넛만 모이면 미생(未生) 이야기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심오한 철학이 담긴 왠지 모를 미지의 세계가 떠오르지만, 실상 알고 보면 연재가 마무리된 웹툰이자 완간된 9권짜리 만화 세트, 방영 중인 케이블TV 드라마의 타이틀일 뿐이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일상에 가까운 이 세 가지 콘텐츠는 하지만 ‘신드롬’이라 부를 만큼 엄청난 파고를 만들어냈다.
시작은 웹툰이었다. 2012년 1월 20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만화 속 세상’에 연재를 시작한 <미생>은 2013년 7월 19일 145수로 막을 내렸다. 당시 누적 조회 수는 10억 뷰. 감히 넘보지 못할 횟수에 자연스레 ‘국민 웹툰’이란 수식어가 붙었고, 그해 9월부터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위즈덤하우스가 완간한 이 단행본 세트는 올해 첫 밀리언셀러가 되며 200만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럼 드라마는 어떨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 그저 남의 집 얘기였다. 지난 11월 중순 자체 조사 시청률 5.9%를 기록한 드라마 <미생>은 2년 전 웹툰과 서서히 끓어오르던 단행본의 인기를 다시금 현재진행형으로 되돌렸다. 일례로 지난 10월 초까지 90만부가 판매됐던 단행본은 TV드라마가 방송되자 100만부를 넘어섰고, 2주 후 150만부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위즈덤하우스 측은 “10월 17일 동명의 드라마가 방송되면서 일주일 만에 10만부가 팔렸고, 이후 단 2주 만에 50만부가 더 판매되며 순식간에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상황을 전했다.
한 도서총판 관계자는 “보통 다른 책의 경우 주말 판매량이 평일보다 50%가량 떨어지는데, <미생>은 주말 드라마 덕분인지 일주일 내내 판매량이 꾸준하다”며 “구매력이 높은 직장인들이 소장용이나 연말 선물용으로 구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미생> 판매 분석을 보면 실제 구매층이 좀 더 확실해진다. 알라딘 측은 “드라마가 첫 방송된 이후 토요일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하루 평균 판매량이 550여 권에 달했다”며 “방송 전 한 달 간 하루 평균 판매량이 30~40권이었던 것에 비하면 약 15배 상승한 수치”라고 집계했다. 구매자는 남성 고객이 전체 구매의 62%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았다. 평균 구매 연령은 33.6세로 특히 사회 초년생인 25~34세 연령대의 구매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알라딘의 도란 만화 담당 MD는 “방영된 드라마가 주인공 장그래와 연령대가 비슷한 사회 초년생 직장인들의 깊은 공감을 얻어 해당 연령대의 고객들로부터 높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원작이 웹툰으로 연재될 때부터 이미 해당 콘텐츠를 접한 독자들이 원작의 퀄리티에 대한 의심 없이 소장을 목적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 판매량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고 전했다.
대우인터내셔널 이미지 UP
관련 상품 덩달아 흥행
웹툰, 단행본, 드라마로 이어지는 <미생>의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에 종합상사맨들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극중 이야기가 전개되는 기업 ‘원인터내셔널’이 종합상사인 것. 업계에 따르면 취업 시즌을 맞아 최근 대우인터내셔널,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 LG상사 등 종합상사와 한국무역협회, 코트라 등 관련 기관에 대한 취업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
한 종합상사 관계자는 “소비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종합상사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전화가 종종 온다”며 “<미생> 신드롬이 낳은 현상이지만 관심의 대상이 된 것 같아 다들 싫지 않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특히 원인터내셔널의 실제 모델인 포스코 계열의 대우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가장 득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촬영에 앞서 배우와 작가들이 약 한 달간 상주하며 이슈의 중심에 섰고, 드라마 티저 영상도 이 회사 본사에서 촬영됐다.
권태연 대우인터내서널 홍보팀 차장은 “드라마 제작 후원을 하지만 일반적인 드라마 후원 비용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라 우정 출연한 정도”라며 “B2B 회사라 일반인들에겐 생소한데 회사 이미지 상승에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의 경우 <미생>의 웹툰과 단행본이 마무리된 시점부터 종합상사맨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작가의 북콘서트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원작과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캐릭터를 활용한 관련 상품의 매출도 늘고 있다. GS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GS25에 따르면 드라마 방송 후 미생 종이컵, 주요 캐릭터의 얼굴이 눈금과 함께 표시된 미생 투명 맥주컵, 노트, 이력서 용지 등의 판매량이 지난해 동기 대비 68.9%나 늘었다. 첫 방송 후 1주일(10월 17~23일)이 지난 시점에선 전년 동기 대비 40.9% 증가한 데 이어 2주차(10월 24~30일)는 63.2%, 3주차(10월 31일~11월 6일)는 99.8%, 4주차(11월 7~12일)는 109.6%까지 증가해 드라마의 인기가 더해 갈수록 캐릭터 상품의 매출 증가율도 높아지는 것으로 집계됐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
버티는 것이 완생… 무한 공감
바둑에서 바둑돌이 살기 위해선 두 집 이상이 돼야 한다. 한 집 밖에 안 되는 경우를 일컬어 ‘미생’이라고 한다. 아직 살지 못한 자, 그가 바로 미생이다. <미생>은 전쟁터 같은 회사, 지옥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수 한 수 신중히 돌을 옮기는 이들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 안의 무엇이 신드롬으로 이어졌을까.
첫째, <미생>의 중심엔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다 실패한 뒤 후견인의 도움으로 종합상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장그래가 있다. 바둑 외엔 아무런 스펙이 없는 그는 사내에서 유일한 검정고시 고졸 출신 인턴이다. 하지만 그런 장그래의 배경은 오히려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종합상사 영업파트의 일상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을이 갑이 되진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갖게 한다.
둘째,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실제 인물은 아닐지 의심할 만큼 상세하다. 최근 기자회견에 나선 드라마 연출자 이재문 PD는 “원작자 윤태호 작가는 만화를 잘 그리기 위해 관상뿐만 아니라 수상, 족상, 별자리까지 공부했다. 그의 만화 속 캐릭터들은 실제 그들 나름의 성격이나 운명을 담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의 경우 원작의 화풍을 존중하기 위해 주인공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고, 가급적 원작의 스토리를 살리기 위해 배려하고 있다.
셋째, 집필 전 충실한 취재가 독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최근 한 모임에서 윤태호 작가가 밝힌 내용은 ‘기본에 충실했다’는 것. 윤 작가는 9시간 동안 취재해 단 두 줄의 지문만을 솎아낼 만큼 지독하게 종합상사맨의 일상에 매달렸다. 그 자신이 조직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게 스스로 느낀 딜레마였다. 웹툰을 연재할 땐 하루 3시간만 자고 강행군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는 “선택의 길목에선 재능이 필요하지만 고수가 되기 위해선 성실만이 답”이라며 “재능보다 성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넷째, 스토리 전개에 주변의 일상을 충분히 반영했다. 인턴 생활, 월급쟁이의 고뇌, 직장 상사, 부하 직원의 고충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끼는 직장인들의 일상이다. 2040 직장인의 관심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한 영민한 선택이다.
다섯째, 수마다 이어지는 명언 퍼레이드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지수를 높였다. 인터넷 게시판에 명언집이 돌 만큼 주옥같은 표현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미생의 끝, 완생(完生)은 어떤 의미일까. 윤 작가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버티는 것이 완생”이라고 표현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완생이 될 수 있다는 건 성실해야 고수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인생관과 맞닿아 있다. 언젠가는 완생이 될 장그래를 상상하며 하루하루 미생으로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미생>의 명언
•팀장님도 고민이 많으시군요… 턱걸이를 만만히 보고 매달려보면 알게 돼.
내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현실에 던져져 보면 알게 돼. 내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3수
•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너만 생각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17수
•기획서는 계속,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까 쓰는 겁니다.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기획
서를 올리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죠. 기획서 안에는 그 사람만의 에너지가 담겨 있어야 해요. -39수
•누구 한 명의 땀방울로 되고 안 되는 시절이 아냐. 누구 한 명의 캐릭터로 성사가 결정되는 일이란 건 회사로선 매우 위험해. 당신 아니어도 될 일은 돼야 한다고. - 55수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과정’이 전부야. 결과는 우리 손 안에 있지 않아. -63수
•허겁지겁 퇴근하지 말고, 한 번 더 자기 자리를 뒤돌아본 뒤 퇴근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거야. -68수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70수
•남들한테 보이는 건 상관없어. 화려하지 않은 일이라도 우린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중요 하다고. -76수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81수
•이기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89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