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걸 기자의 Blue House Diary] 박 대통령의 소통 ‘적자’생존의 비밀

    입력 : 2014.02.04 14: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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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1. 지난 1월 9일 청와대 충무실 외국인투자기업CEO 간담회. 박근혜 대통령은 21명에 달하는 외국기업 CEO들이 돌아가며 하는 발언에 일일이 답변을 했다. 언론에 많이 났던 박 대통령의 ‘Here to support you(지원하겠다)’라는 말도 그 중 하나다. 세르지오 호샤 GM사장이 ‘Here to stay(한국에 남겠다)’란 말을 던지자 대통령이 열심히 지원하겠다며 화답한 것이다. 이날 청와대 속기록에 따르면 이영관 도레이코리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의견에 대해 대통령님이 일일이 메모해서 코멘트 해주신 철저함에 놀라움을 가진다”고. 한 비서관은 “다음 행사 일정이 있어서 끝냈지, 그렇지 않으면 간담회를 한 시간은 더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대통령이 참석자들 말을 모두 기록했다가 일일이 코멘트를 하느라 예정보다 30분 늦게 끝났다.

    #장면2. 전날인 8일엔 새누리당 상임고문단과 만찬을 했다. 김수한, 박관용,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이세기 유준상 권철현 전 의원 등이 참석했다. 이들 정치계 원로들은 박 대통령에게 고언을 쏟아냈다. 옆에 배석했던 한 비서는 “대통령이 상임고문단의 말을 거의 빠짐없이 다 적더라”고 말했다. 원로들의 조언이 그만큼 인상 깊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나왔다. 대통령을 오래 보좌한 측근은 “원로들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적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장면3. 박 대통령은 6일엔 취임 이후 처음으로 TV생중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때 ‘일각에서 불통이라는 지적을 한다’는 질문이 나오자 이런 답변을 했다. “제가 가는 곳곳에 또 해외순방 갈 때도 민원비서관이 전부 가서 해외 동포하고 하는 얘기라든가 모든 것을 기록을 하고 또 그것을 하나하나 해결을 해서 답을 해드리고 저도 그것을 수시로 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소통’을 단지 ‘듣는 것’에서 끝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통 ‘소통을 하라’고 하면 ‘앞으로 잘 듣겠다’는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앞으로 잘 적겠다’고 답하는 것이다. 그만큼 기록과 문자에 대한 의존도와 애정이 강하다. 이처럼 ‘기록’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박 대통령이기에 정권 초엔 혼란스러운 장면도 많이 연출됐다. 3월 말 허태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들에게 ‘받아쓰기만 하지들 말라’고 일갈했다. 당시 장면을 되돌려 보자.

    #장면4.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최근 허태열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들에게 ‘(대통령 말씀을)받아쓰기만 하지 말고 청와대 비서답게 일하라’고 지시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허 실장은 “(수석비서관)여러분은 비서이긴 하지만 그저 단순 행정만 하는 비서가 아니라 정무직임을 명심하라”면서 “받아쓰지만 말고 생각을 해라. 정무직다운 판단을 해달라”고 수석들에게 당부했다. 이는 새 정부 고위급 인사에서 김병관 국방장관, 한만수 공정위원장 등 내정자들의 잇단 낙마에 대해 청와대가 내부 검증 역할이 미진했다는 지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청와대가 박 대통령 지시를 ‘톱다운(Top down)’ 방식으로 일방통행만 한다는 비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 현재 청와대 수석비서관 라인은 대부분 학자나 공무원 출신이어서 박 대통령에게 직언할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매일경제 2013년 3월 29일자) 이런 얘기가 오간 후 청와대 비서진의 ‘받아쓰기’가 잠깐 줄어들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다시 ‘받아쓰는’ 청와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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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 적지 않는 사람에게 “기억력 그리 좋나” #장면5. 지난해 5월 31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기자단과 오찬을 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 자리엔 봉황무늬가 새겨진 수첩이 놓여있었다. 옆에 앉은 기자가 “이런 자리에서도 메모를 하시려고요”라고 물었다.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수첩 공주’란 별명을 가진 박 대통령에겐 심각하게 들린 모양이다. 박 대통령은 “메모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겠다”면서 “메모광으로 유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메모광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고, 뉴턴은 ‘난 천재가 아니라 거인들의 어깨위에 서서 바라볼 뿐이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오래 준비한 듯한 진지한 해명과 칼 같은 말투에 식탁 분위기가 순간 썰렁해졌다. 이때 박 대통령과 눈이 마주친 한 기자가 즉흥적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메모가 중요하죠. 그래서 우리 옛말에 ‘적자생존(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適者生存’의 뜻을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바꿔 쓰는 우스갯소리)’이란 말이 있지요.”

    다행히 이 한마디 농담에 박 대통령이 ‘빵 터져’ 한참을 웃었고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이날 박 대통령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난 국무회의 때 발언할 때 쳐다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내(대통령)가 하는 말을 메모해서 꼼꼼하게 수행해야 할 텐데 그렇게 기억력들이 좋은지 궁금하다.”

    ※ 41호에서 계속... [김선걸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1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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