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리서치의 허와실

    입력 : 2013.12.12 14: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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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아베노믹스는 일본 경제 체질 변화에 실패한다.” 지난 10월 24일 홍콩 카오룽지역에 우뚝 선 국제상업센터(ICC)에 위치한 리츠칼튼 호텔. 이름도 생소한 ‘아시아 독립리서치 서밋(Asia’s Independent Research Summit)’이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리고 있었다.

    당시 국내외 주요 언론에서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찬양가’ 일색이던 때라 이날 행사에 참석한 연사들의 거침없는 발언은 오히려 위험스럽게까지 보였다.

    일본 아베 정부는 ‘3개의 화살(금융완화, 재정확대, 성장전략)’을 통해 20년간 계속된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구조를 깨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짐 워커 ‘아시아노믹스’ 매니징디렉터는 “3개의 화살이 결국 디플레이션을 꿰뚫지 못할 것”이라며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도요타 같은 대기업은 엔저로 큰 수혜를 보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에 타격을 입었다”며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합친) 민간 부문 전체적으로는 소비보다는 저축이 늘어나는 양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터 퍼킨스 MRB파트너스 글로벌스트래티지스트는 “일본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성장을 위한 경제 펀더멘털도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10월 27일 우리나라 현대경제연구원은 ‘아베노믹스가 일본 경제를 살리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펴냈다. 독립리서치의 시각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증권사 소속 안 된 리서치 회사 독립 리서치 제공회사(IRP·Independent Research Provider)는 말 그대로 ‘독립’적인 주주 구성과 시각을 가진 리서치 회사를 말한다.

    국내 증권사를 예로 들어보자. 증권사 수익의 절반가량은 주식 매매를 중개한 대가로 받는 브로커리지 수수료다.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의 대규모 주식 거래를 중개할 경우 어마어마한 수수료를 벌 수 있다. 이때 증권사들은 산하 리서치센터를 통해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펀드 매니저, 대기업 자금운용 담당자들에게 경제, 산업, 기업에 대한 정보(리서치 보고서)를 제공한다. 물론 공짜로 말이다. 많은 수수료를 벌게 해 준 고객에 대한 일종의 고객 서비스인 셈이다.

    하지만 독립 리서치는 리서치 보고서를 필요한 고객에게 직접 판다. 유럽과 아시아에 있는 독립 리서치 제공사협회 홈페이지에는 “IB회사, 브로커리지회사, 채권발행회사, 자기자본투자회사, 금융컨설팅 회사처럼 매출이 리서치 이용자가 아닌 다른 고객에서 발생하는 회사가 ‘아니어야만’ 회원사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증권사 소속 리서치센터의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다. 증권사와 고객인 대기업간의 ‘갑-을’관계 때문이다. 올 여름에도 여의도 증권가에는 “A기업에 대해 안 좋은 내용의 보고서를 쓴 B애널리스트가 이후 A기업 투자설명회(IR)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년 전에는 C기업 ‘매도’ 보고서를 쓴 한 애널리스트가 직속상관인 리서치센터장에게 ‘쪼인트’를 까였다는 전설(?)도 있다. 우리나라 리서치 보고서에 ‘매수’의견이 80%를 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독립 리서치를 ‘표방’한 회사들이 나타났지만 아직 뚜렷한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

    최근 홍콩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독립리서치 서밋’에 참석한 애널리스트들이 토론하고 있다.
    최근 홍콩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독립리서치 서밋’에 참석한 애널리스트들이 토론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독립 리서치사 속속 등장 선진시장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독립 리서치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다. 에드워드 스톡라이서 아시아 독립 리서치 제공사 협회(Asia IRP)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금융사 안에 설립된(In-House) 리서치센터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대형 투자금융(IB) 회사들은 내부적으로 영업 조직과 리서치센터가 분리되도록 ‘차이니스월’을 세워놓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전 애널리스트 누구도 자사가 파는 파생금융 상품과 기초자산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리서치 때문에 손해를 본 건 전 세계 각국의 수많은 고객들이었다. 이후 리서치센터의 주요 고객인 연기금, 보험사, 자산운용사 등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독립 리서치 회사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독립리서치 회사들도 증가하게 됐다.

    독립 리서치가 늘어나는 또다른 이유는 대형 IB에 분 감원 열풍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비용절감에 나선 대형 IB들은 비싼 몸값의 애널리스트들도 속속 해고했다. 오갈 데 없어진 애널리스트들이 자신의 이름을 간판삼아 속속 독립리서치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아시아 독립리서치 서밋’에서 만난 애널리스트들도 상당수가 UBS, CLSA 등 글로벌 IB에서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에 독립 리서치 제공사 협회가 있지만 이들 협회도 아직 정확하게 몇 개의 독립 리서치 회사가 존재하는지 파악 못하고 있다. 다만 유럽과 아시아 협회 소속 회원사 수는 각각 30여 개 수준이다. 이들 상당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생겨난 신생회사들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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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성·실력은 천차만별 독립 리서치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상 고객과 직원 수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글로벌 자산 배분, 국가별, 산업별 전략 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파는 ‘보고서 유통 모델’이 있다. 대표적인 회사로 150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독립 리서치 회사 BCA리서치가 있다. 이들 회사는 때때로 고객이 원하는 국가나 산업 분야에 대한 ‘맞춤형’ 보고서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계약금액은 연간 기준으로 최소 한화 3000만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섬버그처럼 한 나라에만 특화된 리서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 소규모 애널리스트로 운영하면서 중앙은행, 연기금 등 소수의 고객에게 자문을 하는 ‘자문형 모델’이 있다. 홍콩금융감독청(HKMA·HongKong Monetary Authority)에 자문을 하는 DSG아시아처럼 직원이 채 10명이 되지 않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독립 리서치는 독립적일까. 홍콩 ‘아시아 독립리서치 서밋’의 IT 세션에서 한 애널리스트는 업종 전망에 대한 설명을 한 뒤 자신의 투자 의견을 보여줬다. 20여 개의 기업 리스트 가운데 60%이상이 ‘매도’ 의견이었다. 아마 한국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일부 독립 리서치는 “독립적이지 않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한 글로벌 IB 직원은 “미국에서는 대형 IB에서 잘려 나온 애널리스트들이 팀을 이뤄 독립 리서치를 만들었다가 다시 은행과 증권사 등에 팀이 통째로 스카우트되는 케이스도 생겨나고 있다”고 귀띔해줬다.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두고 리서치를 하다 보니 결코 독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독립 리서치의 실력도 제각각이다. ‘아시아 독립리서치 서밋’에 참가한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실력차이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 펀드 매니저는 중국 세션에서 발표한 애널리스트의 실력을 두고 “대학원도 아닌 학부 졸업 논문 수준의 발표”라고 혹평을 했다. 하지만 몇몇 연사들은 ‘돌직구’를 거침없이 날리면서도 명쾌한 논리를 제공해 스스로 실력자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이정호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대표는 “몇몇 독립 리서치를 써 본 결과 국가별, 상품별 자산배분(Asset allocation)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독립 리서치가 제 실력을 발휘하는 곳이 많다”고 말했다.

    리서치 분야의 ‘벤처기업’인 독립 리서치. 벤처기업이 다 그렇듯 이상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 제공을 통해 고객사를 구름처럼 모여들게 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독립 리서치 회사들의 현실은 수익을 내지 못해 “원하는 분야 보고서는 다 만들어드립니다”고 할 만큼 절박해 보였다.

    [홍콩 = 조시영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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