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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와 절세 사이 조세피난처를 파헤친다
입력 : 2013.07.15 09: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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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세나 법인세를 물리지 않거나 낮은 세율로 과세하는 지역을 일컫는 조세피난처는 기본적으로 절세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다국적기업은 세금 회피를 위해 조세피난처를 애용하고 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득을 올리는 다국적기업의 경우 비용과 이익이 어느 나라에서 발생하는지 계산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다국적기업들은 회계 장부상의 이익은 세율이 낮은 국가로, 비용은 세율이 높은 곳으로 돌려 세금을 빼돌릴 수 있다. 이때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차려 불법적으로 세금을 피하면 역외탈세(Offshore Tax Evasion)가 된다.
애플은 법인세율이 2%에 불과한 아일랜드의 자회사에 수입을 이전하는 수법으로 지난해 무려 90억달러(약 10조원)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미국 법인세율 35%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나이키 등 미국 주요 기업들도 역외탈세 의혹을 받고 있다.
공식적 통계는 없지만 조세피난처를 통한 역외탈세 규모는 8조~21조달러에 달하고, 세계 GDP의 30%가 넘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조세피난처는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미국, 유럽, 아시아, 태평양 등 50~60곳에 달한다. 200여만개의 페이퍼컴퍼니와 재산 은닉을 도와주고 수수료를 챙긴 역외 서비스 업체들이 성업 중이다. 카리브해의 관광 명소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인구 3만명의 작은 섬이지만 페이퍼컴퍼니가 최소 12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G8(주요 8개국) 등 전 세계가 글로벌 역외탈세를 막기 위한 국제공조를 한창 논의하고 있다.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전통의 조세피난처로 지목되는 국가들은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에 비밀계좌의 봉인을 풀고 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케이먼 제도, 버뮤다, 지브롤터 등 세계적인 조세피난처로 꼽히는 영국령 국가들이 역외탈세를 막기 위한 세금정보 상호교류 협약을 맺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영국령 국가들이 조세 투명성 강화에 동의한 이유는 조세피난처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다.
각국이 역외탈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계기가 됐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된 각종 파생상품이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설계·유통된 사실을 발견했다. 더욱이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각국의 법인세·소비세 등 세수가 크게 줄고, 공적자금 투입으로 재정건전성이 나빠지면서 조세회피 지역을 통한 세금 회피를 막기 위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검은 돈은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옮겨가며 과세당국과의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한편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운영 중인 페이퍼컴퍼니의 상당수는 해운과 관련된 특수목적법인(SPC)이다. 해운사들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운영하는 것은 해운업 특성 때문이다. 해운사는 배를 건조하거나 용선할 때 자금을 단독으로 대지 않고 금융사(대주사)의 투자를 받아 운용하는데 이때 투자한 해외 대주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진행한다. 탈세 목적일 것이라는 외부 추정과는 달리 투자나 자원개발 목적으로 정상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이 공개됨에 따라 즉각 신원 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역외탈세 과정을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와 관련된 거래가 대부분 해외에서 은밀하고 복잡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역외탈세의 수법은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어 과세당국이 뒷북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차명계좌를 다단계로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역외탈세자들은 조세피난처에 주소를 두고 국내 비거주자임을 내세워 국세청의 화살을 피하고 있다. 내부거래 조작, 무신고 자금거래, 위장 비용처리, 외국인 위장 등은 국세청이 꼽은 대표적인 역외탈세 수법이다.
화학제품 수입중개 업체 A사 대표는 무역중개 수수료를 국외에 개설한 스위스 비밀계좌에 빼돌렸는데 국외 금융 계좌는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금융투자 업체 B대표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금융상품에 투자한 뒤 거둔 투자 소득을 신고도 하지 않고 국외 계좌에 숨겼다.
국외에서 제품을 수입하는 업체의 C대표는 국내에서 거래를 하면서도 마치 홍콩 현지법인이 수행한 것처럼 위장해 관련 이익을 국외로 이전하고 이 중 일부는 자신의 페이퍼컴퍼니에 숨겼다. 제조업을 하는 D대표는 중국 현지 공장에서 위탁생산한 제품을 직원 명의의 홍콩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수출한 것으로 위장해 관련 이익을 홍콩에 은닉했다.
국세청이 집계한 지난해 역외탈세 적발 규모는 8258억원(202건)이다. 2008년 1503억원(30건)에 비해 5배 넘게 늘어났다. 국세청은 역외탈세를 막기 위해 2011년 해외 금융계좌 신고제를 도입했다. 국내 거주자와 국내 법인이 보유한 해외금융 계좌의 잔액 합계액이 연중 하루라도 10억원을 넘으면 계좌 내용을 다음해 6월까지 관할세무서에 신고해야 한다.
10억원 이상 신고 의무 2011년 개인 211명이 9756억원, 법인 314곳이 10조5063억원의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했다. 지난해에는 개인 302명과 법인 350곳이 모두 18조6000억원을 신고했다. 개인 1인당 평균 신고금액은 69억원, 법인은 471억원이다.
특히 개인 스위스 계좌 신고액은 1년 새 13배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 7월 한·스위스 조세조약이 발효되어 국세청의 정보 접근성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아직도 신고되지 않은 불법 해외계좌들이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국세청은 해외 소득자 10만여명의 명단도 확보하고 있다. 이들 명단은 조세조약을 맺은 78개국에서 최근 3년 동안 한국에 통보한 명단이다. 국세청이 이들 중 상당수가 해외에서 올린 소득을 국내에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세청은 6월 한 달 간 해외금융계좌 신고를 받았다. 신고 대상은 지난해 거주자 및 내국법인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금융계좌 잔액의 합이 하루라도 1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다. 해외금융회사에 개설·보유한 은행 계좌와 증권계좌의 현금, 상장주식을 포함한다. 기한 내 신고하지 않거나 과소 신고한 경우 해당 금액의 10%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윤상환 매일경제 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4호(2013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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